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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 | [문화저널]
1994동학농민혁명백주년/우리 역사를 바로 찾자 백주년, 그 역사적 의미 새겨야
최현식 향토사학자(2003-09-15 09:24:07)
1894년 정월 고부농민봉기와 3월봉기는 민권을 위한 농민항쟁이었으며 9월봉기는 일본군이 궁성을 침입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하나의 의병봉기이었음에도 관군은 도리어 일본군을 앞세워 비도(匪徒)를 토벌한다고 농민군을 무참하게도 살육했다. 그들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은 채 비도의 누명을 쓰고 죽어 갔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전봉준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고 토로했다. 그렇다. 죄 될 일이 티끌만치도 없다. 1994년은 그로부터 백주년이 되는 해다. 백년이 지나도록 그들은 역사적으로 비도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조차도 역사감각이 무디어져 버렸다. 그동안 항일의사에 대한 추모비도 세우고 사당도 세우는 현창사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나 갑오선열에 대한 현창사업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금구 원평에는 갑오년 동학농민군 무연묘(주인 없는 묘)가 몇 기 있다. 1894년 11월 25일 원평(院坪)접전에서 전사한 동학 농민군의 문 인 것이다. 원평 노인정에서 동쪽으로 국도 건너편 구릉지대(능선)는 당시 원평 접전의 전적지이다. 이곳은 당시 농민군의 묘로 뒤에 공동묘지가 되어 버렸다 한다. 접전지에 농민군의 묘가 남아 있는 곳은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다. (강원도 홍천에 의총(義塚)이 있음) 1970년대에 와서 공동묘지를 정리하고 그 유해를 지금 노인정 남쪽 기슭에 옮기면서 5기(?)로 줄여서 묘를 만든 것이다. 유해를 버리지 않고 성분(成墳)해 준 것만도 지방 주민들의 정성이다. 묘에 잡초가 우거져도 돌아다 보는 이가 없으니 현지에서는 이를 동학군 무연묘라 통칭한다. 갑오선열들의 구혼은 황천에서 통곡하고 있을 일이다. 알고 보면 백주년은 마치 통한의 백주기를 맞는 기분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경건하고 추모하는 정신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백주년행사가 마치 경축행사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첫째 갑오선열들의 누명을 신원(伸寃)하는 뜻에서 그 역사성(정당성)을 재평가하고 그 위상을 정립하는 문제다. 갑오동학혁명은 구국의 농민항쟁이었으며 그들은 마땅히 역사의 선구자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정신을 선양하는 뜻에서 전적지의 현창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승지에는 기념탑, 패전지에는 위령탑을 세워 그의 상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전적지 가운데 황토현(黃土峴, 정읍)과 우금치(牛禁峙, 공주)에는 기념탑과 위령탑이 각각 세워졌지만 이밖에도 세성산(細成山, 천안), 신예원(新禮院, 예산), 홍성(洪城), 해미(海美, 서산), 황화대(黃華臺, 논산), 원평(김제), 황룡(黃龍, 장성), 광양(光陽), 하동(河東)은 당시 많은 농민군들이 피흘려 싸운 곳이었음에도 지금 현지 주민들조차도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 정도이다. 이런 곳에는 어떤 현창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은 갑오선열들의 후손을 찾아 예우하는 일이다. 그들은 사실 역사의 음지에서 숨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갑오선열들의 처자들은 당시 풍지박산하여 남부여대로 살 곳을 찾아 헤어졌다. 몇 년만에 돌아오기도 하고 이역 타향에서 그냥 머물러 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연고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남아있는 모두 그 3, 4세의 후손들인 것이다. 갑오동학혁명 백주년은 역사의 새 장을 기록하는 역사적인 한 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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