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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7 | 연재 [문화저널]
<제14회 백제기행>전북의 장승과 성신앙
(남원 만복사,순창 팔덕,정읍 칠보)
이상훈 부안고 교사(2005-01-25 14:48:18)


 아주 미약하나마 “역사”를 나의 전공분야로 택하면서부터 민속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은 나 스스로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열정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은 언제나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아쉬움과 숙제를 남겨두곤 했었다. 그러나 “전북지역 장승과 성신앙”이란 부제의 백제기행이 눈에 띄었을때 지금까지 나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전통민속문화에 대한 열정은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벅찬 가슴과 커다란 기대속에 마침내 다가올 그날을 기다렸고......
하지만, 그날이 다가옴에 따라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문제들이 나의 주위를 어지렵혔으며 나는 또 한번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기행은 생활에 있어 커다란 기쁨일뿐더러 고귀한 배움이다. 어느곳을 가든지 가는 곳곳마다 진듯하게 가슴에 와 닿는 기쁨과 어느 곳에 서도 얻을 수 없는 앎이 자리하고 있기 대문이다.”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런 소소한 문제들을 제쳐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번 백제기행은 인간과 더불어 생성된 믿음과 바램을 가져다 주는 대상을-민속적 종교-찾아 그 터전으로 떠나게 된다. 우리의 모둠살이의 기본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의 형성은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물러 생활하게 되었고 그들의 살아온 흔적을 말해주는 유적·유물들이 남겨져 있을진데 우리는 과거와 오늘을 연결시켜주는 초자연의 뜻을 헤아리는 종교적 대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백제기행은 처음이라 쑥스러움과 낯설음이 먼저 나를 주춤하게 하였지만 국민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틈에서 나는 곧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기행에 오를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처럼 많은 것이 의아하였으나 민속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음을 반영한 듯 싶어서 흐뭇하고 기뻤다. 주최측은 이번 백제기행의 일정을 설명하면서 어느때보다 많은 참여로 인해 여유로운 표정을 나타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푸르름이 여름의 원기왕성한 제모습을 자랑하듯 하였고 세차게 내려쬐는 태양이 새생명을 잉태하는 모체라 생각할 때쯤, 이태호 교수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18~19C 변혁기에 나타나는 마을 공동체로써 장승과 솟대는 전라도에 대단히 많이 분포하는데 그것은 생산력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조선왕조를 극복하며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을 우리는 건강한 문화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일찍이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장승과 솟대는 거석문화로 대표되는 고인돌, 선돌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고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신앙과 관계 있는 것이다.”
실제 장승과 성신앙은 꿋꿋하게 살아온 민초의 소박한 바램이 다정다감하게 배어있는 민중신앙의 대상물이다. 창밖으로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만큼이나 선생님의 뜨거운 열강과 더불어 우리는 첫 도착지 남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첫 도착지, 남원시 동충동의 애기바위, 많은 사람의 호기심속에서 무척 아낌을 받았던 원기 왕성한 애기 바위는 1970년대초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남원 인근 마을의 우물에 있었으나 한 무당에 의해서 모셔져 온 것이라고 한다. 새마을 운동 전개로 인해 버려졌던 것이 어느 누군가의 배려로 이 자리를 지금껏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애기 바위와 벗하며 기념촬영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건강하게 느겨졌는데, 지금 우리 기행일행을 맞이하면서 그 존재가 확인 되었지만 뭇사람들의 잦은 왕래데도 쉬이 지나쳐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애기 바위를 뒤로 하고 만복사지로 향했다.
만복사지 발굴을 마무리 하셨던 윤덕향 선생님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중 이곳을 배경으로 쓴 ‘만복사저 포기’를 말하면서 “만복사지는 동탑 서전당식 배치로 일본 법기사와 유사하며 조선세조때까지 탑하나에 법당 3개인 일탑 3금식의 사찰로 그 형식은 고구려에서 기원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널따란 만복사지 경내는 잔디를 입혀 놓아 한결 신선하게 보였으며 잘 정돈되어 있었다. 경내 가운데쯤 자리잡은 석불에는 요사이 세운 누각이 새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말부터 왕권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지방세력이 성장하는 고려때 와서는 개인의 복을 비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만복사(萬福寺)“가 창건되었으며 이것은 귀족문화와는 분리되는 지방호족의 문화”라는 만복사창건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태호 선생님의 설득력 있는 설명이 덧붙여 졌다. 지난날 만복사의 온전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시간의 흐름속에 파묻혔던 이 터를 이렇게라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싶었다. 실제 한번 파괴된 문화유적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며 소중한 문화유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구히 매몰된다는 것은 문화유산의 얼마나 커다란 손실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첫 목적지인 남원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순창읍내에 있는 두기의 장승을 보기 위해 우리 백제기행은 순창으로 향했다. 차안에서는 시끌짝하게 ‘솔아 솔아 푸른 솔아’ 노래가 울려 퍼졌고 제법 백제기행도 무르익어가고 있는 듯 했다.

“장승, 우리들의 순수한 모습
화 났을땐 매서운 눈길로
즐거울땐 귀밑까지 찢어진 웃는 입으로
슬플땐 처량한 모습으로
향토와 함께 한민족의 恨을
무마시켜준 장승“

순창읍 장승은 여느 장승과는 달리 그 형태가 특이하다. 무섭다거나, 농부의 모습 같지도 않고 전혀 판이한 모습인데 마치 연지를 찍은 새색시 같은 모습니다. 장승을 보면서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순창읍내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장승이 요사이 옮겨졌는데 예전 장승의 방향과 달리 옮겨 놓았던 것이다. 요컨대 예전에 두장승 모두 북향을 하고 있었으나 옮겨진 하나의 장승이 서쪽을 향하게 됨으로써 엉망이 되어버려 장승 본래의 기능을 상싱해 버렸기 때문이다. 기실 순창읍 장승은 다른 장승과 달리 마주보고 있지 않고 모두 북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순창읍내 장승이 세워진 곳에서 북쪽을 향하여 보게 되면 텅빈 듯하여 허전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장승을 세워 외부로부터 들어오늘 귀신이나 질병을 물리쳐 마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빈공간을 체움으로써 공간에 대한 무서움을 극복하고 심정적인 안정을 얻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 장승을 옮겨 다시 세우게 되었는지는 신중함을 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순창읍내에서 점심을 하며 이번 백제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의 제 모습들을 소개하였고, 주최측은 여러 사정을 들어 일정 변경을 시도했으나 본래 일정대로 백제기행은 추진되었다. 산동리에 있는 남근석을 보러 가는 도중 구룡리 선돌마을에 내려 좁다란 논길을 열지어서 당산나무와 돌무더기위에 놓인 입석 등으로 복합된 전형적인 형태의 당산을 둘러보고 이마을 주위에 산재되어 있는 고인돌을 둘러 보았다. 내리 쬐는 햇볕은 수그러들 줄 몰랐으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북방식(탁자식)과 남방식(기반식)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이러한 고인돌을 만드는데는 대단히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이 있다. 즉 1t의 돌을 하루 16명이 1.6Km를 운반했다. 100t짜리 돌이라 한다면 대강 산술적으로 1600명이란 사람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권력이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는 윤덕향 선생님의 잔잔한 설명으로 잠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자. 크기가 수십t이나 되는 이 바위는 어떻게 옮겨졌을까. 굴림목을 바위밑에 깔고 줄을 걸어 당기지 않았을까. 그리고 작업이 진행되면서 한사람의 지휘자가 자연스레 결정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호흡을 맞추어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고, 사람은 한덩이가 되어 돌을 밀치고 당겼을 것이다. 함께 힘을 합하고 지혜를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 마침내는 거대한 고인돌이 조성되었으리라.
산동리로 가는 길은 좁아 차한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었고, 나의 눈은 창밖의 푸르른 널따란 들을 향하고 있었다. 멀리 마을앞 커다란 나무들 한쪽에 남근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다다랐을때 많은 사람들의 감탄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생산의 극치였으면 환희의 장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꽃무늬를 한 힘찬 기둥은 더위를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고 어느 누군가가 떠온 물 한모금은 더욱 더위를 가시게 했다. “예전에 저것을 옮겼는데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나서 다시 옮겨다 세웠어요”라는 말이 실감나게 들리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들의 사고는 보다 합리화되어가고, 우리릐 믿음은 보다 더 믿음직스럽게 과학화 되지 않았는가. 어떠한 것이든 논리적이고 객관적이어야 옳은 것인가. 믿음이란게 무언가. 우리를 보다 더 인간화 시키는게 아니겠는가.
순창읍내로 되돌아와 덕치를 넘어 험준한 골짜기에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회문산을 지나 운암교에서 잠시 머물렀다. 자연의 파괴란 너무 순식간인 것 같다. 문명은 편리를 가져다 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머무르고 싶은 우리의 고향은 하나씩 하나씩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멀리 보이는 마을은 아늑하기 보다는 텅빈 느낌을 간직하게 했다.
백제기행 일행이 어느새 마지막 기행지인 칠보 원백암으로 향하였을 때는 기나긴 하루 해도 이제는 길다랗게 그림자를 드리울 때즘이었다. 칠보 원백암마을에서 앞서 조금은 번잡스럽지만 마을의 전형적인 공간구조를 정리한 글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마을의 시작인 동구에서 입구까지를 서장,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서 그 마을에서 가장 대표되는 중심 가옥까지를 중장, 중심가옥에서 마을이 끝나는 곳까지를 결장으로 한다.
마을의 서장은 골의 동구로부터 시작된다. 동구에는 경계표시나 수호신으로 장승이 놓인다. 때론 입석이 대치되기도 한다. 또는 바위에 의미가 담긴 글씨를 큼직하게 새겨 놓기도 한다. 바위가 있으면 마을의 입구임을 표시하는 글을 새겨서 지금까지의 환경경험을 물과 함께 씻어버리고 새로운 공간으로 진행함을 암시해 준다. 즉 마을 입구임을 암시 해준다. 또 이곳에 성황당, 돌무더기를 쌓아 두기도 하고 커다란 나무를 심기도 한다. 이곳에서 보면 마을의 전경이 펼쳐진다.
중장은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 효자비, 열녀비와 같은 비각들이 많이 세워지며 또 고목에 둘러싸인 오솔길, 돌담장, 마을 공동샘, 빨래터가 설치되고 마을의 중심 시설물인 정자가 나타난다.
마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옥에서 끝나는 곳까지를 결장이라 한다. 중심가옥에서 길은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어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길 자체가 마을 뒷산이라는 대자연속에 흡수된다.
지금 가고자 하는 원백암 마을은 장승과 남근석이 있는 곳이며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간신앙으로서 대표적인 마을굿이 지금까지 행하여 지고 있다.
국도에서 원백암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좁다란 길로 한참 들어섰을때 300~400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옆에 원기 왕성한 남근석과 남근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승이 보였다. 남근석은 밑부분에서 귀두부분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게 조각되었으면 아주 사실적으로 기운차게 세워져 있었고 이제는 그 것을 모두들 자연스럽게 대하는 듯 하였다. 어느 누구를 의식함 없이 순진무구한 자연인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주위에 몇 개의 선돌이 눈에 띄었고 고추밭에 세워진 장승은 눈이 튀어나와 있고, 코는 갈아 문드러져 있으며 입과 수염이 드러나 보이고 가슴에는 제를 지냈다는 것을 표현하듯 새끼가 돌려져 있었으며 그 새끼 사이에 화선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 장승과 마주한 장승은 논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사각기둥으로 남자인양 우람하게 생겼으며 매우 단순화된 모습이었고 굳게 다물고 있는 입이면서도 무언가 끊임없이 마주한 장승과 말하는 듷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칠보 원백암에서 본 이른바 백제기행의 전부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백제기행은 매번 마을의 서장에서만 서성거렸으며 또한 관찰자의 설명과 눈으로만 훑어본 기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영원의 상징인 민속물-이같은 민속물을 잉태하게 만든 사람들의 생활처는 도외시한 채 단순히 민속물에만 관심을 기울였으니......
과연 우리는 그 돌덩이로 남아 있는 것들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단순히 웃음만을 자아내게 한 것들은 아니었나. 우리들이 바라본 것은 민중생활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지 어떠한 틀에 박혀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만든 대상은 아니다. 우리는 생생한 민중의 생활을 느끼기 위해 보다 더 적극적으로 뛰어야만 했다. 산업화 되고 기계화돈 물질만능의 현실앞에서 어느정도 우리의 민속이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고대로부터 유유히 내려온 민중생활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민중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민속 조사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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