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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 | [문화가 정보]
‘축소판 한국 근현대사’ 항도 국산 쌀, 그 생산과 착취의 땅
송만규/ 화가 (2004-02-05 10:54:13)
내가 활동하고 있는 『갑오세』 창작회에서는 지난 2월 초순에 ‘군상항을 통해서 본 한국 현대사’ 라는 주제로 10월중에 전시회를 하기로 계획해 놓고 있다. 예전에도 군산이라는 곳은 이래저래 자주 다녔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계획해 놓은게 있어서 그런지, 새벽에 달리는 군산선 열차속에서라든지, 들판 가로질러 내빼는 전군간 버스속에서의 느낌은 그전과 같지 않다. 무언가 깊이 사고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의미를 잔뜩 부여해 보기도 싶고, 그러다보니까. 뭐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잡히는 것 같기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서는 작품에 들어가기는 욕심이 차지 않는다. 때마침 문화저널에서 기획하는 백제기행중에서 ‘쌀, 그 생산과 착취의 땅’ 이라는 주제로 김제와 옥구, 군산 등을 찾아 본다고 하길래 반가운 심정으로 회원들 몇 명과 두딸 지은이 민지랑 마누라까지 온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한 셈이다. 아이들도 역사기행 등 여기저기를 잘 따라다녀 버릇해서 채비를 곧잘 한다. 날씨는 분단절을 맞이하여 고통을 함께 하자는 것인지 찌푸르퉁한 상태에서 우리는 관광버스에 몸을 실어 기행길에 올랐다. 조금 달리려니까. 주최측에서 마이크를 잡더니 “예로부터 조상대대로 우리민족은 땅을 일구고 물을 대면서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했던 쌀의 수난은 민족 수난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오늘 8.15를 맞아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가장 가혹하게 수탈이 이루어졌던 이 지역을 찾게 됐다...”는 등 기행 배경을 비교적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30명이 넘는 듯한 수가 참석한 백제기행단이 맨처음 도착한 곳은 김제시 요촌동 동진농조 안에 있는 『수리만속박물관』 이었다. 본래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는데 담당직원이 부러 출근해서 설명까지 곁드려 안내를 해 주었다. 이곳에는 농경시대의 각종 유물로서 1천2백 50여점이 전시돼 있는데, 상당부분은 어려서부터 한번쯤은 보았던 것들이고 이름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것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누구보다도 우리집 작은 놈인 민지가 더욱 더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열심히 쳐다보며 물어보곤 한다. 김제시내를 빠져나와 고부와 부안쪽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부량면에 이르면 넓디넓고 푸르른 들판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곧게 뻗어지는 둑이 동쪽으로 보인다. 이것이 제천의 의림제, 밀양이 수산제와 더불어 ‘3대수리시설’에 속하는 유명한 벽골제의 유적이다. “벽골이라는 말은 김제의 옛 이름으로 ‘볏골’ 다시말해서 ‘벼의 고을’이란 뜻”이라고 전북대 박물관장인 윤덕향 교수는 설명해 준다. 필자는 벽골제라는 곳은 물이 엄청나게 고여 있는 저수지로서, 농경지에 대하여 조직적인 급수를 위해 만들어진, 곧 관개를 위해 만들어진 걸로 만 생각했던 것이 이날 설명을 듣고 보니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관개용 저수지에는 ‘보’라는 이름이 따로 붙어있는 것만 보아도 짐작이 되지만, 벽골제는 관개용으로 이용하려는 노력은 여러차례 있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아 둑안의 농사에만 도움이 되도록 바닷물을 막는 구실과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겨울철에 물을 담아 두었다가 모내기 때에 쓰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비가 한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한눈을 파노라니까. 돌로 쌓여진 둑길 양옆으로 갈대가 숲을 이루기 시작하는데 그 사이로 열두어살이나 먹었을가 하는 소녀아이가 한쪽 손에 가벼워보이는 보따리를 든 것이 아마도 엄마의 심부름 길이라도 되는 듯 싶다. 한 화폭의 구도로 아스란히 스친다. 이 소녀는 백제시대의 할아버지들께서 개펄이었던 이곳을 발이 흙탕에 빠지지 않도록 길을 돋아 놓은 것이 바로 벽골제의 둑길이라는 것을 알고 나 걷고 잇는지. 버스는 창하면을 지나 만경강 하류쯤에 이르는 신창다리 위를 지나고 있다. 강물위에는 제법 굵어진 빗줄기의 파장이 원구성을 이룬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할 무렵에 일본인들이 곳곳에 몰려와서 땅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큰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전라도에는 군산을 거점으로 삼았다 한다. 이곳 김제 지방에서도 아베라는 사람은 김제읍과 진봉면 일대의 논을 손아귀에 놓고 아베농장을 세웠는데, 지금의 진봉면사무소 자리가 아베농장의 본부이었다 한다. 아베는 동진면 서쪽 바다를 6년 만에 10Km에 이르는 동진방조제라고 불리는 둑을 쌓아 간척지를 만들어 2천정보의 논이 생기자 거기서 나오는 윤기가 잘잘 흐르는 맛좋은 쌀을 군상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 간척지는 지금은 광활면의 행정구역에 속한다. 군산으로 가던 중에 발산국민학교에 들리기로 했다. 교문을 들어서니까. 교실수가 그리 많지않고 운동장도 여느 국민학교 정도의 아담하게 가꾸어진 학교였다. 운동장 한쪽으로 다듬어진 통로를 따라 교사 뒤쪽에 돌아서니까.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잘 다듬어진 정원에 얼마나 됐을까, 오래 묶었음직한 관상수들이 군데 군데 세워져 있고 보물들이 여러점 놓여져 있다. 이곳 학교자리에서도 일본인이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면서 주변에 가치있는 보물들을 가져다 자기 농장 정원에 장식해 놓은 것이다. 기행단들이 정원을 둘러보는 사이에 일식건물인 듯한 곳이 뒤편에 보이길래 가까이 다가섰다. 건물의 크기로 봐서도 곡식 창고는 아닌 듯 싶다. 견고하고 섬세한 시멘트 건물이 조그마하게 한 채 남아있다. 과연 무엇에 쓰여졌던 곳일까 하고 궁금해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금고같은 인상을 준다. 강한 철판문짝에다가 당시 쓰여졌음직한 커다란 자물통에 MADE IN USA라고 쓰여진 채 굳게 닫혀 있다. 순간 기분이 불쾌하고 표한 감정이 생긴다. 남의 땅덩어리에서 소작인을 부려 착취한 금은보화를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주의 제품의 자물통을 굳게 채워놓지나 않했을까. 정원쪽으로 다시 돌아오니 누군가가 그런다, 여기있는 문화재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해도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그대로 놔둔단다. 그러니 그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기행중 나에게는 가장 관심이 많았던 군산에서 월명공원에 오르고 있다. 삼삼오오 작을 지어 무슨 얘기들인지 진지하고 재미들이 있다. 오르막길은 포장이 잘 돼있고 길 양옆으로는 숲이 제법 빽빽한데, 머리위로는 공원에서 관리하는 듯한 비둘기들이 구구대며 우리일행을 반긴다, 중간쯤에는 두꺼운 돋보기를 코밑으로 흘러내린 듯하게 쓴 사주, 관상을 보는 할아버지가 개시해 달라고 부른다.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올라 수시탑 앞부분에 섰다. 안개가 끼어서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으나 시내정도는 한눈에 들어 오고, 역시 바다 바람의 느낌은 강하게 와 닿는다. 이병훈 군산문화원장은 이곳저곳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푸집하게 설명을 한다. 1899년 군상항이 개항하자 군산을 거접으로 일제는 전북 서쪽평야 지대인 정읍, 김제 부안, 익산, 옥구 등지를 손아귀에 넣는데 혈안이 되었다 한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인들은 농지를 8만 7천정보 정도 소유하였는데 그중에 전 남북은 그 반이나 되는 4만2천여 정보가 됐다. 1915년 통계에 의하면 전북에서의 순소작은 68% 달했고 자작도 5.8% 뚝 떨어져 대부분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주로 군산을 통하여 전북에 들어와 농지를 수탈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헌병과 경찰을 앞세우고 관전답은 물론 토지조사라는 명목으로 등록되지 않은 농지를 빼앗아 차지한 것이다. 일제가 만들어 낸 동양척식회사에서는 동진강, 만경강, 금강의 연안과 서해연안을 깊히 쌍아서 광활하게 버려진 개펄을 논으로 개별한 이 농지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들에게 분할해 주었는데, 그 중에 현재 군산시 미성동 일대에는 『불이농촌』을 세워 일본에서 골칫거리라고 말썽부리는 천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일본에서는 천민촌을『부락』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천민촌 부락이라고 하는 제한구역에서 살던 천민들이었다. 이때에 부락이라고 하는 마을 칭호가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옮겨졌고 행정 최말단의 단위마을로 불리워 썼다. 이것은 우리의 농촌에서 농지나 쌀 등 온갖것들을 착취해가고도 모자라서 인간적 존재가치 조차도 피폐화 시켜버릴 셈으로, 다시말해서 천민취급을 하려는 의도에서임이 분명할 것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식민지적 잔재를 지금껏 그 『부락』이란 칭호를 없애버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부락민이라고 하는 천민이 남아 있어서 골칫거리라 하고, 이들은 제한된 지역안에서 외부와의 관계로 혼인도 물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1910년대에 들어서자 군산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완전한 기지가 되었고, 쌀창고가 부두일대에는 물론이거니와 현재 중앙로 1가인 오거리에까지 즐비하게 들어섰다고 한다. 그 거대한 창고군과 더불어서 대규모 정미공장이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더러는 조선인의 소유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 규모는 아주 영세하였다. 이 정미소 안에는 부설로서 설치한 ‘미선소’라는 것이 있었다. 좋은 쌀만을 골라내는 곳인데, 유리판 위에 쌀을 부어놓고 돌과 깨어진 쌀 등 잡것들을 가려내어 그야말로 백옥 같고 기름진 쌀만 골라내는 작업이었다. 작업대 양편에는 참하고 예쁘게 생긴 부녀자들로만 나란히 앉혀서 일을 하게 하는데 총감독은 일본인이 하였다. 우리는 소설『탁류』로 화제가 바뀌어 얘기들을 했다. 주변에는 나들이에 나선 허스름한 차림새의 시민들도 있었는데 50대쯤 돼 보이는 한 사내가 “저사람들‘채’씨들 인가봐. 탁류 들먹거리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귀에 들려온다. 채만식이나 탁류나 군산시민들에게는 특히 잘 알려진 모양이다. 그 사내 약산 뒤쪽으로는 왠 노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의 너댓살정도 돼보이는 혼혈아를 업고 있는 60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얼굴엔 잔주름이 많이 나 있었고 눈매는 약간 개슴치레 하면서 한 맺힌 듯한 할아버지였다. 이놈의 팔자야 어쨌든 ‘아들 미워하는 애비는 있어도 손주 이뻐하지 않는 할애비 없다’더라, 등에 업힌 내 손주년만큼은 어화둥둥 내사랑이야. 지금 서이는 이 월명산에 대해서도 알아봄직하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설림산, 점방산 등은 표기돼 있으나, 지금 흔하게 쓰고 있는 월명산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월명산이란 이름은 일제가 식민지 전진기지화하면서 지은 이름 같은데, 그좋은 입증으로 지금 일본에는 군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모임인『군산월명회』라는 단체가 있고 당시 군산중학교 출신들과 교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확증이 간다. 째보선창이란 지금 동부어판장을 이르는 본래지명이라고 한다. 개항이 되면서 중동의 어항이 이 째보선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째보란((언청이))라는 말이다. 전해 내려오기로는 그곳 지형이 째보처럼 째진 개천하구로 이루어진데서 왔다고도 하고 옛날에 째보객주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워낙 돈이 많아 어항의 경제권을 쥐고 흔드는 바람에 그렇게 불러워 졌다고 한다. 『은파』라는 말도 본명은 『미제』로서, 대동여지도에 표기할 만치 오래된 농업용수의 재원이었고 그 물로 해서 미제동 옥구상평지 일대의 논농사를 지었다 한다. 저 멀리 바다건너편으로 장항제련소, 장항선 창가, 그 오른편으로 금강하구뚝이 보이고 그 오른편 언덕에 누군가가 벌써 호텔인 듯한 건물을 지어놨다. 바다안쪽으로는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그 뒤편에 잇음직한 제일고등학교가 생각난다. 시인 이광웅 형이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오송회 사건, 전교조 관계로 해직 등 투병과 고초속 에 가신 분의 얼굴이 시친다. 내항, 도선장이 보인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쯤 어느 건물에 살고 있을까, 산 바로 아래 군산의료원이 하얀색 건물로 보인다. 뜻하지 않게 그 병원엘 간 적이 잇다. 지난 89년 2월 어느날 농사일을 하는 정판용(당시54세)씨가 저녁 9경 집에 가는 길에 마침 산책을 하던 미군에게 폭행을 당해 뇌진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군산비행장앞과 시내등지에서 항의 시위를 했고, 몇 가지 사항들을 요구했었다. 한편 유가족들과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은 군산의료원에서 영결식을 갖고 군산역전에서는 노제를 지낸 기억이 생생하다. 군산의료원이 무슨동에 속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오른편쪽으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영화동이 보인다. 그 해, 그러니까. 정판용씨가 살해되기 전년도인 6월 여름날 미군병사들에 의해 이곳에서 택시기사가 집단 구타를 당했었다. 군산 일대에서 보여지는 자랑스럽지 못한 미국의 찌꺼기 문화가 판을 치고 잇는 것도 구역질 날일인데 그 야만적인 행태는 우방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군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한반도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군산의 역사는 참으로 압박과 설움과 투쟁의 삶이다. 그래서 필자는 군산의 상황을 말할 때 ‘축소판 한국근현대사’라고 한다. 기행단 일행은 개발공사중인 오식도를 거쳐, 최무선이 처음으로 화약무기를 만들어 왜국 선단을 무찔렀다는 옥구 진성장터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금강 하구둑을 답사하고 기행일정을 마쳤다. 무심코 스쳐갔던 곳, 혼자서 읽고, 보고, 생각했던 것들을 여럿이 함께 짧지만 토론하고 사고해 볼 수 있는 시간이 흐뭇한 하루를 연출시켰고 그 느낌들이 화폭에 옮겨지리라. 백제기행 제1회: 1988. 5. 15 동학기행"우리는 녹두새를 보았다"(정읍,고부) 제2회: 1988. 7. 16-17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지리산 일대) 제3회: 1988. 9. 11 살의 수난사9군산미곡창고, 부안계화도) 제4회 : 1988. 11. 12-13 회문산의 삶과 섬진강의 문학(섬진강, 회문산일대) 제5회 : 1989. 1. 15 판소리 동편제의 맥을 찾아서(남원, 구례) 제6회 : 1989. 3. 19 백제부흥운동의 현장을 찾아 제7회 : 1989. 5. 27-28 지리산의 문학(지리산 달궁, 만복대 일대) 제8회 : 1989. 7. 23 백제문화의 언류를 찾아서(부여,공주) 제9회 : 1989.9.24 흙과 불과 장인의 정신(고창, 부안도요지) 제10회 : 1989. 11. 18-19 지리산과 끝나지 않은 전쟁 제11회 : 1990. 1. 20 익산 먹거리 문화를 찾아서(황등, 함열, 웅포) 제12회 : 1990. 3. 25 반계유형원의 실학사상(부안 우반동 반계고택. 내소사) 제13회 : 1990. 5. 5-6 태백산맥제(노고단, 화엄사, 피아골) 제14회 : 1990. 7. 22 전북의 장승과 성신앙(남원만복사, 순창팔덕, 정읍칠보) 제15회 : 1990. 9. 23 전북카톨릭 수난의 발자취(치명자산, 천호성지, 여산성지) 제16회 : 1990.11.17-18 우리의 ?땅을 지키는 사람들(임실, 진안, 격포) 제17회 : 1991. 1. 19-20 판소리 서편제의 맥을따라(광주, 전남보성) 제18회 : 1991. 3. 24 순창의 고추장과 선비들의 매운맛 (순창, 귀래정, 삼인대) 제19회 : 1991. 5 .17 정여립반역의 현장과 호남편견(진안죽도, 용담, 곰티재) 제20회 : 1991.7.13-14 다산실학과 고산문학(전남해남, 강진) 제21회 : 1991. 9. 8 미륵사지와 석공의 장인정신(익산군 일대) 제22회 : 1991 11. 3 장수삼절과 적상산의 단풍(무주, 장수군일대) 제23회 : 1992. 1. 11-12 운주사의 천불천탑과 조선시대 만화(전남화순군 일대) 제24회 : 1992. 3. 15 법성포구의 전설과 오늘의 풍경(전남 법성포, 영광일대) 제25회 : 1992. 5. 9-10 백제의 미소-매애불로 가는 길(서산마애불등 충남일대) 제26회 : 1992. 7. 12 민중의 불상과 무명승의 사리탑(구례연곡사 일대) 제27회 : 1992. 9. 26-27 보길도의 삶과 고산의 풍류(전남 보길도) 제28회 : 1992. 11. 8 석정의 시와 매창의 한(부안군 일대) 제29회 : 1993. 1. 16-17 청학동 사람들의 삶과 꿈 (지리산 청학동) 제30회 : 1993. 2. 21 입암산 아래 사는 사람들(정읍 입암면 일대) 제31회 : 1993. 4. 17-18 한국의 정자문화와 가사문학(전남담양 장성일대) 제32회 : 1993. 6. 20 대둔산, 그 산마루 지축을 울리던 함성들(대둔산, 화암사, 일대 - 임진 왜란 전적지를 중심으로) 제33회 : 1993. 8. 15 쌀, 그 생산과 착취의 땅 - 항도 군산을 중심으로 제34회(예정) : 1993. 10. 9-10 남도 전통문화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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