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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 | 특집 [윤지용의 시칠리아 여행기]
토토와 돈 꼴리오네와 말레나가 살았던 그곳
윤지용 편집위원(2022-08-10 14:20:54)



윤지용의 시칠리아 여행기

토토와 돈 꼴리오네와 

말레나가 살았던 그곳


윤지용 편집위원







시칠리아에 다녀왔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발이 묶인 이래 3년 만의 첫 여행지로 시칠리아를 고른 것은 영화들 때문이었다. 열 번도 넘게 본 나의 ‘인생영화’ <시네마 천국>,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 전쟁의 와중에 기구했지만 당당했던 여인 <말레나> 이런 영화들의 배경이 모두 시칠리아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은 ‘영화순례’였다.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섬


시칠리아(Sicilia)는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반도 남서쪽에 있는 섬이다. 장화의 앞꿈치에 걸린 돌부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쪽으로는 티레니아해, 동쪽으로는 이오니아해, 남쪽과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다. 물론 이 모든 바다들이 넓은 의미의 지중해다. 제주도보다 열네 배 넓고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정도 면적으로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섬 북동쪽의 에트나산은 최근에도 분화한 적이 있는 활화산이다.

시칠리아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주도인 팔레르모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카타니아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나폴리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놀랍게도, 로마의 테르미니역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로마에서 출발해 7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기차를 두 토막으로 나눠서 배에 싣고 메시나 해협을 건넌 후 기차를 다시 연결해서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들까지 운행한다.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 사이에 있는 메시나 해협의 폭이 2킬로미터가 채 안 되니 다리를 놓을 법도 하지만, 지진의 위험이나 강풍 때문에 여의치 않다고 한다. 기차를 탄 채 바다를 건너는 진기한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비행기로 갔다. 최대한 값싼 경유 항공권을 산 탓에 안 그래도 먼 길을 돌아 로마까지 가는데 다시 또 열 시간 가깝게 기차를 타는 것은 무리였다.



다양한 문명을 품은 땅


지중해의 한 가운데에 있고 가장 큰 섬이니 예로부터 해상교역의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모양이다. 땅도 비옥해서 농사짓기에 좋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나 탐내는 섬이었다. 고대 그리스부터 카르타고, 로마, 아랍과 노르만족까지 다양한 세력들이 이 땅을 침략하고 지배했다. 기원전 8세기에 이오니아해를 건너온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수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기원전 3세기에 카르타고와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었던 포에니전쟁이 시작된 곳도 시칠리아였다. 어떤 세력은 거쳐갔고 어떤 세력은 눌러앉았다. 당연히 다양한 문명의 흔적이 섬 곳곳에 배어 있다. 도시 한복판 길거리에 그리스와 로마가 세운 신전들과 반원형극장, 원형경기장의 유적들이 있을 정도다. 성당들은 비잔틴 양식과 아랍 양식, 노르만 양식,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뒤섞여 있다.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지역들 중에 오늘날에도 부유하고 번성한 곳은 드물다. 시칠리아도 그렇다. 이탈리아의 평균 국민소득에 한참 밑도는 낙후된 지역이 돼버렸다. 근대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신대륙으로 떠나갔다. 영화 <대부> 시리즈의 주인공들인 마피아도 본래 시칠리아 사람들이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돈 꼴리오네’가 이끈 꼴리오네 가문은 실제 시칠리아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바닷가 절벽 위의 타오르미나


비행기로 도착한 카타니아에서 이틀을 묵으면서 타오르미나에 다녀왔다. 카타니아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쯤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면 이오니아해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타오르미나가 있다. 2,800년 전에 그리스인들이 만든 도시다.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오래된 작은 성당과 아담한 광장과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있는 곳이다. 타오르미나는 1990년대 프랑스 영화 <그랑블루>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마을 옆 언덕 위에는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지은 반원형극장도 있다.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도 그렇고 객석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절경이다.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에 산꼭대기에 이런 걸 만들었다는 게 놀랍다. 지금도 이 극장에서 음악회나 뮤지컬 공연이 열린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돌계단으로 된 객석들에 좌석번호를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2,300년 전에 지은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몹시 신기한 일이지만, 이탈리아에는 이렇게 고대극장을 활용하는 곳들이 생각보다 많다.



팔라쵸 아드리아노와 체팔루


영화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마을 이름은 ‘지안칼도(Giancaldo)’다. 실제 존재하는 마을은 아니고 영화를 촬영한 곳은 ‘팔라쵸 아드리아노’라는 곳이다. 팔레르모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산골 마을이다. 버스가 하루에 네 번밖에 안 다녀서 아침 여섯 시 반 차를 탔다. 전날 미리 버스표를 사두어야 했는데, 팔레르모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는 그곳에 가는 버스표를 팔지도 않길래 물어물어 찾아가 표를 산 곳은 어느 문방구였다. 그만큼 외진 시골이다.

사실 팔라쵸 아드리아노는 시네마천국의 촬영지라는 것을 빼고는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고 할 거리도 없었다. 그런 줄 알고 갔었다. 영화에 나오는 동네 광장과 분수대, 골목길을 둘러보러 간 것이었다. 분수대에서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마셔보고 ‘알베르토 아저씨가 극장에 못 들어온 동네 사람들을 위해 영사기 빛을 나눠주었던 벽이 바로 저 건물인 것 같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요샛말로 하면 ‘덕질’이다.

꼬마 주인공 토토 역을 맡았던 살바토레 카스치오는 실제로 이 마을에 살던 아이였고,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 구글 번역기를 동원해서 물어물어 그가 운영한다는 수퍼마켓에 찾아갔다. 살바토레 카스치오는 아직 안 나와서 못 만나고 그가 쓴 책 한 권을 샀다.

청년이 된 영사기사 토토가 여름철 특별 야외상영을 했던 바닷가 마을은 체팔루다. 팔레르모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걸리는 곳이니 팔라쵸 아드리아노와는 한참 떨어진 곳인데, 영화에서는 같은 동네처럼 나온다. 소나기가 와서 상영이 중단된 밤에 엘레나가 찾아와 뜨거운 키스를 했던 해변, 알베르토 아저씨가 토토와 산책하면서 고향을 떠나 큰물로 나가라고 종용했던 곳, 30년 후 토토와 엘레나가 다시 만나 엇갈린 사랑에 눈물 흘리는 방파제도 바로 그곳이다.



산타루치아와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


시라쿠사도 역시 기원전 8세기 무렵에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다. 지중해 해상무역으로 크게 번성해서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에 버금가게 부강했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가 침공했을 때,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오목거울(돋보기 반사경)로 로마군의 배를 불태우면서 항전했다. 그러나 결국 시라쿠사는 함락되었고 아르키메데스도 로마군의 손에 죽었다. 시라쿠사 시내에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동상은 오목거울 모형을 들고 있고 동상 아래쪽에 그 유명한 ‘유레카’가 새겨져 있다.

영화 <말레나>에서 주인공 말레나(모니카 벨루치)가 뭇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과 동네 아줌마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면서 꼿꼿하게 걷던 그곳이 시라쿠사의 두오모 광장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주교가 있는 주교좌성당, 대성당(cathedral)을 ‘두오모(Duomo)’라고 부른다. 어느 지역이나 대성당 앞 광장은 그 지역사회의 중심이다. 시라쿠사 대성당은 기원전 7세기에 그리스인들이 만든 아테나 신전의 토대와 기둥을 그대로 활용해서 지어졌다.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7세기에 대지진으로 무너진 후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었는데 여전히 그리스 신전의 돌기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성당 자체도 아름답지만, 대성당 앞 광장 바닥에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장관이다. 시라쿠사 대성당은 성녀 루치아를 모신 성당이다. 모두가 아는 노래 ‘산타루치아’의 주인공 성년 루치아가 이곳 출신이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아직 불법이던 시절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힘들었던 귀국길


여행 후반부에는 귀국길이 걱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탈리아에 입국할 때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는데, 돌아올 때는 우리 방역당국에서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요구한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는 PCR 검사 이외에 신속항원검사도 인정되지만, 그걸 어디 가서 받아야 할지 막막했다. 미리 받아놓을 수도 없다. 귀국 비행기 타기 바로 전날 받아야 유효하다. 다음날 비행기 타야 하는데 갑자기 양성 판정이 나오면 말 그대로 ‘폭망’이다. 비행기표를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예정했던 날짜에 돌아오지 못하니 모든 게 꼬인다. 그러니 검사받기 전까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일주일 동안 시칠리아 곳곳을 둘러본 후 공항이 있는 카타니아로 돌아가 마지막 하루를 지냈다. 구글 검색으로 카타니아 시내에서 신속항원검사서를 발급해주는 약국을 찾아서 검사를 받았다. 나는 코로나19가 창궐한 이래 지난 2년 반 동안 콧구멍 한번 쑤신 적 없었는데, 남의 나라에서 처음 검사를 받아봤다. 다행히 우리 부부 모두 음성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카타니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 번씩 환승하면서 서른 시간 걸려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시네마천국’을 순례했으니,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는 해결한 셈이다.

(나야 처음부터 영화순례가 목적이었지만,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풍광과 역사기행만으로도 멋진 여행지다. 지면의 제약 탓에 소개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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