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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 | [문화시평]
사리진 역사의 한페이지 재조명 故 김인전 선생 추모 가을 문화예술제
김 사은/전라일보 문화부 기자 (2004-02-05 10:59:32)
지난 9우러 13일부터 21일까지 전주 예루 갤러리에서는 다른 전시회와 다른 느낌을 갖게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전주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이국에서 숨진 경재 김인전 선생의 기념사진과 선생을 추모하는 미술작품이 전시된 예루 갤러리에서는 많은 관람객이 찾아와 옷매무새를 다듬고 선생의 넋을 거렸다. 새삼 선생의 위상을 확인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 예술기획 예루와 문화단체인 오양 연구소에서 주관하고 김인전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회장 김대전 전주서문교회 장로)에서 주최한 가을 문화예술제는 기념사진 미술작품 전시회를 비롯, 14일 오후7시 30분 전북 예술회관에서 열린 추모연주회, 18일 있는 학술 심포지엄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려 종합 예술제로서 면면을 과시했으나 단순한 문화행사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 김인전 선생을 추모하고 가려진 역사를 재조명하는 자리로서 더 큰 의의를 남겼다. 한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조명하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을 통해 미미하게나마 민족정신의 발굴에 관심을 갖게된 셈이다. 선생이 일반인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8월 선생을 비롯한 4명의 유해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송환되어 구긻묘지에 안장되면서부터이다. 우선 김인전선생의 애국투쟁에 비해 선생의 사후업적이 얼마나 평가되지를 못했는지부터 살펴보면 이 행사의 결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비교해볼 수 있을 듯하다. 김인전 선생은 1976년 10월 7일 충남 서천에서 신문화운동에 전념하던 김규배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선생은 15세때 한학뿐 아니라 제자백가, 불교, 도교를 연구했으며 신학문을 통한 국제정세에도 통찰력을 지녀 주변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 무렵 나라안은 혼돈속에 파묻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 계속되었다.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탈취당한 것은 잘못된 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통감하고 1906년 서천에 한영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가르치는데 전력했다. 30세의 혈리왕성한 청년이 된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했고 이 무렵 기독교의 진리에 감명받아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신학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1911년 고향에 사재를 털어 교회를 세운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있는 서문밖 교회에 2대 목사로 초빙되어 시무하였다. 이때 청년들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학생을 가르쳤고 이후 5년 동안 예수교 장로회 성격학교 교수와 전북노회 임원과 회장을 지내면서 전북교회가 호남의 대표적인 교회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교계는 물론 일반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선생에 대해 일경은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나 선생은 이에 개의치않고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호남지방 기독교계 민족운동의 중추적임무를 담당하여 전주, 군산에서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독립선언문, 태극기등을 인쇄하여 배포케하는 등 만세운동을 총지휘한다. 전주에서 3월13일 신흥, 기전 학생들과 예수교 신도들이 천도교측과 합세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일경은 배후인물로 김인전선생을 지목, 검거에 나섰다. 일경으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게된 선생은 선영과 남은 가족들을 위한 최소한의 재산만을 남기고 나머지 재산을 정리하여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정요인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상해 임정에서 선생의 위치와 역할은 막중한 것이어서 해박한 지식과 국제 정세에 대한 명쾌한 통찰력으로 대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활약,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다 1922년 4월에는 입법부의 수장격인 의정원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게 된다. 선생은 1923년 5월3일 상해의 한 여관에서 국가의 장래를 토의하던중 쓰러져 12일 오전 1시 30분 광복을 보지 못하고 48세로 서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상해 거주교민들은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엄수하였고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전주 서문외 교회와 전북노회에서는 엄숙한 추도 예배가 거행되었다. 조국이 광복된후 1980년 벙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선생의 뜻을 받들었으나 선생의 업적을 평가하는 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간 중국 만국 공원안에 안치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1993년 8월 5일 현 정부와 중국 정부의 교섭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봉환되어 8월 10일 동작동 국립묘지 임시정부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생의 형제 조카 등 가족이 중심이된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 문화예술제로 추모 사업의 첫 결실을 맺게 된것이다. 지난 8월 13일부터 21일 까지 에루 갤러리에서 열린 기념사진, 미술작품 전시회는 선생의 빼어난 솜씨와 인품을 들여다볼수 있는 선생의 메모,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 전북노회장 재직시 작성한 회의록 등과 임정 사진자료, 생전모습이 전시돼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또 화가 김충순 씨의 작품에서 독립운동과 목회 활동에 여념이 없던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14일 오후 7시 30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추모연주회는 전주대 김광순 교수가 작곡한 시편 4편을 비롯 백병동 교수(서울대)와 강준인씨(서울음악학회)가 작곡한 곡이 연주되었으며, 소프라노 박노경 교수(서울대)가 출연, 행사를 돋보이게 했다. 또 오문자 교수(원광대)가 이끄는 무용단이 선생을 추모하는 무용을 공연, 많은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18일 오후 2시 소극장 예루에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인전선생}을 발표, 관심을 모았다. 이 교수는 "김인전 선생은 호남지방에서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학을 담당한 인물이며 식민지 시대에 민족구원의 횃불을 올린 선각자"라고 밝혔다. 또 이날 학술심포지엄에는 전북대 강길원 교수와 원광대 이동우 교수가 토론자로 나와 김ㅁ고사의 교육운동과 망명과정등을 밝히는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김인전선생의 사촌동생으로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주관하고 있는 김대전 장로는 "재산과 자신을 다 바쳐 훌륭한 애국정신으로 살아온 선생을 재조명하는 일은 단순히 유족들의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사라진 역사의 한페이지를 다시 찾아 내는일"이라고 밝혔다. 후세의 무관심으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선열을 찾아 핵적을 올바로 조명하고 뜻을 널리 기리기 위해 마련된 가을문화예술제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폐막되었으나 선생의 정신을 계승, 우리의 역사관에 반추시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들의 몫이자 과제로 남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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