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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3 | 연재 [문화저널]
연중기획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9
금산사 2
윤덕향 고고학, 전북대 교수(2003-09-08 11:35:03)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금산사는 진표율사를 중심으로 통일신라에 들어서 크게 중창되었고 그 배경에는 민중의 미륵신앙과 지배층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 같은 양상이 실제로 금산사라는 공간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금산사의 특성을 다시 생각하기로 하겠다.

4. 금산사 건물의 평면 배치

금산사의 중심구역은 누각형태의 출입문인 보제루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중심구역과 외곽지역을 가르는 보제루는 현제 정면 5간 측면 3간의 2층 건물로 아래층의 중앙 3간이통로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마루로 되어있다. 이 같은 구조의 건물은 산에 자리하고 있는 가람의 경우에 보편적인 것으로 불교의 종파를 나눈다면 대체로 선종계통에 속하는 것이다. 즉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 교종 계통의 사찰에서는 문과 법당 그리고 강당이 자리하며 법당과 문 사이에 탑이 모셔지는데 선종계통의 경우에는 문과 강당이 결합하여 누각형식의 문을 이룬다. 그러므로 금산사의 보제루는 1층이 문의 기능을 하며 2층은 강당의 기능을 하는 건물이다.
보제루를 지나면 보제루와 1직선상에 대적광전이 있으며 대적광전의 동쪽에 미륵전이 자리하고 있다. 또 대적광전의 동북쪽에는 한단 높은 단이 있는데 이곳에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금산사의 중심곽은 이 세 군데의 주요한 구역으로 나뉘어지며 이 외에 삼신각 등의 부속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가. 대적광전구역
대적광전은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었는데 최근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불타기 전의 대적광전에는 2단으로 불단이 있고 윗단에는 여래와 보살상이 놓이고 아랫단에는 500여 구의 나한상이 놓여 있었다.
본디 불교에서 여래는 해탈을 한 가장 높은 부처로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가 있고 또는 달리 응신불, 법신불, 보신불이라는 삼신불을 포괄하고 있다. 즉 시간적으로 대적광전에 있는 부처들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부처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대적광전의 앞쪽 동쪽에 치우친 곳에는 짙은 곤색, 또는 흑색을 띠고 있는 점판암으로 된 6각 다층 석탑이 있다. 현제 11층이 남아있는 탑의 기단은 3매의 6각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놓인 탑신석은 10,11층을 제외하고 모두 없어지고 지붕만이 남아있다.10층과 11층 탑신석 각면에는 선으로 불상을 그려서 장식을 하고 있다. 이탑은 탑신석에 선으로 그림 무늬가 있는 것이나 지붕의 표현이 다분히 장식적이라는 점 외에 평면형 6각이며 11층 이상의 다층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6각의 구도는 고려시대에 등장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탑의 규모가 크지 않으며 장식된 연꽃에서도 고려시기의 양상을 파악할 수가 있다. 또 11층 이상의 다층이라는 요소도 통일신라시대에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며 고려시기에 들어서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탑은 장식이나 평면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기의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 탑이 놓여있던 위치는 사적기에 의하면 대웅대광명전은 정유재란 시에 불타고 이조 13년에 재건되면서 대적광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즉 오늘날의 대적광전은 본디 대웅대광명전이었고 6각 다층석탑은 이 건물과 관련이 있다.

나. 미륵전 구역
미륵전은 국보 62호로 지정되었으며 외부는 3층의 건물이나 내부는 통간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는 건물내부에 있는 미륵삼존입상(彌勒三尊立像)을 모시기 위한 구도로 여겨진다. 미륵삼존입상은 본디는 1분만이 있는 독존상(獨尊像)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없어지자 조선 인조 5년에 삼존상을 만든 것이다.
미륵전도 정유재란 시에 불타 없어지자 인조 13만에 중창한 것으로 1층과 2층은 정면 5간 측면 4간이며 3층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되어 있다. 이 3층의 미륵전에는 1층에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같은 현판의 명칭은 모두 미륵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 건물이 미륵불을 모시는 곳이며 동시에 미륵불이 실제로 건물 내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행하는 3번의 설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미륵불은 미래에 이 세상에 현신하여 온갖 어려움에 고통을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3번의 설법을 행하게 되는데 그 설법이 용화3회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어쨌든 미륵이 행하는 용화3회의 설법을 위한 장소가 있어야하는데 미륵전이 3층인 것은 바로 그 같은 3번의 설법과 관련이 있으며 2층 현판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층의 현판은 미륵불의 성씨가 '慈'씨라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慈'씨, 즉 미륵의 집이라는 의미로 3층 현판의 미륵전과 같은 의미이면서 보다 간접적인 표현이다.
미륵전의 앞쪽, 현재 6각 다층석탑이 있는 곳의 부근에 대장전이 있었던 터라는 푯말이 있다. 또 대적광전의 서남쪽에 미륵전을 마주하고 대장전이 있다. 즉 현재 사역 내에 있는 대장전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으로 지방유형 문화재 6호로 지정되었다. 대장전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간씩인 건물로 용마루의 한가운데에 석탑의 상륜부가 얹혀져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전의 대장전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는데 인조 13년에 중창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짓고 석탑의 상륜부를 지붕 용마루에 남기게 되었다. 이 대장전 건물의 용마루에 탑의 상륜부가 있는 것은 이 건물이 본래는 탑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나무로 만든 목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남은 건물의 정면과 측면이 3간으로 공통되는 것도 이 건물이 목탑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탑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흙무덤의 형태였으며 중국으로 넘어와서 여러 층의 나무 또는 벽돌로 지은 탑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처음에는 나무나 벽돌로 만든 탑이 만들어 졌으며 그 후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석탑이 시작되어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석탑이 유행하기는 했으나 부분적으로는 계속 나무나 벽돌로 만든 탑이 만들어졌는데 석탑처럼 정사각형 평면을 보이고 있다. 이중 나무로 만든 목탑은 내부에 넓은 공간이 마련되므로 탑의 안에 불상이나 불경을 모시게 되었다. 금산사의 대장전은 바로 이처럼 목탑 안에 불상이나 불경을 모시는 경향을 반영하여 안에 불경을 모시게 된 데에서 대장전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본디 성격은 탑이었으며 미륵전과 인접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륵전과 관련된 목탑이었다고 생각된다.

다. 방등계단 구역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의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는 층계가 있고 이 층계 위에 5층 석탑과 방등계단이 있다. 방등계단은 정사각형 평면으로 1변의 길이 12 : 6M이고 그 내부에 다시 1변의 길이 8 : 35M의 정사각형 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 상하 2단의 면석에는 천인상(天人像)의 조각이 있으며 위층 계단의 중앙에는 석종형의 부도가 있다. 석종형의 부도는 정사각형의 받침들 위에 있는데 받침돌의 옆면마다에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부도는 원통 모양의 몸체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체의 아래쪽에는 두 줄의 음각한 띠가 돌려져 있다. 상륜부는 9마리의 용머리가 조각된 원형의 돌, 연꽃이 있는 돌 등으로 구성되며 꼭대기에는 보주가 놓여있다.
부처가 태어나자 9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서 목욕을 시켰다고 하는데 상륜부의 용은 이를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로 사자와 더불어 용이 등장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또 이와는 직접 관련이 없으나 진표가 금산사를 창건할 때 용왕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하며 용이라는 상징적 동물은 농경민들에게 있어서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다음으로 방등계단이 상하 2단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미륵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도솔천궁이 내원과 외원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방등계단의 주변에는 난간이 돌려져 있고 그 주위에 사천왕이 조각된 석주가 있다. 사천왕은 사천왕천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난간의 사천왕상은 이를 의미하며 난간에 의하여 도솔천과 사천왕천이 구분되는 것이다.
계단은 본디 계를 주는 곳으로 계를 받을 사람을 이 계단의 중앙에 앉히고 계법을 전해주는 데 이용되었다. 이처럼 계를 주는 데 이곳을 이용함으로서 계율을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하였으며 엄격한 계율은 미륵상생경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즉 방등계단의 중앙에 있는 석종형부도는 부도가 고승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라는 일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스러운 곳, 또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또 부도의 위에 용이 자리한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제 세상에 태어나려는 부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는 미륵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계를 받는 사람은 곧 미륵이 세상에 태어날 것이므로 계율을 엄격히 지킬 것을 다짐해야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방등계단은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있는 미륵신앙이며 이를 미륵상생신앙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같은 계단의 명칭이 방등이라는 것은 전혀 이 계단이 민중과 거리가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다. 방등은 모두가 동등하다는 뜻이며 원효가 말한 화엄사상의 기본원리, 즉 우주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로 귀일된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이 하나라는 의미는 모두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등계단은 미륵불의 계율 앞에서는 만민이 같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만민은 계율을 잘 지키고 미륵을 모셔야 된다는 것을 뜻하지만 계율을 지킴에 있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있으며 재능도 같지 않다. 따라서 부처에게 공양을 하고자 하나 재물이 없어서 공양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불경의 깊은 이치를 읽고 깨우치고자 하나 문자를 알지 못하여 불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까지 불경의 심오한 뜻을 일고 깨우칠 것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 걸맞는 계율이 제시되고 그럼으로써 구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방등계단의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미륵 상생신앙을 바탕으로 성립된 방등계단에는 이와는 다른 일면, 즉 미륵 하생신앙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방등계단의 앞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5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은 보물 25호로 지정되었으며 1층 탑신석에서 19점의 유물이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고려 성종 원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탑은 그 위치로 미루어 방등계단과 관련되는 것이 틀림없다.

5. 금산사의 성격

위에서 살펴본 구역은 각기 1개의 탑과 1개의 불당 또는 계단으로 되어 있다. 그중 방등계단은 일반 불당과는 달리 앞으로 태어날 미륵불이 상징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현재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을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가 있는 곳을 불당이라고 할 경우 방등계단도 불당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형태에 가까운 가시적인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인간의 형태를 가지지 않은 미래의 부처가 있다는 점이 일반적인 불당과 다른 점이다. 방등계단을 불당과 같은 성격으로 정리할 경우 금산사에는 탑과 불당이 1개씩 있는 3개의 구역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된다.
이 같은 구도는 금산사의 주된 부처가 진표율사의 중창연혁에서 분명한바와 같이 미륵불임에도 미륵전이 보제루의 정면에 있지 않고 측면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 본디 대적광전과 6각다층 석탑이 있었던 구역을 사적기에는 봉천원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구역이 현재의 위치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하나 일반 사찰의 배치가 남북방향으로 건물의 중심이 놓이는 점에서 미륵전이 중심 되는 구도였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봉천원이 중심 되는 구역이었을 것이다. 이 중심 되는 봉천원과 대등한 구역이 미륵전과 방등계단 구역으로 일반사찰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사찰이 부처를 모시는 불당과 부처의 사리가 있는 탑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금산사에는 3개의 사찰이 모여서 하나의 큰 사찰을 형성한 예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볼 수가 있다. 미륵사지의 경우 2개의 석탑과 1개의 목탑이 있었고 탑의 뒤에는 각기 그에 따르는 불당이 있었다는 점에서 평면형에서 차이가 있으나 금산사와 공통된다. 또 양자가 모두 미륵불을 모시는 절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미륵사지의 경우 불상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 정확한 양상을 파악할 수 없으나 평면배치형에 의하면 비교적 사찰 구성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이는 미륵사지가 평지가람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고 지배자가 주도하여 창건한 데에도 기인된다. 이에 비하여 금산사는 어떤 틀에 얽매인 것 같지 않으며 이는 6각 다층탑이 새로운 양식의 시도라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또 비록 후기에 조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적광전 내에 삼신불을 모두 모시고 있는 점이나 단독불이었던 미륵전 내의 미륵불의 좌우에 2분의 보처불을 만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기본적으로 금산사는 왕실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백제유민 출신인 진표에 의하여 중창되었고 그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또 그가 일반 민중의 어려움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건물의 조영에서도 민중을 의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미륵상생신앙에 의하여 불법을 깨우치고 계율을 충실히 따를 것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각종 부처가 모두 모셔진 곳에서 각종의 소원을 빌고 또 그 부처를 봄으로써 불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3곳에 작은 규모의 절을 마련함으로써 미륵불이 행하는 3번의 설법장소를 상징하고 미륵전의 현판명칭도 그에 부응하여 만들고 앞으로 태어날 부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방등계단의 석종형 부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 건물과 구조물의 설명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불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불교전래 이전부터 이 땅에 자리하고 있던 원시신앙-불교의 전래에 의하여 상당부분이 통합되기는 했으나 뿌리깊이 남아 있던 용을 믿는 것과 같은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중들을 불교로 끌어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하여 제시된 것이 중창연혁에 보이는 점찰경의 도입인 것이다.
금산사는 결국 백제 유민들에게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신앙을 제시하고 더불어 그들의 소박한 믿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점찰경이라는 것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하여 일반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도량으로 자리한 것이다. 그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찰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조되고 미륵하생신앙적 속성만이 강조됨으로서 금산사를 중심으로 각종 신흥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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