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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 | [세대횡단 문화읽기]
새로찾는 전북 미술사 전북미술 산고(散考)
이철량 / 한국화가·전북대 교수 (2004-02-05 11:20:36)
연재를 시작하며 미술은 인류역사와 함께 발생하고 또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있다. 일찍이 인류가 수렵을 통해 생존을 유지할때는 그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동굴벽이나 돌판 등에 동물, 그리고 사냥하던 모습의 그림을 남겼다. 또한 이후 농경생활에 접어들면 농사짓는 모습이나 추수하는 장면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후에 인류생횔이 많이 발전하고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의 야우가 생겨나 그들의 생활정서가 담긴 순수한 감상을 위한 미술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사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미술을 추적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역사 그리고 전통적 정신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는 의미를 말한다. 우리지역 전북미술도 이러한 맥락에서 예외가 아니다. 잘알고 있다시피 전북은 수려한 산세와 드넓은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사람의 식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해안을 갖고 있어 예부터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삶의 터전으로 최적지였다. 따라서 이고장은 일찍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고대국가의 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때문에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은 일찍부처 미술문화가 발전하였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느 그동안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지역미술이 방치되어 왔었다. 이글은 이러한 인식속에서 출발한 극히 기초적인 자료추적과 작품의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과정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동안 이부분이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자료자체도 매우 불확실하거나 또는 극소수의 자료에 의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부족은 우리 고대 전통사회가 미술에 대한 저급한 인식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그림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였고 평민이나 천민들속에 이루어져 이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또한 빈번한 외침이나 전란 등으로 작품의 산실에 많았던 데도 연유가 있다. 어떻든 이렇게 열악한 현실속에서 나마 지역의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지역 고유의 정서와 표현양식을 정리하고 나아가 오늘의 우리미술을 일구어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가 이글으 쓰는데 있어서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우리의 근대이전, 그러니까 적어도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의 지역에서 활동하였거나 지역출신의 화가와 작품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던 그림이나 이와 유사한 어떤한 자료도 거의 남아있지않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글씨를 썼거나 그림을 그렸던 시화가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서적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 )」(오세창 저)과 이책을 토대로 다시 보충 정리한 「한국서화인명사서(韓國書畵人名辭書)」(김영윤 편저 1959년 11워 초판발행)를 토대로 이지역과 연고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작가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근대이후는 비교적 작품과 작가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형편에 있으므로 작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작품들을 찾아 정리하고 나름의 주관적 입장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앞선 두권의 책에서 보면 지역 연고를 밝혀줄 유일한 근거로 성명아래 본관을 적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 화공이었던 이녕은 전주인으로 도 최충은 해주 대녕인 등으로 적었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본관이라고 밝혀놓은 지역명이 성씨의 본관인지 아니면 본인의 출생이나 기타 그와 연관이 있는 지역인지가 분명치 않다. 예컨대 이녕과 비슷한 시기인 고려 목종조에 송에서 내한한 주저(周佇)는 송나라 온주(溫州)인이라 하였고, 서예로도 필명을 높였던 명장 강감찬은 금천(시흥)인으로 또한 서예로 이름을 얻었던 이행검은 전북 익산 금마인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라시대의 유명한 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최치원은 경주인으로 쓰고 일설에 전북 옥구인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이런한 예에서 보면 단순히 성씨의 본관이 아니라 출생과 관련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한편으로 1985년에 간행된 「호남한국화300년」(호남한국화300년전 추진위원회간행)에서도 조선조 후기 화가인 최북의 경우 우리지역인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근역서화징」에도 나와있지 않으나 「한국서화인명사서」에서 무주인으로 기록된데서 연유된 것 같다. 이러한 기록들은 물론 현재로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느 없다 하더라도 일단 의문의 대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필자는 본고에서 상기한 두권의 자료를 기초로 하고 가능항 여타 자료들을 종합하여 전북지역인으로 언급된 작가는 모두 모아보기로 하였다. 물론 이부분을 후일 더욱더 깊은 연구와 사료의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실상 우리나라 미술역사상 가장 작품이 남아있지 않은 시기이다. 삼국시대는 고분벽화를 통해서나마 사대적 표현양태를 다소나마 확인할 수 있으나 고려시대는 그나마도 화적이 드물다. 다마 현존하는 불화 등으로 이시대의 그림이나 미술문화가 대단히 높은 기량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역이 빈번하여 상호 영향을 받아 색채회화 이외에 수묵화 등이 발달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으나 현존하느 작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 전북의 미술도 나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기후상으로 전북인으로 추정되는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이녕(李寧):출생년은 알 수없으나 전주인으로 그림으로 화명이 높았다. 이준이(李俊異)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전해며 아들 이광필과 함께 궁중화가로 활약하였다. 특히 산수화에 특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산수화 특히 실경산수화에 뛰어났다는 것은 1124년에 사은사로 송나라에 갔던 이자덕과 김부철을 수행하였는데 송대 마지막 황제 휘종으로부터 "고려의 화공이 많이 다녀갔으나 그중 이녕을 최고로 친다"라는 찬사를 들었으며 또한 휘종이 그에게 「예성강도」를 그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그려 인종(仁宗)때까지 궁중의 그림그리는 일을 맡아 이름을 크게 얻었다. 이렇듯 그의 기록으로 보면 당시 실경을 잘그려 한국 실경화풍의 태동을 알 수 있게 하나 실존하는 작품이 없어 구체적 기량을 파악하기 어렵다. *최균(崔均 ?-1174):전주인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벼슬은 인종조때 예부시랑(禮部恃郞)을 지냈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해 서예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켜 일찍 순직하고 말았다. *이광필(李光弼):이녕의 아들로 고려 명종(明宗)연간에 화가로 활동하였다. 회화를 즐겼던 명종이 "광필이 없었으면 삼한(三韓)의 도화(圖畵)가 끊겼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만큼 당시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서림(李瑞林):완산인으로 자(字)를 비민(庇民)이라하고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과거에 올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다. 학문에 밝았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이주(李湊)(1201-1278):익산 금마인으로 자(字)를 호연(浩然)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어질어 과거에 등제 삼조(三朝)에 역임되었으나 불의를 탐하지 않아 청빈하게 살았다. 글씨에 뛰었났다. *이행검(李行儉 1225-1310):익산 금마인이며 이주의 아들로 성격이 호방하고 활달하였다. 가난하였으나 재물을 탐내지 않고 말년을 보냈으며 벼슬은 보문각직 학사를 지냈고 글씨를 잘썼다. *최성지(崔誠  1265-1330):전주인으로 호를 송파(送波)라 하였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시서(詩書)에 능했으며 특히 역학과 수리에 밝아 충선왕의 배려로 중국에 가서 수학하고 돌아왔다. *석각운(釋覺云):남원인으로 호를 구곡(龜谷)이라 하며 남원 만행산 승연사(勝蓮寺)에서 주지를 하였다. 원래 성은 유(柳)씨이다. 공민왕은 그의 승려로써의 높은 도(道)를 숭상하여 친히「구곡각운(龜谷覺雲)」을 쓰고 또한 「달마석호도강도(達磨析呼道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 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 하사하였다. 그리고 글씨를 잘썼다. *이문정(李文政):완산인으로 호를 황강(黃岡)이라 했고 벼슬은 정당문학(政黨文學)에 이르고 시예에 뛰어났다. *석만우(釋卍雨 1357-?): 남원 용성인으로 호를 천봉(千峰)이라하고 설각운의 서자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시(詩)에 뛰어나 목은(牧隱),도은(逃隱)선생등과 교류하였다. 그의 학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당시 유가나 불가의 사표가 되었다. 측히 서예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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