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3.12 | [예고]
당대의 새로운 화풍 적극 수용, 발전시킨 조선초기 화단의 대가"이상좌"
이철량 / 전북대 미술교육과 교수 (2004-02-05 11:49:13)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전주는 한층더 그림과 글씨가 성행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백제시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로 도시형태를 갖추게 되어 후백제의 발원지가 되었는가 하면 조선 왕조를 개국한 이태조의 본고향이기도 하여 조선조에는 전주가 더욱 부흥하게 된다. 도시가 새롭게 단장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생활의 여유와 안정은 더욱 확대하게 되고 문화는 한층 더 발달한다. 당연히 시.서.화의 풍류가 고조되면서 많은 서화가들이 배출되거나 또는 이지역으로 몰려들게 된다. 그러나 조선조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앞세우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매우 천한 기술로 치부하며 그에 관한 기록등을 거으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전북에서 나서 중앙에서 성장하면서 화가로 대성하였거나 혹은 이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작가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나 확인하기는 매우 힘들다. 어떻든 조선조는 고려시대에 성행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채색회화는 퇴조하고 조선조의 사대부들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수묵회화가 크게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남아있는 조선조 화가들은 대부분 수묵화가들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빈약하나마 이지역과 어떤 경로든지간에 연고가 있을 것으로 보여지는 작가들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 첫 인물은 이상좌다. 이상좌(李上佐) : 호를 학포(學圃)라고 하며 전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전주인으로 기록에 올려진 이배련(李陪蓮)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약 이배련과 동일인이라면 허균(許筠)이 지은 연죽에 의해 화가 이숭효(李崇孝)가 그의 아들이며 조선조 중기 천재화가 이정(李楨)도 그의 손자로 확인된다. 어떻든 전주인으로 표기된 이상좌가 전주 출신인지 아니면 성씨의 본향(本鄕)이 전주인지 알 수는 없다. 더욱이 기록에 의하면 이상좌는 어느 선비집안의 노비 출신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출신을 확인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는 어렸을적부터 그림재주가 뛰어나 산수, 인물등을 스스로 터득하여 장안에 소문이 났고 중종(中宗)임금께서 특명으로 도화서(圖畵署:조선조때 궁정에 두었던 그림그리는 기관으로 예조(禮曹)에 소속됨, 신라시대는 채전(彩典), 고려시대는 도화원(圖畵院)이라 불렀음)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중종이 죽은후에 어진을 그렸으며 명종때는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공신(願從功臣)에 올랐다. 현재 그의 유작으로 전하는 작품들은 중국 남송시대의 마원과 하규의 화풍과 명나라 절파계(명나라때 절강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단의 작가들의 화풍)화풍들과 관련이 있어보이는 인물중심의 산수화와 도석인물화(道釋)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진품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그의 그림으로 알려지고 있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조선 초기 산수화풍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겨울날 휘몰아치는 북풍에 견디며 꽂꽂하게 벼랑에 선 한그루의 노송과 동자를 데리고 귀가길이 바쁜 선비를 주제로한 걸작이다. 오른편 하단부에서 왼편 중앙부분까지 깍아지른듯한 벼랑에 대각선으로 서있는 소나무의 배치는 단조로우면서도 극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바람에 거의 직각으로 꺽여져 나부끼는 소나무 가지의 표현은 역동적이며 긴장감을 준다. 이상좌의 이러한 화면 구성 방식은 그의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는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어가한면도에서는 뜨거운 한낮에 낚시를 거두고 소나무그늘 아래에서 졸고 있는 한 선비를 소재로 한 것이다. 하늘에는 한쌍의 새가 한가롭게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으며 잔잔한 물결과 감아놓은 낚시줄 그리고 선비의 졸음등은 매우 낭만적이고 서정성이 짙게 드러나는 그림이다. 화면구성 역시 우측 상부에서 왼편 하단부로 급하게 내려오는 언덕과 뒷산의 사선 그리고 이와 대각선으로 서있는 소나무등이 앞선 월하보월도와 같은 방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전경을 크로즈업시키며 화면을 꽉차게 하고 대각선으로 구성한 화면 구성은 조선조 초기에는 매우 독특한 방식이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다른 그림「기로도(驥盧圖)」에서 보는 것처럼 인물을 중심으로 하고 풍경을 작게 그리는 산수화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송하보월도에서는 오른쪽 하단부에 중경처리로 동자를 데리고 오는 노인이 화면 초점을 이루며 어기한면도에서도 졸고있는 선비가 크게 나타나고 있는데 두작품 모두 산수 처리는 언덕의 한부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초기에 나타난 새로은 화풍으로서 당대 선비화가였던 강희안이나 전문화가였던 이상좌등이 새롭게 펼쳐보인 것이었다. 또한 이 그림들은 산이아 바위, 나무 그리고 인물등의 표현이 새롭게 나타난다. 이 그림들중에 특히 강조되고 있는 각이지며 강건하게 나타나고 있는 까만 먹선들은 조선조 초기에 가장 널리 유행했던 안견계통의 산수화풍하고는 사뭇 다른 것이다. 굵고 단단해 보이며 변화가 적은 진한 먹선의 나무가지에서는 배경의 확터진 여백공간속에서 꿋꿋하게 서있는 힘을 분출해 내고 있고 전경부분의 언덕에서도 강한 윤곽선과 골격의 빠르고 직선적인 필치, 그리고 인물의 옷자락에서 나타난 진하고 굵으며 매우 속도감을 드러내고 있는 필세의 운용에서 강직하며 꼿꼿한 기품과 이상좌의 화가로서의 역량과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상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당시의 새로운 표현이 특히 중국 남송(南宋)시대에 대표적으로 활약했던 마원(馬遠:1130-1220년대)계통의 원체화(院體畵-남송시대 궁정에 설치했던 화원에서 주로 유행했던 화풍)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보인다. 그러나 이상좌가 중국에 가서 마원계의 화풍을 직접 공부했을 것으로는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선초기에 마원화풍의 작품들이 더러 소개되고 있었거나 혹은 명(明)나라 초기의 원체화풍이 이상좌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이상좌가 중국의 화풍과 유사한 일면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나 그의 작품은 중국의 유사한 화풍과 비교하여 훨씬 뛰어난 기량과 격조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당대의 새로운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한 발전시킴으로써 조선초기 화단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어떻든 이렇게 뛰어난 작가가 현재로선 전북인으로 확인할 자료는 없다 하더라도 그가 노비출신이며 본관을 전주인으로 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후에라도 좀더 충분한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