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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 | 특집 [기고]
시대를 앞서 간 신여성
파리 근교 프랑스 가정집에서 머문 나혜석
한경미(2020-02-10 16:45:49)



“이 집은 파리 상라자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간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하고 하는 곳에 있다 . 시외니 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있고 우거진 수풀 , 엉켜 오르는 덩굴 , 작약화 , 월계화 , 등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는 채소밭이 있어 딸기 , 감자 , 상추 , 파 , 콩이 심겨 있다 . 또 한편 마당에는 토끼 , 비둘기 , 밀봉 ( 꿀벌 ) 을 기른다 . 그리하여 꽃 꺾어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뜯어 반찬하고 가축 잡아 공물로 쓴다 . 외형 차림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 ”


이 글은 나혜석이 1936 년 4월 ‘삼천리’ 잡지에 쓴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 나혜석은 1927 년 7월 19일에 남편과 같이 파리에 도착해 1928 년 9월 17일까지 파리에 머문다. 변호사였다가 당시 일본 정부의 총독부 관리였던 남편 김우영은 중국의 외지에서 5년간 근무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해외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 당시 이미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 셋을 둔 32 세의 젊은 엄마였던 나혜석은 자식들을 나이 드신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용감하게 남편을 따라나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 평생 세계 여행이 꿈이었던 나혜석은 한 술 더 떠서 이 기회를 이용해 자비를 보태서라도 이 여행을 연장해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싶어 했다 . 결국 당시 2만 원이라는 전 재산을 털어 나혜석 부부는 1년 2개월 동안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돌아보게 된다. 나혜석 부부가 중국에서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소련을 거쳐 파리 북역에 도착한 날은 1927 년 7월 19일. 기차역에는 이종우, 안재학, 최근우 등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혜석 부부는 이들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우선 소르본느 근처의 작은 호텔에 여정을 풀고 파리 생활을 시작한다. 파리는 이들에게 일종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


“파리라면 누구든지 화려한 곳으로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 처음 도착할 때는 누구든지 예상이 빗나간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일기가 어두침침한 것과 여자의 의복이 흑색을 많 이 사용한 것을 볼 때 첫인상은 화려한 파리라기보다 음침한 파리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은 오래오래 두고 보아야 파리의 화려 한 것을 조금치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 ” (나혜석 평전, 정규웅 저, p180)


여독을 풀고 일주일이 지난 7월 27일 나혜석 부부는 스위스 제네 바에서 열리는 영미일 간의 군축회의에 참관하러 떠나고 그 주위 의 안시 (Annecy), 융프라우 , 베른느 등을 구경한 후 8월 14일 파리 에 돌아온다. 8월 24일 다시 브뤼셀로 떠나 다음날 브뤼셀 구경을 하고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가서 이준 열사의 묘를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해 9월 , 남편 김우영이 베를린으로 법률 공부하러 떠날 때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다. 파리에 혼자 남기를 선택한 그녀 는 아카데미 랑송 (Académie Ranson) 과 비시에르 화실 (Atelier Bissière) 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 당시 파리 화단에서는 중장년층의 피카소 , 브라크 , 마티스 등이 군림하고 있었다 .

나혜석은 틈나는 대로 당시 10 여 명이었던 파리의 조선 유학생들 과 어울렸는데 10월 어느 날 , 파리 유학생들이 새로 도착한 최린을 위해 이종우의 집에서 환영식을 개최했다 . 거기서 나혜석과 최린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삼일운동 을 주도한 33 인의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일본의 경비 지원으로 유럽을 시찰하기 위해 파리에 들렀다. 최린은 김우영과 잘 아는 사이였고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김우영이 최린에게 나혜석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 했다는 설도 있다.

그 해 11월 11일, 나혜석과 최린은 파리 근 교 르베지네 (Le Vésinet) 에 살고 있는 샬 레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펠리시엥 샬레 (Félicien Challaye) 는 1919 년 4월에 한국을 방문해 삼일운동의 여파와 흔적을 현장에서 직접 보았던 드문 서양인 중의 하나로 당시 약소국민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최린이 12월 9일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참가하여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샬레가 주관해 준 덕이다 . 나혜석이 샬레 부부에게 프랑스 가정집에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하자 자기네 집에서 살자고 제안해서 나혜석은 이후 이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이 집 가족은 50 여 세 된 샬레 씨, 40 여 세 된 부인, 18 세, 16 세 된 딸, 7 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 씨가 여행 중에 수집 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 층 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 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 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


이후 나혜석과 최린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최린의 통역을 맡았던 공진항과 함께 셋 이서 물랭루즈와 활동사진관 고몽 팔레를 구경 가고 루브르 박물관 좌우에 우거진 삼림 사이를 거쳐 클뤼니 박물관까지 산책한다. 일요일에는 밀리는 군중 사이에 끼어 루브르 미술관을 찾아가고 봉 마 르쉐 백화점을 구경 가는가 하면 휴일에 는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를 찾아간다. 이 들의 밀회 아닌 밀회가 하도 유명해서 당시 유학생들에게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으로 통했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는 최린이 12월 16일경에 이태리로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 나혜석도 며칠 후인 12월 20일, 연말을 남편과 같이 보내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내 생활이 걸작이 되고 싶다”는 나혜석은 이 관계로 인해 3년 후인 1930년에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4 년 후인 1934 년 8 월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한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 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 … )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 (삼천리 1934. 8-9)


이혼을 당한 후 심적 ,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 나혜석은 최린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최린은 파리에서의 최린이 아니었다.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는 최린에게 나혜석은 1934 년 9월 20일자 조선일보에 공식적으로 소송을 걸면서 자신의 정조를 유린한 이유로 이혼을 당했으니 위자료 1만 2천원을 청구한다는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켰다 . 이로써 나혜석은 페미니스트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당시 조선사회는 오히려 나혜석을 매도함으로써 나혜석을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만든다.


샬레 가족과 같이 찍은 나혜석 사진 발견

지난해 봄에 기자는 한국에서 온 한겨레신문 기자를 동반하여 샬레의 외손녀 되는 분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남부 발 랑스 (Valence) 에 사시는 안느 마쥐레 (Anne Mazuray 81 세 )는 샬 레의 둘째 딸 엘렌의 딸로 어렸을 때 샬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사실 샬레의 부인 잔느는 샬레와는 두 번째 결혼으로 전남편 사이에서 얻은 딸이 엘렌 (Hélène) 이므로 안느에게는 샬레가 친할아버지는 아니다. 할아버지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 얘기 등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안느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사진첩을 들고 나왔다. 혹시라도 나혜석 사진이 들어있을까 해서 1927~28 년도 사진첩을 뒤지고 있는데 와 , 나혜석 사진이 4장 들어있는 게 아닌가 ?



앞줄 왼쪽부터 김우영, 인도인, 서영해, 안고 있는 아이는 샬레와 잔느 사이에 난 아들 장 Jean, 뒷줄 왼쪽부터 쟈클린 Jacqueline(큰딸), 잔느 Jeanne(샬레부인), 나혜석, 엘렌 Hélè ne(둘째딸), 샬레


1928 년 4월 2일로 표시된 사진은 샬레 집 앞 계단에서 샬레 가족 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나혜석과 김우영이 보이고 또 의외로 서영해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첩에는 나혜석 부부를 Mr et Mme Kim (Coréens) 으로 적어놓았고 인도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서영해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듯했다. 단발머리 모습의 나혜석은 개량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10.5 × 6 과 8 × 5.5 의 작은 사이즈의 흑백사진은 오래되어서 선명도 가 많이 떨어졌으나 거의 유학생처럼 살았던 당시 파리에서의 나혜 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80이 넘은 샬레 손녀 분이 갖고 있는 나혜석 사진이 생각났다 . 이 손녀가 사망하고 나면 아들이 하나 있긴 해도 이 귀한 사진이 이러 저리 흩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이 사진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손녀분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 혹시 나혜석 사진을 기증하시던가 파실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타진하니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 며칠이 지난 후 연락이 왔다 . 이 사진이 누군 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자기도 좋다며 흔쾌하게 기증하시겠다고 한다 . 결국 기자 는 지난 11월 초에 파리에서 이 사진을 받 았다 . 사진은 나혜석 기념사업회에 기증할 예정이고 , 올 4월 28일 나혜석 출생일에 맞추어 해마다 진행되는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에 손녀분이 초대되도록 중간 역할을 할 예정이다.



한경미 자유기고가는 1989년 10월 도불하여 현재 프랑스에서 30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 한국외대 불어과 졸업 후 프랑스 사부아 대학 에서 불문학 석사,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준비 과정을 마쳤다. 한국문예진흥원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으며 극작가 이강백의 희곡 ‘미 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와 ‘족보’, 주요섭 단편선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을 번역, 출판했다.

첫 단편 영화 (다큐 픽션) ‘파리에서의 나혜석’이 파리와 나혜석 기념재단에서 행하는 나혜석 탄생기념 심포지엄에서 상영되었으며, 두 번째 단편 ‘Sans pr é nom(이름 없이 사는 한국 여자)’가 파리 셍앙드레 데 자르 영화관과 파리 7대학에서 상영, 여섯 번째 한불 커플 이야기를 다룬 중편 다큐 ‘잉꼬부부’가 프랑스 브줄(Vesoul) 아시아 영화제와 투르(Tours) 아시아 영화제에 선정되었다. 최근 중펀 다큐 ‘망명 간 호랑이’가 2020년 투르(Tours) 아시아 영화제에 선정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지엔느로 산 경험을 바탕으로 오마이뉴스, Cultura, 경향신문, 교통방송 등에서 번역가, 자유기고가, 통신원 등으 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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