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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 | [저널초점]
각박한 세상, 사람으로 살기가 어렵다.
윤덕향 / 발행인 (2004-02-05 11:05:25)
며칠전 서울 외곽 신도시 건설현장에 파묻힌 철근과 방치된 철근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였다. 철근의 가격이 얼마이고 철근의 건물, 특히 고층건물을 짓는데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제대로 가늠할 수도 없고 왜 그렇게 방치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나 주변 공사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기네와는 무관하다고 부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정직하지 못한 행위의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아닌 말로 우리네 서민들은 그같은 철근의 한 토막만 있어도 칭얼대는 어린애의 입에 엿을 물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철근을 무더기로 파묻고 아무도 임자가 아니라니 돈에 초연한 사람들이거나 양심이 철근같은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또 철근을 파묻은 사람들이 비단 철근만 파묻었을리도 없고 다른 것들도 그처럼 파묻고 없애고 빼돌렸다면, 재수 없는 소리같지만 제2의 와우아파트가 되지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와르르 무너지고 난 다음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느냐 하는 책임소재로 한판 힘겨루기에 분주할 것이 뻔한 일이다. 그 경우 아마 관계당국에서는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론을 들먹일 것이고 언론에서는 피할 수 있었던 인재였다는 분석기사를 한동안 싣는 것으로 나머지는 시간속에서 잊혀지고 역사적 심판에 맡겨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역사적 심판이니 천재지변이니 불가항력이란 참으로 편리한 용어인 것이다. 6공말기에 있었던 행주대교나 창선대교의 붕괴도 지금은 까마득한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으며 결코 아무도 들추려 하지 않는다. 또다른 다리가 무너지면 그 때 비로소 신문의 한구석에 다리붕괴의 역사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등장할 뿐이다. 진정 이것이 역사적 심판이라면 역사는 없는 것이 낫다. 철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지은 집에서 누가 살 것인지는 따지지말자. 사료용 귀리로 어린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어 파는 세상에서 그 소비자를 구태여 따지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을 묻는 어리석은 일이니 말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건물을 짓는데 손끝 만큼이라도 관계있는 분들이 주된 소비자가 아닐 것은 틀림이 없다. 근본적인 문제중 하나는 이번사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일정분량의 철근을 사용하도록 설계되고 공급되었음에도 이를 이런저런 이유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원칙따로 실행 따로의 관행이 문제이며 그같은 관행이 바단 철근을 파묻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것이다. 공직자 재산등록이다. 재산 공개다. 금융실명제다 하는 소위 개혁이란 원칙과 그 개혁의 실행이 비틀리고 축소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있다. 어느 기업에선가 상징적으로 결재란에 고객란을 두었다는 선전처럼 고객을 생각하고 최선의 봉사를 제공한다는 원칙은 있다. 그럼에도 그 원칙이 제대로 실천되는가는 그 원칙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말처럼 손님이 왕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을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 국가의 주인으로서 그에 합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가? 물론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거머쥔 힘있는 분들은 예외이지만, 평범한 서민의 아낙이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면서 얼마나 종업원의 눈치를 보아야하는지 알 사람은 안다. 친절하고 명랑하게 변했다는 일선 행정 조직은 언론에서 찾는 것이 속편한 일이다. 힘없는 서민이 왕이라면 주인은 황제이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면 종에게 세간살림을 모두 맡겨두고 끽소리도 못하는 주인인 것이다. 사람마다 입장에 따라 다른 의견이겠지만 다가공원을 파들어가는 아파트가 안타깝고, 예고없이 이루어지는 각종 토목공사로 길이 막혀 불편해도 변변한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서민들이 아닌가? 국민의 건강을 서로 맡겠다는 한,양약업계 다툼의 원인을 헤아리되 그저 묵묵히 비상약품을 챙겨야 하고, 질높은 서비스를 표방한 우등고속버스의 오디오 시스템이, 좌석 조정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알아서 사는 서민들이 왕이라면 왕아닌존재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왕이고 주인이라면 차라리 왕이고 싶지않으며 주인이고 싶지않다. 그저 고장난 좌석조정장치를 또렷하게 항의할 수 있는 평범한 서민이면 족하다. 갑자기 가로막는 각종 공사에 시쳇말로 ‘웬 공사’라고 하며 사는 모습이고 싶다. 아니 이것조차 덜 떨어진 자존심의 편린이 섞인 투정이라면 그저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으로 족하고 싶다. 철근을 파묻고, 바다모래를 섞은 레미콘으로, 이런 저런 건축자재를 빼돌려 지은 집에 사람이 살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와우아파트처럼 와르르 무너질 지도 모르는 집을 짓고 사람이 이용하기를 바랐다면 살인예비행위이다. 이같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집단살인을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낸 히틀러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철근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 먹이가 따로 판매되는 선진대한민국에서 사료용 귀리를 우리의 귀여운 어린이에게 먹이려 했을 리가 없다. 그들이 사료나 비료용 콩깨묵을 우리민족에게 먹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아니라면, 노예해방이전 흑인을 노예로 부린 것은 사람을 노예로 한 것이 아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것은 유태인을 같은 인간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최근 한 일본인의 고백처럼 일제가 정신대로 이 땅의 고운 아녀자들을 잡아간 것은 그들의 망막에는 사람이 아니라 소나 말같은 짐승으로 비쳐진 탓이다. 마찬가지로 철근을 파묻고 사료용 귀리를 식용으로 바꾼 것은 그들의 누에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려주는 하잘 것없는 대상으로 비쳐진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쓸 건물을 무너질지도 모르게 짓고 우리네 젖먹이에게 사료를 먹였을 리가 없다. 가난하고 힘이 없어 노예와 다름없을지라도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무너질지도 모를 건물이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료용 귀리로 만든 이유식이 사람의 아이들에게 먹여진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도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비록 힘없고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주머니를 불려주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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