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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 | 특집 [오래된 오늘]
자연의 결을 품은 종이, 곱디고와라
한지 이야기
이동혁(2019-06-18 10:35:06)



청아한 자연의 한 조각을 다소곳이 그 품에 안은 한지. 물 한 방물, 볕 한 조각, 바람 한 줄기, 손끝 하나에 결을 바꿔가는 자연스러움이 정갈하게 녹아 있다.


부드러운 감촉, 단아하고 고운 빛깔, 만져도 보고, 햇볕에 비춰도 본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한지의 맛. 천박하거나 유치한 구석이 조금도 없고, 격조 높은 품격만이 부조처럼 도드라진다. 손끝에 아련하게 남은 그 맑고 투명한 촉감을 언제까지고 음미하고 싶다.


전주한지가 고려시대부터 국내 최상의 자리로 굳혀진 것은 원료인 닥나무의 조달이 용이하고, 종이의 질을 좌우하는 용수가 타 지역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다. 철분이 함유돼 있지 않은 용수는 한지 제조에 더 없이 좋은 토양을 제공했고, 일찍부터 발달한 전주의 학문, 문화, 예술 기반은 한지 수요를 북돋아 전주한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하지만 한지의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와는 달리 한지공예품을 만들기 위해선 지난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얇고 여린 종이를 수백 장 겹쳐 바르고 두들겨 골격을 세운 위에 천연 염색한 한지로 문양과 무늬를 새겨 넣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우리 조상은 그 고됨을 마다하지 않고 한지로 멋스러운 세간을 만들어 사용했다. 오늘날의 한지공예품은 그 지혜와 멋을 되살린 것, 자연을 닮은 알록달록 고운 색과 부드러운 감촉의 한지공예품은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명품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전북 한지공예 1세대이자 지역에 한지공예의 씨앗을 뿌린 김혜미자 명인(전라북도 무형문화재 60호 색지장)은 한지와의 첫 만남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지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어느 누구도 한지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한지공예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 시절, 김 명인은 매주 한 차례씩 먼 타지를 오가며 여러 한지공예 기법을 배웠다. 그 배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 전화 요금이 밀려 가산금을 낼 때에도 수업료만은 항상 따로 빼 두었다. 그렇게 다양한 기법을 섭렵한 김 명인은 그만의 특별한 개성이 담긴 작품들을 하나씩 발표하며 한지공예품의 멋을 알려 왔고, 지난 2007년에는 한지로 국새받침을 완벽히 복원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 명인이 한지공예품 작업에 매진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전통예술이자 아름다운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은 질박함과 편안함, 그리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화려함, 한지의 멋은 그 은은하고 푸근한 자태에 있다. 마치 우리 이웃들의 삶처럼 친숙하고 이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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