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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특집]
나의「좋은 새로운 것」을 위한 첫걸음 93 여름 시인학교-하섬에 다녀와서
윤수하/원광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2004-02-03 16:54:22)
어떤곳에 다녀와서를 쓴다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일은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다녀왔다」라고 쓰고나서 「그런데 그곳에서」부터는 깡그리 잊혀진 기억속에 한가닥의 실마리도 잡혀지지 않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말했었다.「좋은옛날 것 위에 건설하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건설하라」 브레히트와 하섬에 다녀온 것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루카치를 싫어했던 죽은 브레히트는 브레히트대로, 하섬은 하섬대로 나의 나쁜 새로운 것위에 말뚝을 하나씩 박아놓고 있다. 그것이 큰 말뚝이건 작은 말뚝이건간에. 「나쁜 것」과 「좋은 것」. 내 삶은 이제야 진실로 혼돈스럽고, 두렵고, 방종하고 허황되고, 미련스럽고, 탐욕스럽고, 치졸해지며 나쁜 모든 것이 다 합쳐진 애매하게 혼합된 빛깔을 띄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빛속으로 들어가 스팩트럼이 될 수도 있으며 파레트에 요사한 색들로 섞이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어둠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동안 일정한 급료와 보험혜택의 안정과 컴퓨터. 복사기. 팩스, 내책상이 놓여진 곳에서 살아오던 습관을 구겨서. 침까지 탁 뱉아서 가볍게 집어던지고 얼마전 그 「나쁜 미로」속으로 들어섰었다. 목구멍에 거미줄이 들어서게 된 주제에 캠프에 따라나선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게는 나를 지켜보는 나의 눈이 있다- 옛날에 아하슈바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지구의 끝을 찾아서 걷고 또 걸었다. 꿈에서 가끔 그를 보곤 했다. 오랜동안 나는 그처럼 무언가 보이지않는 끝을 찾아 따분하고 지친 걸음을 옮기는 것 같았다.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욕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갈증. 그저 바다가 보고 싶다는 것외에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스무살때 쯤 참 바다를 좋아했었지. 무작정 기차나 버스를 잡아타고 여수며, 목포며. 바다가 붙은 육지를 찾아나서곤 했었지. 넉넉치 못한 호주머니는 차를 탄 다음 걱정했었다. 나는 무리에 섞이어 국민학교때처럼 내 이름이 쓰인 보랏빛 명찰을 가슴에 달고 쓸데없는 버릇인 희희낙락을 과시하머 그곳을 향했다. 고사포 해수욕장으로 가는 동안 내내 단순한 상태가 되려고 노력했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나선다는 것, 게다가 많은 이들과 함께 여행을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단체여행에는 눈에 띄는 두 부류가 있다. 불쑥불쑥 까불고, 말 잘하고, 잘 웃는 자와 혼자 어슬렁 어슬렁 주변을 떠도는 자. 둘 중 더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자는 전자이다. 낯설어 하고 당황하는 자신의 뾰족한 감각을 숨기려고 무던히도 노력한다. 나도 그렇다. 그 곳, 정말 말 그대로 섬 같은 그곳은 아주 미세한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백사장. 공들인 석조작품 같은 바위들. 시원스레 사각이는 대수풀과, 수줍은 상사와. 아주 작은 벌레부터. 도마뱀등의 생명체들이 꿈꾸고 먹고 하품하고, 살고있는 작지만 거대한 생명의 덩어리였다. 꼭 이루어져야 할 것들만 모아서 만들어 놓은 최후의 방주 같았다. (없어져야 할 것도 물론 있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쓸쓸함은 늘 일이 많음으로 인해 젖어들 기회가 없었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거북함은 그들 모두가 마음을 짐 풀듯 풀어놓음으로 엷어지고 말았다. 시를 쓴다는 일에. 시를 쓰러 만난다는 일에 손이나 머리가 필요치 않다는 것, 대화나 강의의 내용보다는 가슴을 맞대는 진지함이 더 중요하다고 누군가 말했지. 우리는 체면이고 뭐고 집어던지고 한밤중에 방울단 고양이 걸음으로 수선을 떨어 춧불아래 라면을 끓여 먹으려 키득거렸다. 자신의 모양새를 신경쓰지 않은 채 어둠이 짙은 백사장 가운데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댔다. (고성방가로 잡으러 오는 순경이 없음) 햇빛 좋은 오전의 어린애처럼 바위틈을 천방지축 뛰어다녔다. 사람은 우스울 정도로 허술해질 수 있으며 눈물나도록 순수해질 수도 있다. 나는 그들 속에서 나를 보았다. 풀매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고, 바닥에는 어린애 손가락만한 게들이 옆으로, 옆으로 나돌아 다니는 방에서의 진지함. 어둑해진 밤바다에서 모기에 뜯겨가며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실존이나. 실천이 아닌 평범한 사랑얘기. 영화얘기. 친구 얘기. 대숲사이 새벽녘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는 구도하는 자처럼 투명하고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다. 그러나 해가 뜨기 시작하면 바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섬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아주 작은 원초의 세포부터 영장류까지 꿈틀거리는 섬에 바다의 사랑은 꽃들로 피어나고. 이틀째 새벽녘 비오던 날의 바다는 부드러운 우울에 잠겨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바위에 앉아 나는 사람들이 골아 떨어져 있을 숙소쪽을 바라보았다. 우울한 바다가 되어 섬쪽을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성격의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덩이리로 뭉쳐질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심장으로 느낄 수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롭다운 일인가.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우리가 섰는 땅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우리는 진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쉽없이 꿈틀거리고, 수없이 많은 들숨과 날숨 중에 한가닥의 숨이라도 소중히 쉬어야 한다. 누구나 시를 쓰진 않는다. 누구나 시를 쓸 순 없다. 그러나 누구나 시를 품을 수 있다. 시는 혈관 한가닥처럼 손톱밑의 때처럼 모르는 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이 아름다워질 때먼 아주 커다랗게 나타난다. 그것은 겁나게 불어나는 생명체이다. 우리 모두 시를 쓰려고 그 속에 간 것은 아니다, 나도 쓸 수 없었고, 쓰기도 겁이 났다.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이 「고상한 취미」나 「고상한 밥벌이」가 아닌「영혼의 자유로운 기도」임은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의 하나다. 이제와서 조심스레 나는 그곳에서 만난이들의 기억을 들쳐본다. 피식거리고 웃기도 하고, 굴껍질이 닥지 닥지 붙은 바위위를 걷던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기도 하면서. 강의하는 선생님의 침세례를 맞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열중하던 사람들. 사람이며 게들이며 매미들까지 열중하는 가운데서도 고개를 맞대고 개잠에 빠져들던 사람들, 모기에 물려가면서도 캔맥주 하나에 꼬드김을 당해 노래를 불러주던 착한친구. 볼일(?)을 보기위해 전망 좋은 바위틈을 팔장끼고 찾아다니던 우리들 누구누구. 인도 고행자처럼 물구나무 서기로 가부좌를 하던 김선생님. 국. 중, 고교 선배임을 수줍게 고백하던 선배. 새벽녘에 집에 가겠다고 짐싸들고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던 누구. 다 보고 싶다. 다시 만나고 싶다. 그래서 정말 근사하게 웃어주고 싶다.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방안 가득 어질러진 신문이며 책들, 종이장들을 본다. 우리는 참 우스꽝스러운 우화 한편처럼 살아간다. 삶에서 배운 제스처는 모호한 존재의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속에 깊이 들어와 찰랑이는 하섬의 파도소리를 듣는다. 내마음속에 잠긴 고요는 내 숨쉬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좋은 옛것이 아닌 「나쁜 옛것」을 남의 남편이 된 옛애인 바라보듯하고 나의 「좋은 새로운 것」을 위해 영혼의 자유로운 기도를 올리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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