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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 | 특집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
3.1혁명은 위대한 제2의 동학혁명이었다
임형진(2019-03-22 16:47:55)



2019년은 3.1혁명 100주년의 해이다. 많은 면에서 의미 있는 해이지만 여전히 3.1운동은 '혁명'으로 정명(正名)되지도 못한 채 맞이하고 있다. 3.1혁명은 손병희보다는 유관순의 공으로 생각하게 하는 사회분위기 역시 변화되지 않고 있으며 3.1혁명은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 인식도 재고되지 않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무수히 남았지만 100주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100년 전 한반도는 조선독립의 만세소리로 넘쳐 났었다. 1910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국토병탄으로부터 10여년을 인고하던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함성의 무리에서는 신분, 연령, 남녀 차이도 없었고, 이념과 종교도 통합되어 있었다. 분노의 함성소리는 꼭 25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함성이었다. 사람이 하늘같은 세상을 만들고자 들고 일어난 조선 민중들의 염원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로 유일하게 남은 이가 의암 손병희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최고지도자인 전봉준과 함께 북접의 통령으로 혁명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좌절된 혁명과 이어지는 지도부의 체포와 처형 그리고 궤멸되어 가는 동학도들에 손병희는 최고 지도자로서 자신의 부하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괴감에 쌓였을 것이다. 함께 혁명의 선두에 섰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이 처형당했고 급기야 자신이 꼭 지켰어야 했을 스승 해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 역시 함께 체포되고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아니 끝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강제 병탄 이후 절치부심하며 언론과 출판, 교육 등 문화운동을 준비하던 손병희에게 기회가 왔다. 1919년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한반도 전체 인구가 1600만 명이 조금 넘는 상황에서 300만명의 신도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세계1차 대전이 종결되면서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해외의 독립지사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3.1혁명을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혁명은 제 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종단과 정관계 모두에 연락을 하였다. 민족운동에 동참을 호소한 것이다. 관료 츨신 대부분이 회의적으로 동참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침 개신교단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의 방략 모색이 추진되고 있었다. 의기투합된 천도교와 개신교는 함께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웃종단의 참여를 모색하였다. 마침내 불교계가 동참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적 성격으로, 그리고 학생세력과 민중들이 결합한 거대한 민족대연합세력으로서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한 독립만세의 소리는 전국으로, 3월 말에는 만주, 시베리아, 미주 등 해외에서까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케 했다. 그해 5월까지 3개월 동안 총 1,542회의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연인원 205만 명이 참여하였고 시위도중에 피살된 분이 7,709명에 이르렀으며 부상자는 15,961명, 체포된 분들은 46,948명에 이르렀다고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기록해 두었다. 3.1혁명이 5월을 넘어서 근 2년 가까이 지속되었다고 본다면 그 피해상황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20세기 최대의 민중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1919년의 3.1혁명이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와 정신이 거듭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갑오년 동학혁명의 가장 커다란 외침은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이었다. 즉 일본을 물리치고 인권보호와 민생을 돌보는 자주적 독립국가를 완성해 개벽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폐정개혁안에서나 전봉준의 공초 등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독립선언서에도 자주국과 자주민을 선언하고 동양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을 주장함으로써 그 연장선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이러한 인식은 상해의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둘째, 참여자의 연계성이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3,644명을 3․1혁명 관련 독립유공자 4,948명과 연계해서 분석해 보면 적어도 30명 이상이 참여했음이 확인된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 대부분이 처형당하거나 과거 사실은 숨기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오히려 손병희와 박인호, 홍병기, 유태홍 그리고 김구 등 이후의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의 주체로 활약한 점을 고려하면 그 인적 계승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중에서도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로 참여한 15인 중에서 손병희,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이종훈, 박예환, 홍기조, 홍병기 등 9명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접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를 더욱 확신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로 나선 이가 손병희였다는 점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지도자인 손병희에 의해 주도되고 추진된 이 거사는 분명 아직 끝나지 않은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셋째, 혁명의 타도대상이 모두 일본이었다는 점이다.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은 명백히 반봉건과 반외세를 표방하였다. 반봉건은 점철된 조선사회의 모순된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로 갑오개혁과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거나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반외세는 오로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이었다. 일본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탈행위는 우리를 충분히 분노케 했고 결국 척왜를 외치는 단초가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일본의 광폭함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경제적 침탈은 민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일제는 화폐개혁과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조선 농민층을 피폐화시켰고 회사령을 통해 민족자본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 필요하다고 손병희에게 거듭 건의했다.
넷째, 3.1혁명의 3대 원칙은 동학농민혁명 겸험의 결과이다. 손병희에 의하여 전제된 3.1혁명의 3대 원칙인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은 최남선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의 기준이 되었으며 혁명의 전 과정 동안에도 철저하게 지켜진 원칙이었다. 운동의 대중화는 동학도들만이 참여하는 혁명이 아닌 전 민족이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이고 운동의 일원화는 오로지 독립이라는 목표 이외에는 신경 쓰지 말자는 것이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와중에 자치론을 주장하거나 실력양성론 또는 독립청원운동 등과 같이 다른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단일한 선언서가 필요했고 그것이 독립선언서였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은 비폭력이라는 혁명의 방식이었다. 참으로 언어도단과도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비폭력과 무저항이라는 이 방식이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만방에 과시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비폭력 무저항이 그렇게 큰 힘이었고 고귀했는지는 행하는 조선 민중들도 몰랐다. 무저항은 만세운동을 잔인하게 압살하던 일제를 무력감에 빠져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훗날 우리의 3·1혁명 소식을 접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동방의 등불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 빛은 간디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운동으로 이어졌다. 간디는 영국정부의 통치에 비협력, 불복종, 무저항함으로써 영국을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3·1혁명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성인 간디도 없었고, 인도의 자랑스러운 독립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명 3.1혁명은 위대한 제2의 동학혁명이었고 민족해방운동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 민주화 운동의 바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래서 그 정신과 가치는 4.19와 70년대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그리고 오늘의 촛불혁명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다만 동학이 이상하고 있는 진정으로 개벽된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혁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가장 평화로운 방식으로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세상. 그것이 바로 100년 전 아니 125년 전 선배들의 염원이었고 이제 그 염원을 실현시켜야 할 과제를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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