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3.6 | [문화저널]
<제32회 백제기행>“초라한 이치(梨峙) 전적비 앞에서 살풀이 춤이라도 추었으면......”
양 병 완/순창북중학교 교사 (2005-01-25 15:03:43)
왜 그렇게도 무관심했을까, 왜 그렇게도 우둔했을까, 왜 그렇게도 현명하지 못함을 깨닫지 못했을까, 아무리 내 자신에게 책망을 해보아도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1993년 6월 20일 일요일. 새벽부터 가슴이 설렌다. 백제기행할때의 식구들은 언제 만나도 생기가 솟아난다. 버스가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기다리는 동안 버스안에서 키킥거리며 웃음이 시작됐다. 보길도 기행에서 한조를 이룬 식구들을 또 만났으니 어찌 아니 즐겁고 반갑지 않으랴! 지난번 담양의 정자문화기행 때 못 다녀와서 아쉬웠으나 이번에는 '꼭 참석'으로 결정해 버린 지가 오래인지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관광버스에 승차하고 보니 기분이 상큼하고 좋았다. 한참동안을 달리다보니 충남금산. 버스에서 내려서 아무런 뜻없이 피곤함을 달래기 위하여 휴식을 취하던 옆자리에 꾀죄죄하고 조그마한 이치(梨峙)전적비가 덩그마니 세워져 있다. 웬지 초라한 돌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전적비의 품위 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 왜군들이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같이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치 전투 격전지가 이곳이라니 머리가 쭈삣해졌다. 왜 이렇게 역사에 대한 것이라면 둔해질까? 목숨을 걸고 지켜놓은 살아서 숨쉬고 있는 문화를 알려고 하는데 인색할까? 왜 일본문화에 철저하게 핍박을 받아 봤으면서도 왜래문화만 좋아하는 것일까? 우리문화가 없어져버리면 또 다른 나라 문화에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요즈음 청소년들 중에 순수한 우리 조선, 대한민국의 순수한 축가(祝歌)인 「오늘이 늘이소서」를 제대로 부를 줄 아는 청소년들이 몇명이나 될까』 우리 국악이, 우리 문화가 제자리로 찾아 갈 수 있을런지? 우리 국악과 우리 문화가 제자리로 찾아 갈려면 앞으로도 몇년이나 세월이 더 흘러가야만 하는지.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나 어디에서나 우리가락 인 판소리』를 마음껏 소리높여 즐겨 부를 때가 언제쯤이나 올런지! T.V에도 매일 황금시간대에 정적 (靜的)인 선비의 지혜나 게임, 문화적인 정서가 듬뿍 담겨있는 놀이는 거의 없다. 오죽했으면 Y.M.C.A &#8228;Y.W.C.A 시청자모임에서 T.V 안보기 운동을 하고 있고 T.V 끄는 날을 정해 시민운동을 하고 있을까? 오로지 인기와 광고방송 위주로만 치닫고있다. 동적(動的)인것만이 최고다. 젊은이들의 언어와 행동이 격렬해지고 정서불안 상태가 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T.V 연출가와 행정을 담당하는 모든 관계자들의 변화 없이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반드시 자기 자녀도 정서불안층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기성세대와 전문가들, 행정가들이 직접 나서서 정서결핍증을 반드시 치료해 주어 야만 한다. '민족의 혼'이 머리속에서 맴돌며 4백년전 임진왜란의 역사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정명가도(征明假道)라 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1년전(선조 24년)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조정에 대하여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선조 임금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일본은 길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트집을 삼아 1년뒤(선조 25년)에 조선을 쳐들어왔다 이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숫자는 대략 20만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몰려오자 선조(宣祖)는 4월 30일 몽진 (夢塵)길에 오르고 5월 5일 왜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경상도 충청도를 정복한 뒤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전국 어디에서나 식량이 부족한 때였으므로 식량약탈과 부녀자 성폭행은 극에 달하였다. 20만여명 왜군의 허기진배를 채우기위해서는 전라도 곡창지대를 필히 공격해야만 했다. 일본 왜장 소조천륭경은 이치요새를 점령한뒤 전주를 점령할 계획이었고 부장인 안국사혜경은 진안을 거쳐 웅치요새를 정복한뒤 전부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치전투(梨峙戰鬪)는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7월 8일에 금산 서평의 이치(배제)에서 아군과 왜군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다. 아군은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 1,500명이었고 일본 왜군은 고바야카와(小早川陸景)가 거느린 6번대소속인 3,000여명의 특수훈련을 받은 별군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이 전주침입을 하기 위한 전투로서 웅치전투와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우리 아군은 끝까지 잘 싸워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온 종일 계속되는 전투중에 황진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자 아군들의 사기가 한때 떨어졌으나 권율 도절제사가 관군과 의병들을 격려하고 독전하여 왜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우리 아군의 무기는 활과 죽창과 돌맹이가 전부였으며 일본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아군의 피해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헤아릴수가 없다. 이치 전투의 승리로 전라도가 지켜졌다.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중요한 식량공급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산전투는 1592년 8월 9일 1차 전투가 시작됐다.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전사하고 말았다. 남평현감(南平縣監) 한순의 군사 500여명도 패퇴하여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8월 16일 조헌은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 별장 이산겸(李山兼)이 수백명의 군ㄷ사를 거느리고 금산에서 패퇴해오면서 ‘왜군은 정예대군이며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는 대적하며 패한다.’고 했으나 ‘국왕이 당하고 있는 판에 신하가 어찌하여 목숨을 아낄 수 있느냐’ 하면서 그의 만류를 점잖게 거절했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과 공주목사 허욱도 의병장 조헌의 고군진격(孤軍進擊)을 말리면서 기일을 정하여 함께 협공하자고 제의해 왔으나 조헌은 그들의 주저함을 본뒤에 분통을 터트리며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8월 18일 금산에서 제2차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조헌이 거느린 의병과 왜군과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승려의 병장 영규가 거느린 승려의용군들과 합세하여 왜군의 공격을 목숨을 걸고 막아내기로 결의했다. 북행길에 올라가 온양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은 사기꾼 안세헌의 간악한 잔꾀와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다. 불행한 사건이 계속 터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조헌의 ㄷ전투전과를 시기 질투해서 순찰사 직권으로 의병들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어 놓고 협박하니 의병들은 하나 둘씩 싸울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개인의 무사안일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아군 집결지에서 도망치는 관군과 의병들이 속출했다.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의병들이 마음놓고 싸울 수 없도록 방해를 놓았다. 의병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고 말았다. 7백명의 의병만이 끝까지 남아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연히 의견을 모았다. 조헌은 승려 의병장 영규에게 밀서를 보내 다시 승려군과 합진하여 8월 18일 꼭두새벽에 진군하여 금산 산성 십리 지점에 진영을 설치한 뒤 관군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렸다. 한편 성내에 있는 일본 왜군들도 당하고만 있을리가 없었다. 우리 아군의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정탐하고 난뒤 즉시 복병을 내어 퇴로를 차단시킨 다음 전체 대군을 여러조로 나누어 조총과 화살로 수없이 여러차례 공격해 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조선 사나이들이여! 한번의 죽음이 있을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하고 독전하고 분전하여 세차례의 공격은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다 화살이 다 떨어져 싸울 수가 없엇다. 왜군이 일제히 총 공격을 감행하여 아군 진영안으로 쳐들어오니 의병들은 죽창과 낫으로 육박전을 벌여 한명의 이탈자도 없이 모두 순절하였다. 의병장 조헌도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오호애제라! 승려 의병장 영규와 승려 군인들도 모두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자 왜군의 시체도 쌓여서 3일간 왜군의 시체를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7백명의 시신과 전투상황이 일본 왜군에게 탄약과 식량이 부족하여 불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 버렸다. 이러한 금산전투가 호남지방은 물론이고 나라를 구원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7백명이나 되는 많은 의사(義士)들의 장렬한 전사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밀사를 통하여 순식간에 퍼졌다. 의기소침하고 소강상태이며 침체됐던 아군들은 용기를 얻어 왜군을 철저히 막아내기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25년) 9월 17일 무주 금산에서 왜군은 완전히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방정량( 朴廷亮)이 의사(義士) 7백명의 유골을 모두 모아 큰 무덤을 한곳에 합장하니 후세사람들이 이를 「칠백의총(七百義總)」이라 부르고 있다. 선비들이 매년 시향을 받들고 제례를 지내고 있으니 장한 일이다. 1971년에서야 정부에서 이지역을 성역화했다. 반갑고 대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오가 가까워서 칠백의총을 돌아보고 경내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정문을 향하여 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진혼곡이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 나왔다. 갑자기 속이 메시꺼워졌다. 칠백의총에 잠들어 계신 영령들이 외국인이 아닐진대 어찌하여 트럼펫으로 연주한 진혼곡이 우리의 영령들을 위로하는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안내양에게 즉시 항의했으나 자기는 모르는 사항이란다. 어안이 벙벙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 조선이라는 나라는 「제례악」도 없다는 말인가? 분명히 칠백의총에 잠들어 계시는 영령들이 조선인임에는 틀림없다. 트럼펫의 진혼곡이 울려 퍼질 때마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듣기 싫노라’고 호령 호령 하셨으리라. 시신들이 진혼곡소리를 들을때마다 용트림을 하며 귀를 막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순수한 우리 국악인 「제례악」으로 영령들을 모셔야 함이 옳다. 칠백의총의 봉분도 조선 흙이요 기념비석도 조선의 대리석이다. 잔디도 조선잔디요, 물과 공기도 조선것임이 분명하다. 칠백의총을 관리하는 직원도 조선사람인데 왜 문화는 외국문화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 트럼펫연주인 진혼곡으로 칠백의총의 영령들을 위로해야만 하는가? 문화를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일까? 순수한 우리 국악인 「제례악」이 튼튼하고 은은하게 울려 퍼질때 칠백의총에 잠든 영령들께서는 평안하게 영면하시리라. 고이 잠드소서! 칠백의총을 지나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하앙식 건물구조인 화암사를 들렀다. 새로 단청을 하거나 보수를 한 흔적없는 화암사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인 화암사의 문화재로서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점에 발길이 쉽게 돌아서지지 않았다. 전주로 돌아오는 관광버스안에서 이치(梨峙)전적비가 못내 가슴에 걸렸다. 초라하기만 한 이치전적비 앞에서 살풀이 춤 한자락이라도 추고 올것을....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