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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 | [문화칼럼]
『서편제』와 ‘예향 이데올로기’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04-02-05 11:00:40)
지난 6월 29일 광한루 특설무대에서 열린 춘향제의 판소리 명창대회는 TV에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대회를 주관한 KBS가 “정규방송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결승 참가자들에게 10분을 주어야 할 시간을 3분만에 끝내도록 하는 횡포를 저질렀고, 급기야 이에 반발한 국악인들이 심사위원석에서 철수하여 나중에 광한루 완월정에서 결승 경연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는 촌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KBS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명색이 공영방송인 KBS가 그럴 수 있느냐고 비판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비판이 KBS경영진과 방송정책 담당자들을 향한 것이라면 모를까 그 현장의 방송 담당 실무자들에겐 온당치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건 그들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전통문화도 TV에 기대지 않고선 대중성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 TV라고 하는 건 철저하게 지방문화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이른바 ‘서울공화국’체제의 앞잡이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최근 발간한 『93 문혜연감』은 각 지역의 분야별 활동과 관련해 한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흥미롭 다기 보다는 서글픈 사실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예향(藝鄕)’이라는 말의 허구성이다. 웬만한 지방도시에 가보면 한결같이 그 지역이 ‘예향’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아예 표어로 내걸고 잇는 곳도 많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93문예연감』은 미술전시회, 문학동인지 발간편수, 문학관련 행사, 국악공연, 연극 공연등 모든 문화행사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그간의 상식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실상을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낯이 뜨거울 지경이다. 전북, 특히 전주는 그 어느 지역 이상으로 ‘예향’을 강조해 왔다. 언젠가 그 표현의 허구성 여부를 놓고 지역 방송사에서 TV토론가지 벌였던 적도 잇다. 그때 토론에서 제기됐던 한가지 문제는 과연 예술이 무엇이며 문화가 무엇인가 하는 본원적인 것이었다. 역사와 전통만을 따진다면 전주가 ‘예향’인 건 분명하지만 그게 과연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실제 삶에서 유리(遊離)되어 단지 문화적 유산으로 존재하는 걸 ‘예향’의 근거로 삼는다면 그건 어쩐지 비극적이다. 문화체육부가 지난 7월에 발표한 ‘새문화 체육 청소년진흥 5개년 계획’은 ‘곁에 있고 함께 하는 문화, 누구나 즐기고 신명나는 문화’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다. 지방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 표어의 기만적인 말장난엔 화가 치밀망정 그것이 당위적으론 옳다는 건 분명하다.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마저 지배하고 있는 서울은 한번도 ‘예향’임을 주장한 적이 없는데 문화의 파탄 상태를 목격하고 있는 지방 도시들이 앞다투어 ‘예향“임을 주장하는 건 망국적인 기존의 ’서울공화국‘체제를 정당화시켜 주는 자위(自慰)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물론 나이가 지긋하게 잡수신 분들이 전주가 ‘예향’임을 주장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이 모든 인구에 회자되는 표어 정도로 인식된다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서편제』를 생각해 보자. 신문들은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가리켜 ‘전통으로의 회귀’니 ‘우리의 것’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느니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야단법석을 보면서 느낀 건 늘 양식만 먹는 부자집 사람들이 모처럼 보리밥에 수제비를 먹으면서 역시 ‘우리의 것’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쳐 올리는 꼴불건이었다. 죄의식 그렇다 천하의 악인도 죄의식은 있는 법이다. 그와 동시에 그 죄의식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일제와 미제 문화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를 다시 ‘국제화’니 ‘개방’이니 하고 떠들면서 일제와 미제문화로 다시 도배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막연하게나마 ‘우리의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있으며 그걸 풀고 싶은 욕구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유심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외국 것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서편제』에게 주는 점수가 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예향론’도 그런 꼴이다. 문화와 예술은 굳건한 경제적 토대 위에 서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거나 좋다는 게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잇는 손바닥만한 문화공간도 없는 전주에서 역사의 유물로 박제를 한‘우리의 것’을 1년에 몇 차례 떠들썩하게 펼쳐 놓고 전주가 ‘예향'임을 주장한다면 그건 우리의 현실을 은폐하고 기만하여 전주가 진정 '예향'으로 거듭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예향'을 역설하던 입으로 전주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직할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어째 좀 이상하다. 어디 전주뿐이겠는가, 우리 시대의 지방 이라는게 다 그런 형국에 처해 있다. 『서편제』난리는 고향이고 전통문화고 일찌감치 내던진 서울 사람들 하는 짓이고 그 이상 열기가 지방으로까지 전염됐을 뿐이지, 애초에 지방에선『서편제』는 그저 제법 잘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웬만한 지방도시들 모두 제발 ‘예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스스로 반납하고 아주 기초적인 문화시설이라도 제대로 갖췄으면 좋겠다. 일상적 삶에서 살아 숨쉬는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소망을 실현시키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어떤 주장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가 될 터이다. 모든 지방민이 ‘예향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서울이 명실상부한 ‘예향’임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서울에 집중돼 있는 예술, 문화공간과 시설이 얼마나 반문화적인 작태의 산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공간과 시설을 지방으로 뜯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모든 문화예술인의 주거의 자유를 제한해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만 살도록 하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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