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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 특집 [특집]
소설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우한용(2004-01-27 11:50:52)

1. 소설이 곧 허구하는 통념 
우리 주변에는 소설이 곧 허구라는 통념이 널리 돼져 있다. 소설에서 허구가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지 그 기능이 무엇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소설 곧 허구라고 해 버리는 것은 소설의 이해를 위해 도용이 되지 않는다. 양우리들의 실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우리들은 누구나 우리 자신의 슬픔이나 환희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적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눈물은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가장 자연스런 방식이다. 나 자신의 감정으로 인하여 흐르는 눈물이라면 그것을 수상히 여기거나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슬픔이나 환희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물론, 작품을 통해 남의 경험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울어서 눈이 충혈된 것을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나머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영화관에 남아있다가 나온 경험도 혹간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그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점은 연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연극이나 영화는 거기 실제적인 이미지를 주는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내용에 따라 눈물에 감염되기 쉬울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과 너무 닮은 인생살이가 거기 펼쳐지기 때문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 그 내용이나 작품의 예술성과는 관계없이 계속 팔리는 이유는 그 영화의 최루작용 때문일 것이다. 꼭 눈물이 아니더라도 작품은 어떠한 감동을 촉발해 준다. 그러한 감동을 위해 우리는 극장 표를 사고 영화관 앞에서 지루한 시간을 기다린다.
영화나 연극의 경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다면 감정의 과잉이나 자제력이 모자라는 숙맥의 짓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소설을 읽으면서 밤을 새워 본 경험이 없는 자, 소설을 읽다가 눈물을 닦은 경험이 없는 자, 문학적으로 행복한 이들이 아니다. 감수성의 고갈이거나 아니면 그런 감동적인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로맹룰량의 〈장 크리스토프〉를 읽으면서 몇 차롄가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인생의 위대한 성공을 위해서는 거대한 강의 흐름처럼 작은 물줄기를 부단히 모아 가는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마지막 일절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한 기억에 앞서는 것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이루어지는 사랑과 혹독한 시련을 던져내고 마침내 위대한 음악가가 되는 주인공의 성장과정이다. 그것이 외국 작품이라든지 낭만주의적인 성향의 소설이라든지 하는 것은 뒤에 배워서 안 지식이니까 작품에서 받은 감동에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다만 그 작품을 읽으면서 사내녀석이 질질 울었다는 사실 그것만이 우리들의 주제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울음은 따져서 우는 것이 아니라 실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물론 모든 소설이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사실을 계속 환기하는 서사극이 있는가 하면, 지독히 사변적이고 논리가 복잡하여 가닥을 잡아내기 어렵게 전개되는 소설이 있기도 하다. 그런 소설은 눈물은 고사하고 혐오감마저 자아낸다. 그 혐오감 자체가 소설의 주제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아무튼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그러한 경험의 근거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소설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심리적인 메카니즘에 근거가 놓이는 것이다. 소설의 작중현실과 우리들 삶의 현실을 동일시하는 그러한 경우, 작중현실이 사실인지 아닌지 현실 실재인지 허구인지 하는 분간을 일단 떠나거나 뒤로 미루게 된다. 우리들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작가에게 우선적으로 어떤 신뢰를 부여한다. 작가가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표지에서부터 ‘소설’이란 이름을 달아 강조한다고 해도 독자는 작가의 직접적인 발언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를 원고 눈물을 흘린다든지 흥분하는 것은 치사한 짓이라는 방어기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혹은 알면서도 속는 그런 어리석음을 스스로 만들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구축하려는 의지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하는 행동이 의미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성향이 있다. L.골드만이 인간의 행위는 유의미적인 의미회답이라는 명제를 자신의 학문적인 방법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음미할 만한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작가가 혹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나 명론가 들이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독자들의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끈질긴 고집에 감동의 연원을 두고 있는것이다. 허구를 사실로 인식하는 것은 일단은 독자의 역량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거기서 소설 내적인 텍스트와 소설외적인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구의 양식인 소설을 사실로 환원하여 받아들이는 데는 문학 본래적인 의미에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영광 원자력발전소를 배경으로 하여 핵오염의 문제를 소설로 쓴 적이 있다. 그 작품이 〈현대문학〉 89년 6월 호에〈불바람〉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불바람〉을 쓰게 된 동기 혹은 소설형성의 과정은 대강 이러하다. 영광지역에 대한 나의 관심을 촉발하기 시작한 것은 그곳의 밥값이 턱없이 비싸다는 데서였다. 작가 박화성에 대한 취재 차 영광에 들렀다가 그 유명한 ‘굴비 백반’을 먹고 싶었는데, 한 상에 I만원은 주어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출장비는 한 끼에1500원 찌리 된장찌개나 먹을 수 있는 그런 형편에서 한 상에 1만원을 내야 한다는 데에 배알이 툴려 그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해산물과 생활필수품인 소금, 땔감, 농산물이 풍부하고 그 맛이 이름난 영광의 음식값이 이렇게 비싼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한 상에 1만원하는 굴비백반을 먹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가마미 해수욕장에 바람을 씌러 간 적이 있었다. 혜수욕장을 가로막은 방파제와 그 너머로 뚜렷이 솟아오른 원자로 차폐돔은 우리의 산업발전과 현대과학을 상징하는 위용이었다. 그러나 모래밭 뿔뿔대고 기어다니는 게들을 쳐다 보면서는 다리하나가 빠져나가거나 등어리가 물컹거리는 것은 없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막연하나마 방사능 오염의 가능성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 날도 한 상에 1만원 하는 굴비백반은 먹지 못하고 돌아왔다. 밥값이 그렇게 비싸진 것은 물가가 올라간 데에도 원인이 있지 만원전이 들어서면서 올라간 물가가 내리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전 자체보다는 지역 주민의 달라진 생활에 관심이 갔다. 얼마 후 원불교학생회 주최로, ‘원전과연 안전한가’하는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고, 전남지역 대학총장들이 영광원전 3, 4호기 건설반대 성명을 낸 적이 있었다. 그 무렵은 고리 원자력발전소의 폐기물 불법처리로 온통 뒤숭숭하던 무렵이었다. 원자력의 이용이 우리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자력 그 제3의 불이 인간을 용정하는 불바람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일었다. 원전의 안전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원자력이용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점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다룰 것이고, 소설가는 그러한 시설이 들어섬으로 해서 깨어지는 지역 주민들의 삶의 리듬과 윤리적인 황폐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원전측과 주민들의 심정적인 부조화, 소문이 몰고오는 감정상의 괴리감, 그 확률이 1백만 분의 하나라도 사고가 생겼을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을 수 있고 그것은 인간에게 신화적인 상정성을 띤 응징이 될 수있 다는 것 등을 소설의 내용으로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무뇌아의 사산이 문제되기 이전이었다. 〈불바람〉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제법 높은 편이기도 해서 아예 처음 나오는 창작집에 〈불바람〉이란 제목을 달았다.〈불바람〉의 현장에를 가보자는 소설가 유기수박사의 호의로 원자력발전소를 방문하였을 때였다. 그 곳 홍보과 직원 한 분의 말씀으로는 〈불바람〉은‘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소설은 소설일 따름이지 않느냐면서 웃고 말았다. 그 둬 며칠 안되어 원전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김아무개씨의 무뇌아 사산이 보도되자 원전 이야기를 쓴〈불바람〉이 마치 예언의 힘이라도 지닌 것처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기회에 원전에 들를 일이 있었을 때, 작중 인물의 하나로 설정된-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가능성이 충분하지만-분께서는, 약간 서운한 듯한 표정으로, 대학교수이면서 소설을 쓰는 분의 이야기는 그것을 소설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원전의 위험에 대한 언론의 막연한 보도도 책임이 있지만 작가들의 경우에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설을 소설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읽기 때문에 본의아닌 오해를 빚게 된다는 것이었다. 독자들의 그러한 성향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원전에서 일하는 분의 처지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몫이 과학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실은 원칙만으로 밀고 나갈 수 없는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만일 소설과 과학의 몫이 똑같은 것이라면 소설 폐업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또 이론이나 소설가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에 대해, 그것은 허구일 따름이라는 식으로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과 과학을 다르게 보는 섬세한 정신이 필요한 것이란 생각과 함께. 상정행위인 문학과 현실이 동일시되는 독자들의 그러한 취향은 문학교육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그것은 문학적 문화의 미성숙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독자들은 소설이 허구라고 하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만은 사설로 인정되어야 한다. 소설의 내적인 필연성보다는 소설의 논리적인 근거를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허구와 사실을 동일한 차원에서 수용하는 경향이 짙은 독자들이다. 황토현에서 개최된 여름 문화마당에 들렀을 때였다. 작가와의 대화가 있은 다음 ‘갑오동학혁명군 씻김 굿예 있었다. 씻김굿을 하기에 앞서, 그 굿율 담당한 정강우 선생의 굿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그 강의 중에 소설가들이 무당을 소재로 하여 소설을 쓰는 청우, 무당을 ‘야리꾸리하게’묘사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무당들이 끄떡하면 치마끈을 끄르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넘지 않을 놈이 없다는 속담처럼 무당들의 사회경제적인 여건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바탕이 본래 음탕한 것은 아니니까, 소설가들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뜨는 아침햇살〉을 비롯하여 무속을 소재로 한 소설을 몇 편 쓴 적이 있어서, 당사자의 그런 이야기는 실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들이 만들어 놓은 작중인물이 현실의 인물로 둔갑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학풍토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이 끝나고 부정굿, 넋을림굿, 씻김굿, 길닦음굿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춤사위와 창이 구성지게 어우러지는 것은 물론 간간이 곁들이는 설명은 굿을 보는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한판 잘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한 맺혀 죽은 넋들을 깨끗이 씻어 저승으로 천도하는 굿이 씻김굿이다. 동이에다가 소탱을 덮고 그 위에 소금을 뿌리면서 굿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화수로 소탱을 정성스레 닦아주고,주발에 넋을 담아 명다리[질베]롤 지나 시왕세계로 천도하는 과정이 씻김굿의 핵심이다. 넋을 물로 씻는다든지, 넋이 들어간 주발을 연꽃에 담아 명다리를 통해 저승으로 천도한다든지 하는 것은 일단은 상징적인 행위로 이해된다. 육신에서 분리된 혼에 그런 형태를 부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굿의 끄트머리에는 거기 참석한 이들에게 복을 나눠주는 촉원이 있었다. 복을 줄테니 코웰뚜껑이라도 들고 오라니까 거기 참여한 회원 중에는 커다란 함지박을 들고 나오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정강우 선생이 나눠준 것은 말의 축원이었지, 떡덩어려나 막걸리같은 물질적인 구체적인 복은 아니었다. 그 장면은 상징적이고 놀이의 본령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상징행위의 문법에 익숙한 정선생이 소설가들의 무당에 대한 묘사에 마음을 쓰는 것은 허구와 현실이 거의 동질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토를 달아 두자면, 그래서 내가 정선생에게 유감이었다는 것은 천만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그 분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저어될 따름이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인 양 울고 환호한다고 해도, 혹은 화를 돋군다고 해도 소설은 허구의 양식이다. 〈불바람〉의 주인공이 헛소문을 퍼뜨렸다고항의를 한다든지 무당을 음녀로 그렸다고 고소를 한다고 해도 이력사항이 내 행적이 일치되지 않는 한 소설가는 그러한 항의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의무는 없다. 이는 변명이나 회피가 아니다. 소설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은 현실에서 소재를 옆되그것을 허구적인 장치를 통하여 해석하고 의미화한다. 현실만이 존재하고 상상력이나 허구가 용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초월적인 정신력은 보장되지 않는다.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창조행위의 일종이다.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정신적인 병의 일종이다. 그것은 상징과 사실을 혼동하는 것이고 이승과 저승이 같은 논리로 논의되는것과 마찬가지로 공포의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허구를 현실로 환원하는 것이나 현실을 버리고 허구를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둘 다 정상이 아니다. 한 가지 덧불여두고 싶은 것은, 현실이 가파를수록 허구와 사실의 통합이 어렵고 상상력이 구속을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작품을 쓰는 중에 허구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의 여부를 떠나 현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 작가에게 〈불바람〉이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것인지 〈눈뜨는 아침 햇살〉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통해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냐고 물어야 할 것이다. 소설은 사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긴장 속에서 물음을 얼궈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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