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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5 | 연재 [저널이 본다 ]
진정한 거듭남을 위한 잔인한 이 오월에
이종민 편집주간(2003-09-08 17:34:51)

영국의 한 시인은, 거듭남의 거짓된 가능성으로 우리를 애태우는 사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다. 죽음의 겨울을 딛고 소생하는 자연은 짐짓 진정한 거듭남을 보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겨울에 대한 기억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 인간들은 피상적 변화에 안주하여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를 죽음의 계절을 예비하지 않게 되고, 결국 끝없는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황무지의 상태가 개선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인간적 상황과 너무도 대조적인 자연의 싱그러운 모습은 그 잔혹한 대비를 통하여 인간 스스로의 비참함을 더욱더 절감케 해주는 것이다.
우리의 민주화여정에 있어서는 오월이 바로 이처럼 부푼 기대와 이에 상응하는 정도의 좌절을 맛보게 한 '잔인한 계절' 이 아닌가 한다. 4·19로 인한 거듭남의 가능성을 여지없이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모든 파행의 실마리가 되었던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달이고, 80년 정치군인들의 폭력적 군화발에 완연했던 민주화의 봄기운이 일시에 사라져버린 것도 이 오월에 있었던 일이다.
자연은 여전히 싱그러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5공의, 유신의, 제1공화국 시절의, 아니 일제 식민지 시대의 퇴행적 모습을 전혀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허울 좋은 '구국의 결단'의 보수 대야합으로 인해 오는 봄이 유독 얄궂은 황사바람으로 가득하더니, 금융실명제 실시 유보 등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주가는 폭락하고 부동산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비민주 악법을 개폐하겠다는 호언장담의 공약을 봄바람에 날려 보내버린 정치 모리배들은 자신들의 돈줄인 재벌의 기득권 보호를 위하여 '법대로!' 를 유난스럽게 외쳐댄다.
야합의 일환으로 몰아낸 옛 전우에게는 깡패의 의리조차 베풀기를 거절하고, 손을 잡는다는 것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며 몰아붙이던 옛 정적과는 티격태격 권력 나누어 먹기를 협의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사회적 위기가 이들의 관심사일 수 없다. 민주화니 민족통일이니 하는 것들 도시의 적절하게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의 역할만 해주면 된다. 국내의 번잡스러운 상황은 적절한시기의 소련방문이나 일본방문의 소위 '외유내강(?)'정책으로 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잿밥다툼으로 인한 치안의 공백은 이들과 비슷한 성격의 폭력조직이 독버섯처럼 자라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었으며, 이제는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나 정치권에서도 이들과 야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과거의 독재세력들이 항상 그러했듯 이러한 상황을 일부러 조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제시대의 폭력조직이 해방 후 반공청년단으로 둔갑하여 정치깡패로서의 위세를 떨쳤던 것이 단지 한 시기에만 있을 수 있었던 우연한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로 인한 공포의 분위기는 위기설에 의한 강압통치의 명분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임명권자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 사원이 반대하는 사장의 취임을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매사를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치부하는 정권은 또다시 국민의 방송을 초토화하여 시청자들의 안방에까지 경찰력을 투입시키고 말았다. 다른 노사분규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임을 애써 강조하지만, 진정 대화와 타협의 불모성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여타 노사분규의 타결에 치명적인 악선례를 남겨주고 만 것이다. 이를 통하여 설마 하던 국민들도 이 정권의 부도덕성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강경진압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5공식 언론재장악 음모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수백 명의 노동조합관계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기소 구속시켰던 대재벌의 회장님은 무엇을 그리도 참아왔는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엄청난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정벌'하려 하고 있다. '하면 된다'는 군사문화적발상이 대기업의 경영방침으로까지 정착해 가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까짓 공장 하나쯤은 문을 닫아도 이미 확보하고 있는 엄청난 부동산으로 인한 불로소득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그러한 배짱 뒤에 숨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명예회장님'이 얻어온 시베리아 개발권을 숨져진 카드로 활용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이처럼 무모해 보이는 자충수를 감행하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 이는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속성과 연관되는 것이다. 파행적 금융지원과 탈세 등을 통하여 거대한 재벌로 성장한 이들은 하루아침의 과감한 결행으로 정치권력을 거머쥔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밀어붙이는 것만을 능사로 안다. 이들에게 있어 과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인 것이다.
이에 편승한 학원 재벌들의 준동도 가히 꼴불견이다. 재단에 협조적이지 않다고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고, 교수협의회에서 선출한 총장을 임명하기는커녕 고발조처하며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을 무더기로 제적시켜버리겠다는 후안무치는 정치모리배나 악덕재벌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로비에 놀아나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을 할 수 없는 사립학교법을 통과시켜준 선량님들의 작태는 더욱 꼴사납다. 이들이 바로 민주화의 기수임을 자처했으며 한때는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한다. 이처럼 무엇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조짐은 이 밖의 모든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사실 이러한 난기류는 지난 문 목사 방북 이후에 일기 시작한 이데올로기 대공세로부터 예정되었던 것이다. 이념서적을 출판 발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을 단순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하나로 많은 출판인들과 시인 소설가를 구속기소하며 복사꽃으로 싸여 있는 초가집을 그렸다고 화가를 국가보안법위반사범으로 처단하는, 60년대의 매카시즘이 더욱 조잡한 형태로 재현될 때부터 이러한 파행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다.
오월이 무르익고 있다. 난무한 최루가스를 씻어내기 위함인지 올 들어 유난스럽게도 자주 내리는 봄비에 힘입어 오월의 신록이 더욱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점점 확연해지는 파국에 사람들도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다. 한없이 치솟는 부동산에, 하루하루가 다른 물가의 상승에,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곤두박질하는 주식시세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이들 모두가 정부의 무능 아니 돈 많은 사람들만을 위한 편향적 정책으로 인한 것임을 깨달으며, 또 이들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KBS와 현대중공업 사태를 통해 확인하면서 마음을 드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치안부재의 사회적 혼란도 정권의 도덕성과 연관된 것임을 확인하고 일신의 안전만을 꾀하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치유를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파국의 극점이 변혁의 터전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상기한다면 90년대 최초의 오월은 분명 거듭남의 분기점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새살을 내기 위해, 곪아터지기 위해피고름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되살아남을 위해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십년 전 광주의 경험을 단순히 기리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자각과 연결된다. 다시는 오월이 실질적인 거듭남 없이 그것의 단순한 징후만을 보여주는 그리하여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잔인한 계절'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즉 또 다른 '6·29'를 얻어내기 위해 우리 모두는 힘을 모아야 한다. 진정한 거듭남을 위하여 오늘의 일상적 안락을 희생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6·29항복'은 말로만의 것이서는 안된다. 섣부른 인정으로 적당히 얼버무려 주는 시행착오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저들에게 있어 이 신록의 계절이 정녕 '가장 잔인한 계절'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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