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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 | [특집]
전북 문화저널 창간 6주년 특집 좌담회 전북지역 문화운동의 오늘과 내일을 본다
문화저널 (2004-02-05 11:31:05)
참석자 사회 : 안도현(문학) 연극-정초왕(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미술-송만규(화가), 양악-김광순(작곡가·전주대교수) 국악-최상화(전북대 교수), 사회사-문윤걸(우석대 강사) 사회 : 이 자리는 전북지역 문화운동의 현황을 점검해보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90년대도 어느덧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확실히 현시기는 현실사회주의 붕괴에 따른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상황과, 이른바 문민정부의 수립후 나타나고 있는 일정 정도 개혁바람의 영향으로 우리 문화예술계도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현정부의 개혁 바람앞에서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좁아졌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난 80년대의 상황과는 달리 큰폭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문화운동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앞으로의 확실한 전망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실제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의 논의를 통해 점검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 좌담의 목적이 되겠습니다. 먼저, 사회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현재 문화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문윤걸 : 80년대와 90년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사회자께서 언급하셨듯이, 사회주의 붕괴에 따른 세계질서의 재편이라고 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사회주의 몰락과 공산체제의 와해, 이런것들로 파생되는 신보수주의의 등장은 진보적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진영에는 굉장히 큰 충격입니다. 그런데다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사고가 여러 가지 세계적 흐름에 따라 탈근대화 해체로 나아가고 있고 그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등장시켜게 되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사고의 등장은 모든 것의 해체와 절대적 통념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 역시 진보적 운동 진영에는 큰 충격을 주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 외 자본주의 생산방법이 달라지고 있고, 그것이 계급간의 관계를 희석시키거나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진영에서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신념으로부터 많이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80년대와 90년대가 가지고 다른 특징적 모습으로 보여지고 이런 현실적 상황들이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운동을 점검하는 것은 나름대로 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회 : ′문화′더하기′운동′을 붙이지 않고라도, 심하게 말하면, 이지역에서 문화운동이라는 말이 개념만 있지 실체는 없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만 그렇다고 80년대 각 부문에서의 성과와 한계는 어떤것들일른지요. 김광순 : 음악분야를 얘기하자면 일단 80년대 음악은 음악자체를 누리면서 향유했다기보다는 음악자체를 선전하고 전파하고 보급하는데 더욱 역점을 두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한예로 80년대로 넘어오는 70년대에는 이 지역의 전문음악기관이 전문음악인을 일년에 한 100여명 정도를 모집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불어나서 1년에 모집되는 인원만도 58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양적으로 팽창되었음을 알 수가 있지만 실제로는 음악이 아직까지도 일반 모든 사람들에게 다같이 공유하는 분야, 같은 생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분야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많이들 얘기하는 노래방 문화가 훨씬 급속도로 성장하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상적인 뿌리를 가지고 우리 토양에서부터 자라나는 음악문화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시류에 흘러서 떠다니고 있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요. 이런 현상은 과거 70년대나 80년대나 또 현재까지도 이어지면서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어서 음악인의 하나로서 반성하게 됩니다. 외형적으로 변화된 80년대 음악의 흐름은 두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관주도의 음악과 민간주도의 음악 형태가 그것인데 이즈음은 관주도 보다는 민간주도의 음악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연주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관주도 연주단체를 들자면 시립교향악단이나 시립합창단, 도립국악단 등이 있고, 민간주도 연주 단체들은 호남오페라단, 글로리아 챔버오케스트라, 전북국악관현악단, 아울로스목관5중주등 크고 작은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연주회가 적었었는데 요즘은 거의 하루에도 두세군데에서 연주회를 열만큼 연주회의 수또한 늘어나고 있습니다. 변화된 다른 하나는 전문연주인이 그 만큼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과거 70년대부터 계속된 양적인 팽창이겠지만 80년대에는 창작작업보다는 연주주도형의 수적인 팽창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최상화 : 국악분야에는 운동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붙어 다녔습니다. 전북지역에 한해서 국악을 본다면 국악운동이라 불릴만큼 큰 번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것 찾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국악은 시류에는 합류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80년대에는 우리음악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과거 우리음악을 제대로 들려주지 못하고, 박제화가 강화된 부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러사람들이 우리것을 찾아보자고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기대에 못미치는 것만을 재확인했고, 틀에 박힌 박제화된 국악을 들려줘야 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려운 분야로 인삭하게 했습니다. 전북지역에서는 새로운 창작국악을 들려주지 못한 반성으로 풍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전북지역의 음악이란 풍물정도였고 대사습놀이밖에 보여줄것이 없었습니다.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우석대 전북대 백제예전등에 국악과가 생기고, 예루라든지 소극장에서 새로운 국악을 들려주었지만 그것은 관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정초왕 : 연극분야의 경우 결론부터 말하자면 80년대의 연극의 성과는 서울지역에서 거둔 성과에 비해 취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했을 때 전체적으로 80년대 연극 연국운동은 탈춤에서 시작된 마당극운동으로부터 복잡한 개념으로 발전해서 민족극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성과로는 민예총이나 민족극 협의회로 볼 수 있습니다. 진보적 연극운동을 표방한 단체도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도 노동연극이나 민중적 관점을 가진 극단이 없어 대학의 인재를 수용할수 없는 한계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전북에는 그당시 활동했던 인원들이 90년대에 극단으로 다시 전출을 하면서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즉 80년대는 싹을 틔우고 요즘들어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80년대 연국의 한계를 지적한다면 이념지향적은 부분, 사회과학적인 요인이 너무 강해서 실제로는 알맹이도 없고 구호만 거창하고 내용없는 작품을 양산했다는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송만규 : 미술 부문은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4.19이후 1969년, 선언문만 남긴채 작품실천의 성과는 남기지 못했던 「현실동인」이 현실주의 미학과 민족전통미술의 계승론을 들고 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뒤인 1979년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와 「현실과 발언」동인은 ′비판적 리얼리즘′을 내세우면서 현실주의 미술운동을 열어나가게 됩니다. 이들은 이후에 무정부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소위 ′새로운 형상′이라는 양식조류의 소집단 운동과 혼재되면서 리얼리즘 미학의 고삐를 틀어쥐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1983년에 이르면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서울지역의 「두렁」과 「서울미술공동체」이지역 소집단인 「땅」의 구성원들이 「미술공동체」를 구성하고 민족 민중미술의 이념적 고삐를 단단하게 잡아가게 됩니다. 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그 중심으로 삼으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미술내적인 조형운동과 차별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무렵 「민중적 리얼리즘」은 가장 값진 창작방법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대중미술교육사업과 판화운동등은 그 미술운동의 돌파구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이시기에 미술패「땅」역시 이리를 중심으로 도내에 있는 대학, 종교집단, 농민, 노동단체 등 여러부문들과 연대하면서 대중미술 교육사업과 판화운동, 그리고 여타의 선전매체들을 개발 보급하면서 지역 미술운동을 열어나가게 됩니다. 「땅」의 활동은 86년에 으로러 실천방법을 둘러싼 내부의 분화로 조직력이 약화되었다가 87년에 6월 항쟁을 겪으면서 재정비하고 「겨레미술연구소」로 개칭하면서 조직의 확대강화를 꾀했습니다. 이조직 역시 지역내 전선조직체들과 연대사업들을 펴나가면서 정치사상적 통일성을 다져 나갔습니다. 88년에는 「들,바람,사람들」이라는 창작중심의 동인 결성되었습니다. 창작방법에 관한 토론과 전시활동들을 꾸준히 진행시켜오면서 미술운동의 한 축을 형성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자주 바뀌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80년대 후반기에 미술운동 활동가들 이 상황적 조건속에서 창작을 소홀히 했던 반면에 이들은 나름대로 창작물의 성과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시기에 전시공간인 「온다라 미술관」의 열림은 보다 폭넓은 민중미술가들의 전시공간으로 차지했고 지역대중들에게 창작의 성과물들을 차분하게 공감을 얻어내는 공간으로 자리잡아 나갔습니다. 88년말에는 민족민중미술운동 전국연합건설 준비위원회가 각 지역, 학생역량에 의해 구축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겨레미술연구소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들은 80년대 미술운동의 역량을 소시민적 미술가 부분과 민중적미술가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으면서 이것의 통합을 조직전망으로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실천을 통해서 아래로부터의 조직강화 경로나, 계급주체 및 사상미학을 그 지도중심에 두면서 민족자주미술의 건설을 기본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직은 건설이후에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세로 2.6m 가로77m의 대형걸개그림을 공동창작하게 됩니다. 이때 겨레미술연구소는 「갑오농민전쟁도」를 그렸습니다. 이후에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89년 평양축전에 보냈다는 이유로 대거 구속이 되고 수배생활을 하게 되면서 80년대 미술운동을 넘기게 됩니다. 사회 : 미술분야 이외에는 전반적으로 진보적문화운동응 미흡했다는 말씀들이신데요. 그렇다면 90년대에 들어와서 변모된 양상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문학판의 경우는 80년대에 창작자들에게 "뜨거운 감자"로 작용하기도 했던 사회과학의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홀가분해진 상태에서 90년대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운동이 창작의 성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인식을 두루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형적으로 문학운동의 거센 물결은 전에 비해 잠잠해졌지만, 민족문학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입니다. 전북의 민족문학인 협의회에서는 대중문학이 결여되었다는 반성과 아울러 대중의 창작욕을 보이기 위해 문예창작교실을 개최하고 있고 지역청년회, 글방에서 운영하고 있는 문예반 등 대중문예운동으로 확산시켜 나아가고 있습니다. 개인 창작집도 꾸준히 나오고 있구요. 90년대에 확실히 달라진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문윤걸:80년대의 민주화가 90년대에 성과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80년대 각 운동분야는 민주화라는 구심점으로 결속하고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민주화에 대한 전반적인 요구가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이제 각 운동분야도 구심점이 약화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그래서 심지어 운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보면 가장 특징적으로 찾아볼수 있는 것이 소비문화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국악까지도 우리것찾기라는 이름으로 우리앞에 다가섰는데요. 그 한예로 서편제의 경우와 같이 굉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들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볼때는 그것이 우리것찾기라는 이름이기보다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것이 새롭게 상품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 문화현상아이 이런 소비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점차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이러한 상품들이 대중들에게 쉽게 구해지고 소유되는 현상은 바로 소비문화차별이 점차 사라지는, 사회적 차별을 은폐시키는 현상이 진보적 운동의 쇠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서 70년대는 지식인 중심으로 현실에 눈을 뜨자는 운동으로, 80년대는 현장으로 끌어내자는, 90년대는 현장에 나왔던 이들이 다시 복귀하는 이들을 운동의연속석을 가질 수 있도록 어떻게 묶어낼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각 운동들이 파편화되서 각자의 영역을 주장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묶어서 이끌어가야 하는가가 90년대 들어 와서 해야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정초왕:서울을 중심으로 환 우리나라 전체 진보적 연극운동의 변모양상은 wldurf의 변모와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구체적 이슈들이 사라졌다고 할까, 표적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다고 할까 그런 것에서부터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민속극이란 개념도 복합적으로 어떤 종류의 무엇을 지향하는 연극이냐의 합의가 없습니다. 80년대 구호중심의 연극은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고 무엇보다 대중성 확보에 더 몰두를 하는 것 같고 또 질적으로도 예술적인 수준을 고양시키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외적으로는 오히려 강렬한 느낌은 못주지만 연극인으로서기량을 닦는 성장기로서 활용을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지역적인 면에서 얘기를 해보자면 진보적 성향을 표방하는 rmreksa이 생겨났고, 뚜렷이 운동성르 표방하지는 않지만 극단의 활동을 통해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기존 연극의 큰 병폐중의 하나가 서울에서 성공한 작품을 지역에서 모방하는 형태에 불과한 일종의 아류였다고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작품을 써서 연극을 만들고 연극대회에 나가서도 상을 받는등 계속 성과를 거두어 나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또 진보성을 지닌 극단이 호라동은 크진 않지만 연극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고 변화되는희망적ㅇ느 틀을 잡아나가고 있습니다. 문민정부후에 가시적인 성과는큰 범주의 문화운동을 하기위해 전제된 수련과정이 어니겠나 하는 생각입 니다.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목표의 달성과정이 아니라 전제적인 수련과정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문화, 문화라 하지만 무얼 문화라 부를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도 두렷히 나타나는 이론적인 틀이 제시되는 건 아니지요.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서 과연 문화적인 단계가 따랄가고 있느냐 그런면에서도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구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적이었고 겨우 그걸 따라 잡으려 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이루어놓은 것들을 보면 문화적 성장은 훨씬 못미치고 있는게 아니겠느냐 하는 느낌이듭니다. 90년대의 변모된 양상은 문화적발전을 이룬 나라들을 다라잡기 위해 할 일이 많은 그런 시기다라고, 그런 조건이 충족된 시기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회:진보적 문화는 사회발전보다 더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진보적인 문화라는 것은 발전된 사회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는게 아니라 사횝2kf전속도보다 빠른 역할을 할때 가치가 있는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문학판을 부면 창작자가 만들언내는 도서자체가 상품화가 되어가지고 시집의 경우 베스트셀러 1-10위작품을 보면 정상적인 시인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전혀 없고 낙서위주의 시들을 볼 수가 있고 소설도 역시 역사소설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흘려벌리 수 없는게 바로 대중성문제 때문인데 80년대 이후 제기된 대중성 확보의 문제는 보다 진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들어서는 이런 대중성 확보문제는 또다른 측면이 있을텐데요. 특히 음악분야는 어떻습니까. 김광순:음악은 좀 특수한 상황인 듯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반시대적 이기도 하고 또 다른 면에서는 긍정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음악 형태가 상징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전달에 있어 구체성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떨어진다고 볼수 있습니다.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는 대중예술이라고 볼수 있는데 사실 지역에서의 대중예술은 거의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매체를 중앙에서 잡아끌기 때문에 그래도 클래식 음악분야들은 지역활동이 그나마 존재하지만 대중예술의 흐름은 중앙이 지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지역에서의음악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전통국악이나 클래식에 관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비가 많아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손쉬운 것들을 일반대중들은 원하기 때문에 음악회에 가 앉아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이 더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중앙에 비해 지방은 낙후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방자치제를 맞이해 지역의 모습, 지역의 표정을 잡으려느느 노력은 하지만 지역민에게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충족감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갑게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음악상황은 80년대에 비해 대규모적인 행사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오페라의 경우 외국 연주가를 직접 날라오고, 그렇게 해서 이지역 사람들의관심을 끌게됩니다. 연주회의경우에도 우리지역에 있는 시립합창단의 연주보다도 외국에 있는 단체가 오게 되면 더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라도 그것을 향유하려고하는 심리가 작용합니다. 반면 그러나 우리지역 자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현태에 대한 관심은 자기 때문에 오히려 점점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렵다는 건 우리지역 특성이 발굴되고 우리표정이 담겨지는 예술보다는 외국이나 서울중심의연주무대가 그러한 흐름이 더 먹혀들어가는 그런 상활ㅇ... 너무 비관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야말로 지역운동을 펼쳐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송만규:90년대 들어서 대선이후 청산주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 거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염려가 되는 때입니다. 우리앞에는 사상미학, 창작방법, 조직관 그리고 대중활동방침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높이로 이끌어 올리는 무거운 책임이 가로놓여 있다고 봅니다. 지난 시기에 '일중심의 사업중심의 사업작품'이나 '틀중심이나 겉모양을 중시하는 경향'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사업작품'과속생활을 중시하는 경향, 창작승리의관점을 일치시켜나가자는 운동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겨레미술연구소는 그러한 변화들로 80년대 미술운동을 정리하면서 금년 2월에 해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신으로 창작모임「가보세」를 탄생시켰지요. 이들은 곧바로 전시계획을 세워서 지난 10월에 「군산항에서 본 우리의 역사」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또한 대중서울조직인「그림마을」이 다가동 2층에 공간을 마련해놓고, 미술로부터 소외되어왔던 일반 시민들에게 창작과 미술품을 향유하도록 대중미술교사 역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7일에는 이곳에서 강습을 받은 시민들의 작품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들,바람,사람들」은 역시 해마다 창작 역량들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삼아서 회원전을 가졌습니다. 단순한 삶의 의미에서부터 혁명의 역사를 주제까지 다양한 주제의식들을 펼피고 있습니다. 김광순:이런때일수록 지역의 특성이 표출되는 창작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소재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전통과 우리의 색을 보임으로써 중앙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지역으로 그것을 보러와야 하는 그런 일을 해내지 않으면 결국 중앙에 있는 훌륭한 연주단체들이나 우리지역을 방문하는 연주자들에게 우리편인 우리지역만을 다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연주되고 공연되는 음악창작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도 음악회보다는 노래방을 더 자주가는 편입니다. 음악이라하면 고급문화,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것 때문에 음악의 대중성 확보가 장르의 특성상 어렵겠다는 생긱이 드는군요. 그럼에도 김선생님께서는 또 지역의 한계 그리고 앞으로 창작쪽에 더 중점을 둬서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국악쪽은 어떻습니까? 최상화:80년대부터 지금까지 국악쪽 특성은 많이 들려주기의 형태로 진행되어 왔습니다.도립국악단의 공연, 여러 대학에서 가지는 연주회, 소극장 예루에서 꾸준히 하고 있는 국악무대등 대체로 많이 들려주는 작업이 중심이 되었는데 지금은 듣는 이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듣는 이 중심이란 듣는 이의 감성에 맞는 새로운 많은 창작물이 많이 들려지는 형태입니다. 내년이 「국악의 해」로 정해졌다고 하더군요. 좋은 일입니다. 좋다는 건 돈을 좀 줄것같다는 기대때문이예요.(웃음)국악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도 국악분야는 상당히 열악합니다. 어느정도로 열악하느냐하면 절실한 것이 창작부문임에도 창작부문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습니다. 내년에 국악의 해이니 창작부문에 좀도 많은 도움을 줄수 있었으며 좋겠습니다. 송만규:보다 건실한 미술대중활동을 지향하는 미술가는 그 활동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대중들의 구체적인 생활적 이해와 요구 그리고 정서에 기초하면서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는 기본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닫힌 미술대중활동의 중요한 과제인 창작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어떻게 갖느냐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여러분들이 창작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창작에 쏠리다 보면 문화운동이 가져야 할 집단성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에 나온 『호남사회연구』에 이종민교수의「지역문화운동의 방향과 과제」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글은 지역문화운동의 개념과 방향 정립을 다룬, 전북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글이라고 봅니다.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개혁, 혹은 변혁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보면 지역문화운동을"지역운동의 한부분으로서 사회의 모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지역현장에서 그곳의 특수한 상황에 규정되는 지역주민의 특수한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나름의 문화매체를 통하여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전체적인 모순의 해결에 기여함을 목표로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집단성, 지역성 현장성 문제인데 이와 관련해서 각부문 혹은 매체가 안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정초왕:연극예술에서의 어려운 점은 전체적인 모순 해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라고 얘기를 하자면 지역 감정, 지역차별의 문제, 지역문화운동을 국한시키는 문제, 이런 문제들이 유발되는 특수한 상황들인데 그러한 것들이 해소된 단계를 앞질러 생각해본다면 과연 특수한 정서가 있을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지역의 특수한 상황과 정서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지방 자치제가 빨리 이루어 져야 합니다. 저는 지역의 특수한 정서를 살릴수 있는 한 예로 사투리를 얘기하고 싶은데요, 국민학교 다니는 제 딸아이가 사투리 쓰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선생님께 지적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후대에 갈수록 전라도 말 자체가 없어져버리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지역의 특수성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우리나라 교육 방향이 그런 문제에 연관됩니다. 예를 들면 독일은 땅이 넓으니까 지역적 특성도 강해 사투리가 많아 의사소통이 안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표준어도 가르치고 사투리도 가르쳐서 지역민들이 가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투리하고 필요한 단계에서는 표준말을 사용하게 한다고 합니다. 지역의 특수한 상황과 정서를 그대로 살려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문제가 몇 명의 의지만으로는 안되고 문화정책이라는 큰 틀내에서 개선되고 방향이 잡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무력감을 느낍니다. 사실 TV가 전파됨에 따라 가장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 연극 예술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공동 분야의 작업을 여러 예술 분야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아마 그런 부분에서 적지않은 성과를 얻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지방자치제가 완전하게 정착되지 않은 시점에서는 지역문화운동이라는 것에 어려움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위로부터 지역문화운동을 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신데요. 정초왕:그렇지요.상호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사화:그렇다면 지역에서부터 할 수 있는 문화운동은 불가능한가하는 그런 의문도 들고 지속적인 움직임을 갖고 있는 의미와 성과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에서 할 수 있는 문화운동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정초왕:서울이나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작품을 제작해 공연을 하면 우선 보러와야 하는 최소한의 소비층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한 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 ,, 연극에서는특히 지속적으로 찾아주는 연극 관객이 확보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토대가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에게 연극을 한다는 것으느 당장에 생존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고 안하고,. 뜻있는 연극을 하고 안하고으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생존과 연결이 됐기 때문에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연극이 갖고 있는 어려움은 자체재정상의 부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관에서 보조 후원을 거의끌어다시피하는데 그런 구조와 틀이 확보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독일에 가보면 극단 같은 곳이 전부 시립 주립의 형식입니다. 특별한 의도를 갖고 하는 연극 단체가 아니면 거의가 보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서 느끼는 어려움이 제일 큰 것 같습니다. 김광순:이종민 교수의 글은 공감을 하지만 '문화매체를 통하여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이러한 문제는 실질적으로 우리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중적 공감대는 오늘 토론에서 여러차례 나왔지만 노래방만큼 공감대가 형성되는 바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지역 뿐만아니라 전반적으로 90년대 문화의최고 히트는 노래방인 것 같습니다.(웃음) 저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라기보다는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얘긴데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면 굉장히 후련하고 말소리가 벙벙 울리니까 갑자기 자기가 스타가 되고, 노래를 하면 그 가수의 영상이 TV를 통해 나온는 것처럼 자기의얼굴도 막 나오고.. 그래서 여러 가지 괴롭고 어려웠던 것들이 일순간에 없어지고 그것이 또 음악의 효과이기도 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거듭되다 보면 자아도취에 빠지게 되고 심하게 되면 정서파탄에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격해서 소리지르면 그것이 곧, 예술향유의 흐름과 같은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예술이 우리 사회의비춰진 기능과도 같은 건데 우리의 삶을 항상 새롭게 우리의 정신과 감정을 순수하고 풍요롭게 견지해 나가는게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록 한다면 노래방은 공감대는 형성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서는 공격적이고 자기만 아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음악의 문제는 작곡가나 연주자로 불리는 음악공연자와 대중 향유자와의 공감대가 서로 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수요 공급도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통구조자체가 오나전히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연극도 마찬가지겠지만 언청난 제작비를 들여가지고 잔치를 벌였는데 와서 먹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공연자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 이상입니다. 그런데 대중향유자가 생ㄱ각하는 것은 차라리 노래방에 가서 노래해버리면 그만인데 뭐 그 공연장에 가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글너 문제를해결 하려면 전체적인 교육자체에서 출발해야한다고 행각합니다. 일단 가서 공연을 보고 들음으로써 행복하다는 느김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이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틀에 짜여진 지금의 교육현실에선 연극ㄱ 음악회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정상적 교육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회:음악교육이 중요성이 음악의 대중화에도 기여한다는그런 말씀인신 것 같습니다. 문선생님이 보시기에 문화운동가라고 해도 좋고 예술종사자들이라고 해도 좋고 그런 당사자들에게 요구되는 지역문화운동이 뭐가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문윤걸:자꾸 우너칙적인 얘기들만 이어지는 것같니다. 한편으로는 이런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현장에 와주지 않는 관객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관객들이 현장작업의 성과등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실제로 와닿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거든요. 그동안의 우리사회의 존립문제, 결국 그 문제는 사회운동의차원에서 해결될 문제라는 지적을 해 주셨는데 적절한 지적입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최근에 공연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지역에서 참여하는 행사인데도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런점들이 실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원칙저긍로 돌아가서 우리 지역에서 지역문화운동이 왜 필요 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역의 중요성과, 이지역에서의 자신의 삶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지역에 대한 애정도 상대적으로 강하게 부각되는시점에서 지역을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얘기를 하자면 굉장히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고 지역마다 창이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또 지역이 새롭게 재편괘가고 있는데 그것은 또 많은 자본을 가진 기업들이 보다 생산이 용이한 곳으로, 특정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단으로 모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럽이 유리한 쪽으로 지역들을,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을 재편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고 이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상당히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역경제에 있어서 외부의 산업은 결국 이지역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중앙으로 유출할 것이고 그렇다면 더욱 지방의 경제가 침체되지 않겠느냐하는 예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지역에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문화적 양심으로 표현을 해서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식 하는데 도움을 주는 문화와 얘술 행위가 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문화운동은 이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이지역의 문제를 인식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김광순:앞서 말씀하신 문윤걸 선생님의 의견은 정상적인 유통질서가 이루어지지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예매처에 가서 입장권을 사서 구경을 오는 사람이 몇사람이나 있을 것이며,거위 알음알음으로 강매하듯 사가지고는 오는 공연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연극이나 음악회에 가는 사람은 몇몇에 한정되어 있고, 일반사람 대다수사람들은 평생동안 한번도 가보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공연자들은 자신들이 그것부터 해결해야 되는 이중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해서 최소한 수지탓나이 맞을 정도로 이어져 간다면, 다시 또 열심히 만들겠지만,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어차피 망하는 것은 매일반이니까 가능하면은 돈 적게 들이고 가능하면 수입을 늘릴 수 이쓴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그런 현상이고 이 모든 것을 통털어서 예술에 있어 정상적인 어떤 유통질서가 형성이 되지 낳은 아주 초보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것들이 꼐속해서 해결되지 않고 나타난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회:어떤 장르나 매체가 지속적인 움직임을 갖는냐 안갖느냐 아니면 그 움직임이 크냐 적냐에 따라서 사실은 그것이 문화운동르 표방 하느냐 안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그런 움직임을 보일많나 일이 바로 내년에 있지요. 내년이 갑오농민전쟁 백주년이 되는 해인데 지금이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동학백주년기념사업회의 여러 가지 사업중에서도 문화얘술 부분의사럽이 백주년 기념사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북지역의 문화얘술인이나 단체들이 이 사업을 주도적으러 받아 안아서 문화예술을 통한 백주년 기념사업을 대중들에게 공감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학의 경우 기념시집 발간, 청년문학회의집단 서사시, 시화전 등의 계획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각 부문에서는 어떤계획이 있는지요. 또하나 전북지역의지역문화를 일구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문화저널, 지금 이 자리도 창간 6주년을 맞이하는 자리인데요. 그 문화저녈을 한 장 때려주고(?) 오늘 이 자리는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김광순:동락농민백주년기념사업회에 있어서는 집단성, 지역성, 현장성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는 그러한 공연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어떤 틀에 맞춘다기보다는 우리지역에 맞게 개개적인 단체나 몇몇사람들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그 현장에 살고 이쓴ㄴ 사람들에게 맞는 그런 종합적인 행사가 되엇을며 ㄴ합니 . 그러기 위해선 각계에 이쓴ㄴ 각 장르의 여러사람들이 모아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필요하게 되고 그렇게해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해서라도 한번 와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공연을 이끌어 내야 하니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화저널에 대한 얘기로는, 다 좋은데 한가지 얘기를 하자면 음악분야가 대단히 소홀하게 취급되어 져서 그 부분을 보강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잘못되어지는 공연들이나 잘못되어가는 흐름들이 문화저널로부터 바로 잡혀져 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최상화: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과 문화저녈을 때려주기 전에(웃음) 제가 덧불여 얘기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우리 전북을 전통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하고 자타가 여러 측면에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판소리대회의 꽃이라면 전국대회인 대사습놀이가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도 봤는데 대사습놀이의 향수층, 그분들이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대사습대회를 보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 꽉차던 공간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왜 안오시나 가만히 관찰해봤더니 다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판소리의 문제가 즉 국악이 정말 사활이 걸린게 대중성확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해결위해서는 창작 판소리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도록 가사내용이라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는 그런 작어비 활발한데도 불구하고 도 전북의 판소리는 거의변화가 없습니다. 노인층 젊은 층에도 함께 다가갈 수 잇는 노래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아까 김선생님이 노래방 걱정을 했지만 저는 노래방에 우리 국악곡이 얼마나 들어갈까,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북지역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것임에도 판소리가 ㄱ사장 박제화되고 고체로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갑오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해서 국악쪽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동학의 내용이 담긴 창극이랄지, 기념창작 판소리, 거기에 걸맞는 연주회 등이 있을 것입니다,. 문화저널에 대해서는 자꾸 고급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이르테면 일반대중이 아닌 필진들이 전문화되고, 어휘자체도 고급화되고, 저도 읽었을 때 잘 모르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문화저널이 대ㅔ중매체라면 글도 좀 쉽게 쓰고 생활속에 일어나는 문화를 좀많이 다루어야 하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내 생활속에 있는 문화들을 문화저녈을 통해 접했으면 하는 그런 바램이 듭니다. 정초왕: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뛰라고 요구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예술이 현대사회에서 당면한 위기 그런 것들로 대변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으로는 개인주의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연극 관객이 찾아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 한 예로 음식얘기를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렸을때부터 먹은것들입니다. 갑작스럽게 좋아하는 음식이 생기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햄버거를 먹고 가장 맛있는 음식이 피자, 콜라 이런 종류의 음식입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성정했을 때 우리나라 음식 아무리 좋다고 소리높여 외쳐도 우리나라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서양음식에 길들여지며 자란 아이들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TV드라마, 팝송등 외국문화가 거의 의식이 깨이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주의화가 소집단화로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고 그문제를 문화저널과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회를 연결시켜서 얘기할까 합니다. 그런쪽에 뜻을 품고 있는 범주가 어떻게 있고, 또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들이 어느정도로 이지역에서 대중적인 공감대를 확보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기념사업회나 문화저녈이 그런 사람들만의 위안잔치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행사자체의 하나하나 성과뿐 아니라 실제로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갑오농민혁명의 의미가 현재 어던 의미가 있고 또 어떻게 지니고 계승해야 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라는 생각입니다. 문화저널도 좀더 전파력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쪽에 취지를 같이 아흔 사람들 내지는 일정한 범주의 사람들이 모여 좋은 일을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그치지 않는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문윤걸: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회가 가지는 숙제인데 먼저 백년전에 있던 동학농민혁명을 되짚어 본다고 핬느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더군다나 백년전에 이지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되짚어 봄으로써 이 지역 주민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동학농민혁명이 가지는 그 의미를 계승하고 그시대에 있었던 과거 문화유산을 되살려 내려고 노력하는 일만으로도, 현재적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요. 다른 측면에서 얘기를 하자면 이 지역 각 문화단체들의 현실을 되짚어 봄으로써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시간적 의미와 동시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 문화에 대해서도 효과를 나타내리라 생각이 듭니다. 문화저널은 개별적, 계율적인 삶의 영역에 안주하고 그 영역을 즐기고 있는 우리들에거 공동체적인 사회의식을 고양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화잡자라는 매체가 이론적 부분과 개념적인 문화이론적인 부분가지 언급하는 경우가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좀 어렵기는 하지만 그 역할은 담당과 보다 다채로은 메뉴를 개발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주위에는 문화저널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그분들이 간접적으로 모니터를 많이 하시거든요. 그런데 가끔 들어보면 너무 편향적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년적인 편향보다는 주제에 대해서 편향적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음악에 대한 혹은 미술분야에 대한 글이 없다는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문화저널을 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게 될텐데 일년에 고작 한두편의 글이 실린다면 무척 실망 되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필진을 구하시기 어렵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어려우시겠지만 전문성과 함께 보다 다채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것이 어떨른지요. 송만규:동학농민혁명 백주년기념사업에 대해서 전북지역인들이 계획하고 있는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걸개그림을 제작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전국에 있는 소집단들로부터 집단주의적 창적방법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과 이후로부터 현재가지 진행되고 있는 농민운동사로 구분지어서 제작할 계획입니다. 작품의 길이가 200M-400M정도이고 이 작품을 걸 수 있는 받침대 제작이나, 공간등을 고려할 때 집단적인 힘이 발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사업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로는 백년전의 동학농민혁명을 지나간 한 사건에 그치지 않고 그 의미와 의의를 되새기면서 다시말해서 전통의 계승과 혁신을 다지고자 하는 개개인의 미술인들을 총망라해서 참여하루 수 있는 그야말로 범미술인전을 개인 창작물 중심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들 바람 사람들」에서 행사장 걸개그림 등이 계획안으로 마련돼 있습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창작모임「가보세」에서는 농민운동을 주제로 하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가지 말씀드린건 물론 전북지역에 제한한 것이고 이러한 사업들 죽, 미술뿐만 아니라 각 매체별, 개인적 활동도 좋지만 가능한 한 이 지역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로 구심력을 모아주는게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념사업회로 구심력을 모아주는게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 지역의 개인이나 단체에서도 준비하고 있는 정도들을 파악하고 귀합해낼려고 해야 할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역의 문예단체나 개인들의 크고 작은 전문 역량들이 동백사의 골간을 이루면서 제반사업을 기획하고 제작해 나갈 때 큰 자양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자양분은 백주년 이후에도 실천사업으로 축적된 역량이 모아져 자역문예운동을 변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문화저널에 대해서는 따스함과 막연한 애정만 느끼고 있었을 뿐인데... 이점을 제안해 보고 싶은데요. 인쇄매체로 이제는 읽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것이 많아져야 합니다, 문화저널 경우에는 편집이 탁월해서 별로 지루한 감은 없습니다. 욕심으로는 책의 어떤부분에 '지상전시'라던지 '그림방'이라고 하든지 한달동안에 특이할만한 미술품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지면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미술인들의 참여의 폭도 넓히게 되고 독자들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될겁니다. 지역문화단체들의 재정상태가 대체적으로 어려운데 이곳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문화저널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공급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회:긴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문화저널 창간 6주년을 축하드리며 오늘 이야기가 이지역 문화운동발전에 작은 쓰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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