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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 | 특집 [벗에게 시간을 묻다]
옹기장이 이현배와 시인 박형진이 주고받는 손편지 20
박형진, 이현배(2022-09-14 11:05:42)




손내골 현배 선생님!



여름 장마가 대강 지나간다 싶더니 입추 지나자마자 가을장마가 와서 여러 날 비가 오는군요. 광복절연휴가 이번 여름의 막바지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비려니 했는데 날씨 하는 걸로 보아 저희 동네 해수욕장이 많이 한산하고, 폐장 분위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해년마다 광복절을 앞뒤로 여름 풍경이 바뀌는 것은 말복이 이 무렵이기도 하려니와 선선한 바람이 난다는 처서가 코앞에 다가오기 때문인데 하물며 비까지 오는데서야...


어쨌던지 올 여름도 이렇게 끝이 보입니다. 이 비 후에는 설사 늦더위가 온다 하여도 겁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시에 사는 분들은 빨리 선선해지기를 바라겠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논밭에서 작물의 자라는 정도에 따라 이것저것 맞추어 일하다 보면 더위따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고개들어 보면 벌써 다른 세상입니다. 그러니 날씨 붙들고 연연하지 않지요. 오직 시간의 무상함을 마음에 새길 뿐입니다. 어제 무심히 지나쳤던 것도 하룻밤이 지나면 특별한 그 무엇이 되고 그 또한 내일이 되면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다반사이지 않던가요?


지난번 편지 말미에 여행이야기를 조금 해본다 했는데 그 마음 또한 여일하지 못하고 불과 한달 사이에 낡고 낡아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하여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원두막을 하나 지어서 밭둑에 서 있는 커다란 감나무 밑에 들어다 놨습니다. 원두막이라고는 해도 제가 참외, 수박 농사를 하지 않으니 원두막이라기 그렇고 모정이라 하자니 가볍게 이리저리 옮길 수 있으니 그 또한 맞는 말이 아닌 듯 합니다. 정확하게는 조금 운치 없지만 멧돼지, 고라니 쫓는 파수막이라고 해야겠어요. 지난 겨울에 산에서 곧은 소나무 몇 개 베어서 껍질을 벗겨 말려 뒀다가 여름 전에 톱으로 자르고 자귀로 깎고 그냥 망치로 못 푸덕푸덕 박아서 한 평 남짓되게 지은 것입니다. 지붕까지 덮는데 놀명쉬명했더니 한 사흘 걸렸습니다. 술 좋아하는 제가 그것도 집이라고 지어놓고 낙성연을 하자고 친구들을 불러서 거하게 한나절 놀고 먹기까지 했는데요. 그 후론 밤마다 저 혼자만의 성이 되었습니다.


저는 본디 초저녁 잠이 많고 첫 닭 울이 한 두 시간 전부터는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데 거기다가 잠귀가 얇아서 TV 드라마를 즐기는 마누라와는 어느 것 한가지를 빼고는 여름 내내 별거아닌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파수막이면서 저의 별궁인 셈이지요. 그곳에서 저는 밤마다 참 오롯했습니다. 처음 며칠은 잘려고 누우면 주변에서 들리는 야생의 여러 소리들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든 잠도 깨기 일쑤였습니다. 감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나 풀벌레, 소짹새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야 잠을 불러오는 것이지만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지 싶은 멧돼지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부터 밤부엉이 우는 소리, 들쥐의 바스락 대는 소리, 툭툭 감 떨어지는 소리, 멀리서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의 소리따위... 조용한 밤이기에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들이 여과없이 들려와서 깊은 잠을 자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그것이 차츰 익숙해지면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멧돼지, 고라니 이놈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오히려 밤에 활동하는 많은 생물들의 방해꾼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밤을 즐기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닫힌 방안의 선풍기 바람이 아니라 사방이 툭툭 트인 원두막, 아니 파수막의 모기장 안에서 살랑대는 바람을 맨 살갗에 느끼며 일부러 불을 끌어오지 않고 초저녁의 어둠에서 새벽의 여명까지 그 빛의 스펙트럼을 바라보는 것은 또다른 감흥이었지요. 그리고 올려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밤하늘의 별자리들, 그것이 낯선 것도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웬지 이제 처음으로 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느껴보는 것 같아서 밤에 여러번 깨어 일어나는 것조차 기분 좋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멧돼지가 한 번 왔다가고 발자욱으로 보아 고라니도 두어번 다녀가셨는데 제 고구마 밭과 옥수수와 콩은 아직은 무탈입니다. 마을엔 이것들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데요. 해마다 평상이 됐던 맨땅이 됐던 여름이 되면 이들을 지키느라 한뎃잠을 잤지만 비오는 날엔 속수무책이었는데 파수막의 깊숙한 처마덕에 비오는 날 한뎃잠이 되려 정취가 그윽해서 이놈들은 나를 원망할게 뻔하고 마누라 또한 독수공방, 고시랑거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려.


이렇게 제가 여름밤을 즐기는 사이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지만 이 불가항력의 시간의 흐름 앞에 서니 생생하기만 했던 어제 일들도 왜 이리 아스라이 먼 옛날처럼만 생각되는지 원! 하여 다시 일 좀 부지런히 해놓고 배낭꾸려매고 나가서 낯선 곳을 헤매고 싶을 뿐입니다. 멧돼지 고라니가 오거나 말거나…


이러면 제가 속에 헛바람이 조금 든거지요? 요즈음은 백중지절입니다. 백가지 과일과 채소가 나는 풍성한 날들의 한가운데라 했듯이 장미구름 속에 숨어 살을 찌워가던 달이 오늘 저녁 맑게 개인 하늘에 보름달로 떴습니다. 슈퍼문이라고 하더니 과연 여늬 달보다 크고 이쁘군요. 산위로 솟아오르는 달을 한 번 보십시오. 저도 또 보겠습니다. 그럼 평안하십시오. 시 한 편 보냅니다.


2022.08.13. 박형진 드림




백중


백중이란다 오늘이

백가지 과일과 채소가

익어가는 날들의 한가운데라지

늦장마 구름 뒤에 숨어서

화장하던 보름달이

숫색시처럼 얼글을 내밀고

텃밭 여기저기

누래지는 호박처럼 누워서 나는

술 먹은 배를 두드렸다


달에서 둥둥 북소리가 났다


당산나무 아래

자지러지는 농악소리 따라

빙글빙글 상모가 돌고

수로타고 밤새 물이 돌아 들어갔다

뭇별들이 함초롬 내려앉는 새벽

벼들도 서로 시새우며 킬킬대며

이삭들을 여물리겠지


눈까풀사이로 가만히가만히

달이 빠져 나간다






모항 박형진 시인께



이른 아침이었는데 같이 봐야할 동영상이 있다고 합니다. ‘정리 전문가’라는 분이 진행하는 ‘정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대략 난감했습니다. 그렇다고 정리할 이현배가 아니고, 또 정리하라는 소릴 안할 최봉희가 아니라는 걸 서로 잘 알면서. 또.


아무튼 아내는 은혜를 받았는지 정리를 하기 시작했고 책이 서너 박스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황룡사 발굴조사보고서I] (1984, 문화재관리국)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책이 [빗살무늬토기의 추억](1995, 김훈, 문학동네)입니다. 


[황룡사 발굴조사보고서I]는 뿌리깊은나무 1980년 2월호 예용해선생의 민중의 유산 <장독대>에서 ‘물증으로 남은 것 중에는 통일 신라의 절인 황룡사 터에서 지난해에 발굴된 장독대 터와 토기장독들이 지금까지로는 가장 나이먹은 것이다’라는 것에서 장독대와 토기장독을 글로 발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얼마 전에 완주문화재연구소분들과 고창 초기청자가마터 발굴현장을 다녀오면서 삼례 책마을 헌책방에서 높은 자리에 꽂혀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감시간을 넘겼던 때라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여러 날  다녀올 짬이 안나 택배로 구하게 되었습니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책을 좋아하던 친구부부가 책방을 운영할 때 사서 본 책인데 화재로 잃었더랬습니다. 같은 책을 두 번 사는 거, 또 불을 다룬다고 하면서 불을 낸 옹기장이로의 아이러니에 여러 해 망설여 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달 [문화저널] ‘이휘현의 숨은 좋은 책’ ‘불 앞에 선 인간, 그 처절함에 대하여’를 보고 다시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워/먹/은 책’을 통해 ‘화/재/화/된/불’을 마주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봐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발아율이 낮을수록 씨를 많이 맺듯, 언제가는 알아지리라 자꾸 보게 됩니다. 오래 전 일인데 아내의 은사께서 당신의 책 일체를 물려주시겠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독일로 광부로(파독광부) 가셨다가 미술사를 공부하신 분이니 그야말로 책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마침 제안받은 특정 주제 공부를 상의드렸다가 ‘지적 허영’이라고 만류하셨고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책을 물려주면 그 책에 묻힐 거라고 생각하셨던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제발 도서관에서 빌려 보라는 말에 오늘 한 권 빌려봤지만 [밥은 먹고 다니느냐는 말] (2021, 정은정, 한티재) 역시 손에 잘 안잡힙니다. 일단 책이 앵기면 앞뒤 표지를 꺾어야 하는데 공공재를 그러면 안되는 것이니 얼른 놓게 됩니다. 표지를 꺾게 된 것은 책을 오래 못보고, 또 어려운 문장은 필사를 하는 버릇이 있어 필기구를 끼워놓기에 제본한 것이 떨어져싸서 생긴 버릇입니다. 그러니 소위 하드커버라고 하는 딱딱한 표지는 아주 웬수입니다. 그래 그런 책은 아예 거죽을 벗겨 속심을 덜어내고 필기구를 수용할 수 있게 부들부들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책을 봐야겠다’고 하면서부터 ‘한 번만 보면 될 책은 아예 보지 말자’고 하고 보니 ‘봐야 할 책은 사서 본다’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정보를 얻자는 것이 아니니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거의 헌책을 사보기에 큰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게 됩니다. 


요 며칠 여름의 끝에서 지난 여름을 추억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분들을 그릇만들기로 만난 것이 소중했습니다. 옹기점이 궁금하다던 지역문화유산동아리분들, 결석을 하도 많이 해서 생소해진 드립커피봉사단원들, 옹기몸흙이 나는 평지마을부녀회분들, 마을굿과 초기청자가마터가 있는 중평마을분들이셨습니다. 특히나 그릇을 처음 만들어 본다는 어머니들의 솜씨와 그 솜씨를 내는 살이의 축적,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그 그릇들에 지난 여름이 담겨 보기가 좋습니다. 


진안은 고원입니다. 


하여 유리문 안쪽으로 창호지문을 뒀더랬습니다. 한여름에도 창호지문은 닫고자야 한답니다. 창을 서쪽으로 크게 둔 탓에 창호지가 잘 삭습니다. 구멍이 크게 났는데 이 여름에는 그래도 된다고 하면서 그냥 뒀더랬습니다.


이제 

창호지문을 발라야겠습니다.

제가 할 일입니다.


2022. 08. 18

옹기장이 이현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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