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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 | [교사일기]
ㅂ군에게
양상춘/순창고 교사 (2004-02-05 11:27:17)
ㅂ군! 수업이 없는 빈 시간 운동장 옆 의자에 앉아 네가 보내준 편지를 읽는다. 작고 야무진 글씨들이 가을 햇살에 어른거리며 너의 모습을 그린다. 작년 방위병 복무할 때까지도 이마에 붙어 있었던 여드름은 이제는 없어졌는지. 아니면 캠퍼스 낭만에 젖어 더 굵어졌을지도 모르겠군.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이라 어려움도 있겠지만 준비기간이 긴 만큼 더 알찰 수도 있을 거야. 다시 생각해보니 ㅂ군은 대학입학시험을 다섯번이나 보았더군. 2년 연속 전기, 후기, 그리고 3년째 서울대학교 합격. 그런데 그중 불합격 된 것은 한번 밖에 없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해못할 일이지만 고등학교 3년동안 수업료 한푼 내지 않은 너로서는 학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거고 어떤때는 어느지방 후기 대학교에 전체차석으로 합격까지 했지만 그것 역시 학교 명예 살리기와 빚갚음으로 끝났지. 따지고 보면 시골 학교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 너의 2,3학년 담임을 하며 가장 가까이서 너를 지켜 보았던 나는 네가 해낸 그 장한 일을 인간승리의 한 사례로 가끔 이야기 하곤 한다. 아버지가 안 계시고 5일장에 나가 채소를 팔며 생계를 꾸려간 어머니 밑에서 너는 이를 악물고 해냈지. 사실 나는 너를 2년간 담임했으면서도 너를 위해 특별히 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네가 3학년때, 우리 학교에서 평교사 협의회가 구성되고 내가 평교협 회장으로 있으면서 학교와 많은 마찰을 빚고 다음해는 전교조가 출범하면서 굴욕적인 탈퇴각서를 쓰는 등 어려운 시기에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도 해 주었지. ㅂ군! 네가 서울대학교에 등록을 마치고 순창에 내려왔을 때 까투리라는 술직메서 한 잔 한적이 있지. 기나긴 입시와의 싸움에 지치고 힘들어 했던 너의 모습만 보다 이제 승리의 월계관을 쓴 듯 밝고 희망에 부푼 표정에 나도 덩달아 히죽거리며 오랜만에 허리띠 풀고 한잔 진하게 먹었지. 마침내 술에 취해 친구사이, 형제지간, 사제지간을 넘나들며 주정이 한참 진행되었든데 문득 우리 사이를 다시 제자리로 가게 한 너의 한마디가 있었지. "선생님, 순창같은 시골 구석에서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지난번 어느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을 때 왜 선생님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의도적으로 피하신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서울대에 합걱한 것이 선생님에게는 못마땅하셨습니까? 아니면 나같은 놈은 선생님의 참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깁니까?" 언젠가는 그 문제를 너와 정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때는 취중이었고 주위의 상황도 여의치 않아 대답을 유보했지. 나의 10년 넘은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 영어 교사의 경험으로 볼 때 ㅂ군과 같은 경우는 학생 본인한테는 물론 담임과 학교 모두에게 굉장한 자랑거리지. 그래서 현수막을 내걸고 대자보를 써 붙이는 등 대대적으로 학교를 선전하여 서울대에 합격한 한 두 학생 때문에 갑자기 그 학교가 일류학교가 된 것처럼 붕붕거린다. 바로 그것이 일부 교사들에게 (과거에는 나도 그랬지만) 입시위주의 교육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한가지 이유가 되기도 하지. 왜냐하면 그런 입시위주교육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교사의 능력을 쉽고 빠르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몇몇 학생만 잘 지도하면 크게 대접받고 인정 받으며 점수도 딸수 있거든. 나머지 학생들이야 저 못나서 대학 못가고 생활지도상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살벌한 입시위주의 교육풍토 속에서 어쩔수 없는 일이라며 교사 자신의 책임감은 크게 느끼지 않아도 되지. 그러나 그러한 몇몇 학생들의 빛에 가리워진 그림자속에는 언제나 패배감과 열등감으로 허우적거리는 다수의 학생들이 있었고 우리의 교육은 그들에게 너무나 소홀히 해왔다. 너도 느꼈겠지만 우리 학교 학생 대부분은 수업시간에 하는 수업내용의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자리만 채우고 앉아 내시 1,2등급하는 학생들의 충실한 보조자 역할을 하고 있지. 요사이 인문계 고등하교에 취업반이라는게 생겼지만 사실 그것은 그들에게 학교교육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고 심지어는 노동현장에서 그들의 노동력이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방기하는 죄를 저지르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육을 주도하고 있는 교육관료들의 입에서는 '전인교육'이니 '삶의 보람을 누리는 교육이'니 '생동감 넘치는 학교' 운운하면서 잘못된 교육구조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보다 그것을 호도하려는 짓거리만 일삼고 있다. ㅂ군! 그때 라디오 방송국의 인터뷰 요청에 나는 ㅂ군의 장한 모습보다 그늘속의 허수아비처럼 맥없이 있다 사라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또 몇몇 극소수 학생들의 인간승리를 최대한도로 미화하고 포장하여 선전하는 것은 자칫 교육의 뿌리깊은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은폐시키고 학벌위주의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ㅂ군! 어떻게 보면 ㅂ군은 대다수의 다른 학생들을 딛고 우뚝 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ㅂ군은 그들을 위해 앞장설 때가 아닌가. 우리 다음에 만나 취하지 말고 끝까지 얘기해 보자. 낭비없는 대학생활이 되길 바란다. 1993년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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