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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7 | [문화저널]
<제26회 백제기행>민중의 불상과 무명승의 사리탑 _ 지리산 쌍계사외 연곡사를 다녀와서
박현철/군산중앙중 교사 (2005-01-25 14:58:07)
오랜 가뭄으로 농촌은 밭작물의 피해속에 논까지 갈라져가고 도시에서는 식수난이 걱정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며칠전부터 내린 비로 조금이나마 해갈이 됐건만 유독 전라도 지역에는 목마른 대지가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전주에서 모처럼 깨복쟁이 친구들과 어울려 보내고 아침에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비가 제법 쏟아진다. 반가운 비였지만 오늘 계획된 제26회 백제기행때문에 걱정부터 앞선다. 특히 이번 기행에는 어렵게 아내를 설득하여 처음으로 같이 가는 나로서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염려했던 것보다는 많은 인원(36명)이 단비의 축복속에 지리산을 향해 예정보다 조금 늦은 9시 30분에 전주를 출발하였다. 가는 곳은 지리산 정령치의 불상군과 구례 연곡사의 부도탑이었다. 모두들 오늘의 기행걱정보다 애타게 기다렸던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다는 데에 오히려 반가워 하였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아내와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떠나는 여행이 하나의 낭만적인 추억이 될 것 같은 막역한 기대감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쏟아지는 비로 온 대지가 새로운 싱싱한 생명력을 되찾는 것을 차창 밖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차안에서 기행 자료를 열심히 더듬어 가는데 주간선생님이 오늘의 비로 예정했던 지리산 정령치의 마애불상은 어쩔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루고 대신 쌍계사를 들르겠다는 말씀이 있었다. 전주를 벗어나자 전과 같이 문화저널에서 수고하는 여러분들의 인사와 기행 참가자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백제기행 입소식을 가졌다. 특히 이번 기행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참가하였고 모두들 활발하고 익숙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날씨탓으로 조용했던 차안이 한층 부드러워진다. 소개하는 중에 나로썬 이해할 수 없는 ‘불순한 기행목적’이란 말도 나왔는데 그것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 수가 있었다. 소개가 끝난 후 주간선생님께서 오늘의 기행 장소를 중심으로 지리산의지형에 대한 전반적인 말씀이 있었다. 모두들 나누어준 지도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이어서 문화저널 발행인이며 이번 기행에 해설을 하실 윤덕향선생님께서, 지리산 주변에 유명한 사찰이 많은 까닭은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불교가 경치 좋고 한적한 이곳을 찾게되었고 이들 선사의 가르침은 제자에게 개별적으로 전수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소박한 민중과 접촉하는 방법으로 어려운 경전보다는 부도와 같은 화려한 시청각 교육을 통해서 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남원을 지날 때에는 비가 그쳤는데 쌍계사에 도착하니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정류장 빈터에서 산나물과 더덕을 팔기 위하여 빗속에 늘어서 있는 할머니들의 눈길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쌍계사로 올라가는 길 주변에는 군데군데 대나무와 비석들이 비를 흠뻑 맞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빗속의 쌍계사는 운치가 있었지만 다른 사찰보다 건물이 곳곳에 들어차 있어 좀 갑갑하게 느껴졌다. 비오는 탓인지 대웅전 주변은 진한 향내로 가득하였다. 대웅전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우측에는 아미타불 좌측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으며 사이사이에 관음, 세지, 문수, 보현의 4보살을 모셨다. 이는 특이한 불상의 배치로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언제나 불국토에 살려는 원대한 신앙심과 자비, 용기, 지혜, 실천을 통한 불국토 건설인 중생들의 염원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 앞의 3층탑은 쌍계사 청건당시의 탑이라 그런지 현재 절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빈약하였다. 반면에 국보 제47호로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의 친필인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쏟아지는 비속에 우뚝선채 역사의 무게를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리를 보고 팔음률로서 어산(범패)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불교음악인 범패의 창시자로 알려진 분다. 또한 선사는 중국에서 참선할 때 머리를 맑게해 주는 자연산 녹차를 가지고왔다고 한다. 쏟아지는 비로 금새 쌍계사 주변의 계곡은 자은 폭포를 이루어 놓았다. 바삐 내려오다 부르는 소리에 작은 주막집으로 잠시 비를 피하였다. 그동안의 백제기행으로 친숙해진 분들이 모여 반갑게 맞아주었다. 동동주의 달작찌끈한 입맛을 다시면서 폭우로 아래부분까지 젖은 껄쩍지끈한 상태에서도 모두들 자연스럽게 한 식구가 되었다. 빈 속에 동동주가 들어가니 배속이 짜르르하고 비맞은 몸이 훈훈해진다. 모두들 문밖의 쏟아지는 빗방울과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치 자연인이 된 듯 목소리들이 화기애애해진다. 문득 어릴 때 할머님이 늘 집 떠나면 고생이다라고 하던 말씀이 떠오르면서도, 아, 이것이 여행의 매력인가 보구나. 점심은 차안에서 도시락으로 마치고 2시쯤 쌍계사를 출발하여 연곡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얼마전부터 망국의 병폐로 알려진 지역감정을 해소한다는 뜻에서 크게 부각된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유명한 화개장터를 지나게 되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면정도의 크기였고 지금은 거의 장이 서지 않는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이 화개정터를 동서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몇 년 안에 크게 조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와같은 인위적인 전시행정이 이미 깊게 패인 지역감정의 해소에 얼마나 긍정적인 기여를 할 지는 의문이 간다. 지역감정이 발행하게 된 근본적이 원인에 대한 치료방법은 고려하지 않고 이와같은 일시적 미봉책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 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지나 섬진강 나루터에 잠시 정차하였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나누어 지는데 폭이 180m쯤 되는 이 곳은 바람이 세기 때문에 양쪽 기슭에 고정된 줄을 연결한 다음 여기에 배를 연결하여 왕래하여 왔던 것이다. 그 옛날 이 곳을 왕래하던 그 사람들에게 전라도와 경상도는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배를 탄 우리 모두는 깨끗한 섬진강물에 지역감정이 모두 흘러가 두지역이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며 밧줄을 잡아당겼다. 배사공 아저씨의 잔잔한 말씨가 - 이 강물에 일제시대 화엄사 종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빠뜨린 얘기며, 요 아래에서 TV드라마 「토지」 촬영이 있었다는 등 - 강물처럼 와 닿는다. 그러나 이 생활도 경제적ㅇ로 타산이 맞지 않나보다. 새로운 사공을 뽑아바꾸려 한다기에 모두들 문화저널 편집위원인 이상훈씨를 추천한다. 아마도 그이의 웃음띤 얼굴이 손님을 많이 끌어온다고 믿어서였을까. 연곡사로 가는 도중 차창밖 비가 개인 주변 산에는 안개가 차츰 걷히며 녹음의 싱싱함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또한 우리 고장의 넓은 평야와는 대조적인 계단식으로 잘 정리된 천수답이 신기할 정도로 느껴졌다.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에 도착하니 또다시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남아있는 사찰인데도 절 주변 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너무도 초라하였다. 과연 이런 곳에 얼마나 방문객이 찾아들지 의문이었고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잘 나타내 주고있는 듯하여 착잡한 심정이었다. 국보인 연곡사 동부도(제53호)와 북부도(제54호)에 대하여, 조선게토레이(?) 덕분(?)인지 윤덕향교수님은 비에 젖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년이상의 지리산 모진 비바람을 묵묵히 이겨내온 어느 무명승의 사리탑 세계를 무지한 중생들에게 들려주신다. 그 열성적인 설명과 참가자들의 진지한 태도가 바로 백제기행만이 가질 수 있는 자랑도 아니겠는가. 팔각원당형인 부도의 구조와 거기에 조각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정교한 무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히 팔각 탑신 각면에 조각되어있는 문&#8228;향로&#8228;사천왕상이 안에 모셔놓은 고승의 사리를 보호하면서 하나의 극락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말씀에는 통일신라 민중들의 극락세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교사인 나자신 우리 문화재에 대한 그동안의 피상적인 지식에 죄스럽고 부끄러움이 앞섰다. 현재 우리의 역사수업이 너무나도 책상머리에서 시험위주의 문제풀이에 치우치다보니 국사과목이 학생들에게는 지겨운 암기과목이 되어버렸다. 결국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은 찾아보기 힘들고 현재의 우리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그저 지나가버린 먼 옛ㄴㄹ 어느 낯선 지방의 이야기 거리로 취급되어 갈 때마다 나자신의 무능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타까움속에서 늦게나마 백제기행을 만날 수 있었다. 1회부터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이제라도 열심히 따라다녀 학생들게게 좀더 생생한 역사현장과 문화전통을 전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연곡사를 출발한 후 오늘 일정의 마지막 장소인 운조루에 들었다.(운조루에 대해서는 91년 11월호 참고바람). 구례 운조루는 영조때(1776)에 건립한 조선시대 앙반가의 대표적인 집으로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었다. 부엌에 있는 뒤주에는 항상 쌀이 가득차 있어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울 때 언제든지 먹을만치의 식량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선시대 양반들이 향촌사회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건물의 규모와 더불어 능히 짐작할 수 가 있었다. 널찍한 마당에 서성이며 바라보느라니 그 옛날 이집의 전성시대에 이 집 주인과 하인들의 생활모습이 드라마처럼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마당에 잡초만 나있고 오랫동안 쓰지않은 건물은 점차 무너져가고 일종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후손들이 그래도 살고 있으니까 가까스로 보존되어 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넓은 집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가 걱정이라는 한숨섞인 집 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발길을 돌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는 뭐 볼게 있느냐고 시간이 아깝다고 한다는데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우리한테 아주머니는 대문밖까지 나와 잘가라는 인사까지 하신다. 솟을대문위에는 그 옛날 이집 주인이 호랑이를 잡아 호랑이뼈와 말뼈를 걸어놓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호랑이뼈는 없어지고 말뼈만 뎅그란히 걸려 있었다. 이상하게 길가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이 마을의 입구에는 작년에 세운 근사한 새 정자가 있어 퇴락해 가는 운조루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과거는 잊혀져가고 우리는 현재에 빠져있어 미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잠시 이 주인 없는 정자에서 넓은 들판의 이제 막 생기를 찾은 푸른 벼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 - 23호 백제기행때 참가한 두분의 청춘남녀가 인연이 되어 결혼을 하게되었다 -을 알게 되었다. 간단한 축하연(?)으로 두분의 행복을 빌며 이것이 앞에서 말한 ‘불순한 기행목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떠한가. 백제기행으로 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지않은가. 전북의 선남선녀들이여 모두 함께 백제기행을 떠나자. 그러면 잭제기행이 자자손손 계승되지 않겠는가. 이번 제26회 백제기행은 날씨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모든 참가자들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가슴속에 간직되어 질 것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의 주간 이종민선생님의 구성진 ‘꽃분네야’에 장단을 맞추며 윤덕향선생님의 유독 빨간 얼굴 모습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나로써는 아내의 다음 27회 기행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 왜냐하면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 이번 기행이 성공하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끝으로 백제기행에 대하여 한가지 제안을 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문화저널의 중요한 행사로 볼 수 있는 백제기행이 있는 달에는 문화저널지에 기행자료를 수록하고 다음 달에는 앞의 기행에 관한 기행문을 싣는 고정란을 마련하면 좋겠다. 그래서 충분한 사전지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참가하도록 하며 혹시 부득이 참가하지 못한 회원들에게도 지면으로나마 기행지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렇게되면 소중한 기행자료도 문화저널과 같이 보존되어질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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