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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 특집 [특집]
전북의 문화현실과 문화운동의 과제
임옥상(2004-01-27 12:04:42)

I. 머릿말
80년 광주항쟁에서부터 불불기 시작한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 항쟁의 결과, 그 꽃이 만개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낙관론이었는가를 오늘의 현실국면은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사실‘한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집단적이고 지속적이며 계획적인 움직임’인 변혁운동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도 없을 것이다. 70년대 탈춤부흥운동으로 학원가에서 출발한 문화운동은 80년을 계기로 전체사회변혁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음과 동시에 84년 유화국면 이후 대두된 지역운동의 활성화와 때를 같이하여 지역문화운동으로 운동사적 위치를 획득,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역문화운동(지역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의)의 동장은 대중노선의 확보 없이는 전체 민주화 운동이 그 운동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현실적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충민중의 운동역량의 조직확가 당면과제로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런 문제점들을 정리해 보면 전체(지역)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의(지역)문화운동이 담당할 부분은 전체운동들이 제시하는 이념과 실천내용 및 목표를 보다 신속하게 파급시키고 문제화하여(선전성), 이에 따른 행동을 추동해내고(선동성), 마지막으로 이를 완전히 소화 흡수하여 피와 살이 되게 하는(의식화, 인간화 혹은 육화) 작업이다. 따라서 문화운동은 변혁운동의 뼈대만 세우는 전체운동을 실제 살아 움직이게 하여 이를 현실적으로 작동, 작용케 하는, 즉 일상 속에 삶과 한 몸이되어 삶을 해방시켜 건강하고 융성하게 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80년 이후 10여년간의 운동의 양적 질적 팽창에 의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목표인 ‘민중주체의 공동체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민중의 해방’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90년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 우리는 내일을 여하이 전망할 것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실천 가능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동전체운동역량을 재정비해야 할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지난 10여년간의 운동의 성과와 결과를 재점검하고 반성하여 새로운 지표를 설정하는 작업이다. 전북지역 문화운동의 태동 역시 70년대의 탈춤운동의 파급과 때를 같이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화운동의 시작운연회때가 동장하고 미술, 문학동의 부문에서 운동을 표방하는 소집단이 등장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되는 80년대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북지역의 문화운동은 그간의 성과와 공적에 못지 않게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전체변혁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의 위상정립의 문제, 전체변혁운동이 제시하는 이념과 목표를 문화적으로 실현해내는 이론과 방법의 근거 즉 미학의 문제, 지역적 특수성에 대한 낮은 인식수준의 문제, 인접부문운동과의 유대 및 연대의 문제, 대중성과 전문성의 문제, 인적 물적 재생산구조의 확립 및 유통구조의 항시적 구축의 문제, 실제비평의 부재와 열려진 논의구조를 어떻게 확립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 조직력의 과감화와 정밀화의 문제, 매스미디어를 동원한 지배체제가 만들어내는 제도문화에 대한 대응전략의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지금까지 전북문화운동의 활동에 대하여는 기존의 보고와 연구가 상당하기 때문에 이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현황과 실태에 대한 것보다는 이들이 안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촛점을 맞춰보았다. 그러나 필자의 전공이 미술이고, 그 중에서도 작가를 지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한계와 편향성을 노정시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문화운동분야에 관심은 가지고 있으나 직업상의 한계로 몸전체로 뛰지 못하고 있어, 보다 구체적이고 첨예한 현안에서 어쩔 수 없는 거리를 갖게 됨으로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본 논의가 미술에 편중될 수 밖에 없음을 처음부터 스스로 인정하며 이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II. 본말
1. 대항문화 대안문화 전북문화운동은 대안적 문화보다 대항적 문화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풍기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성격은 전통적 형식-일정하게 합의된, 아니면 단순히 언어적 기능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공통된 정서를 유발시킬만한 틀거리이 없는 미술에서 부각된다. 대항과 대안을 딱히 구분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대안은 대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 안락과 함께 제시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안은 그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시될 경우 개량주의로 매도되기 쉽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정지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불명등과 착취, 핍박, 억압 등 바로 척결해야 할 현실에 직면한 문제가 대항문화를 부른다. 싸움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선전, 선동하는 문화인 것이다. 급박한 전선의 전투요, 육박전이요, 생사를 건 싸움일 때 대항의 문화는 설 자리를 찾는다. 대항문화는 후방보다 전방에서 더 큰 힘을 갖는다. 그것은 거칠고 강한 힘을 강조해야 하며 전투의 긴박성 때문에 과장적인 성격을 갖는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조용한 설득은 혼란과 혼돈, 소음 때문에 들리지도 않는다. 대안문화는 후방의 문화다. 여기는 어쨌든 생산도 해야하고 가정도 꾸려야 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맺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갖을 수 있다. 즉 삶이 소극적이나마 자리한 곳이 후방이다. 여기서는 거칠음, 힘, 선동, 과장, 왜곡 등의 미학은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상당한 한계를 갖게된다. 대항문화는 싸움의 전반부를 대안문화는 싸움의 후반부를 그 활동무대로 할 것이다. 그러나 전반이든 후반이든 전방과 후방은 있게 마련이요 잠시 싸움이 멈추는 시기도 있고 휴식도 취침도 있을것이다. 싸움터엔 전사가 주체지만 군대는 지휘관, 의무반, 통신반등으로 역할이 분담된 복합체다. 싸움의 현장에서 요구하는 그림은 이미 형식상에 일정한 틀을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났을 때나 싸움터 이외의 장소에서는 그것의 효용성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무차별적으로 확대 적용하게 될 경우 커다란 무리가 생길 것은 명확하다. 따라서 역할이 분담되어야 한다. 현장에 투입시켜야 할 미술품을 제작, 유포하는 미술패와 그 외의 장소와 시간에 사용해야 할 것들을 만드는 집단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통일된 지도노선 밑에 놓여져야만 한다. 역할분담은 전문성도 동시에 분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양식만이 전형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분야에 관한 한, 그 부분에 관한 한 전형적인 형식이다라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대항문화만이 옳고 대안문화를 연구제시하는 것은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대항문화가 반드시 현장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항의 의미를 좁게 잡았을 때의 경우이고 넓은 의미에서의 대항은 대안의 의미까지를 내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므로 대항문화라는 의미에 적절한 형식도 다종다양할 수 밖에 없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때의 그것과 관제지배 이데올로지의 문화공세에 대용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를 같이 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2. 문화운동과 사회성격의 문제
전체변혁운동이 사회성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하듯이 그 부문운동인 문화(문예)운동 역시 사회성격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전개양상이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사회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문예활동은 운동으로서의 전 의미를 상실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북지역운동, 문예운동이 민족모순을 그 선차성으로하는 ‘식민지 반봉건론(이하 식반)과 계급모순을 그것으로 하는 ‘신식만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하 신식국독자) 중 어느 쪽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어느 문제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운동권 내부에서조차 공식적으로 이를 공식화시키고 있지 않은 상태여서 이것을 섣불리 거론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오늘의 우리의 논의는 더 이상 전개될 수 없다. 즉 문화예술운동이 단순히 일회적인 정서나 기분풀이와 같은 결과물로 대치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정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문예운동은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하거나 각자의 입장차이에 대한 비판을 주고받고 하는 열려진 논의의 마당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일차적 원인은 이러한 논의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되지 않은데서 찾아질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 이 첨예한 사회과학적 문제에 끼어 들 만한 사상적 풍토가 성숙되지 못한 데도 일단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문예운동현장에서 이 문제의 입장차이 때문에 야기되거나 봉착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가 현재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운동의 일정한 현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문화가 작용, 반작용의 변중법적 도정속에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작용만 있고 이에 대한 반응이 없거나 또 이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면 이는 정당한 의미에서의 문화도, 운동도 아니다. 식반의 운동방향과 신식국독 자의 지향점은 그 구체적 운동의 실천방향에 서 매우 큰 편차를 노정시키고있다. 이 양자의 문예운동 모두 현상주의 즉,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으나, 전자의 경우 최근 들어, 북한의 문예이론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민족통일, 민중해방을 주장하나 설령 목표가 같다 하더라도 (사실 목표도 같지 딴은 않다) 방법론과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종국에는 목표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일차적으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그리며 ‘민중해방’을 그‘총국의 목표로 삼고 있으나 민중이 개념에서부터 양자는 상당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세계관 측 민중세계관의 편차가 크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쪽과 이를 구체화시키지 않는 쪽과 문예적 표현이 동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제, 반미, 자주화를 선차적으로 내세우며, ‘조국통일전선의 구축이 국내의 기본모순인 계급적 모순의 결과물인 생존권 투쟁에 우선해야 하며, 민족모순이 해결되지 않고는 계급모순도 타파될 수 없다’라고 운동의 중심을 잡아가는 쪽과, ‘민족모순을 풀어갈 유일한 변혁의 동력은 노동자 계급이고, 계급혁명을 통해서만 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쪽의 문예운동이 다를 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전북의 문예운동은 전반적으로 식반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것은 이 지역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역대정권의 불균형한 정책에 의해 이곳은 아직 여타지역에 비해 노동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즉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계급문제가 사회의 현안으로 부상될 만한 여건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모순은 항상 다른 문제로 덮여버리기 십상이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토대 즉 농업문제-농민의 구조적 문제-가굴절된 역사 속에 매몰되어 있는 이곳으로서는 일제로부터의 식민유제 청산이 아직도 커다란 문제가 되며 이 문제가 미쳐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 미국의 동장은 그만큼 외세의 문제를 중첩시킨 것이 된다. 또 수입소파동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농산물 수입이 직접적인 피해대상이 밀집되어 있는 곳도 이곳이다. 그 로인해 삶의 토대 자체가 흔들리는 곳인 것이다. 농촌사회를 근간으로 볼 때 그 반봉건적 요소를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식반론의 논리 체계가 세워지지 않았는가 추단해 본다. 또 사실 전남북 지역의 식반분포도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문학에서의 오봉욱의 ‘붉은산 검은피’, 정도상의 ‘친구는 멀리 갔어도’ 등에서 일련의 이러한 색채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연회패 ‘녹두골’의 활동도 상당부분 농촌을 그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될 때 어쩔 수 없는 편향성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미술운동에서 비교적 강하게 나타난다. 일련의 현장 미술-걸개 그림, 벽보, 포스타, 전단 등은 반제, 반미가 그 중심부를 점하고 있다. 모든 민족모순의 원인이 제국주의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민족분단의 실질적 책임도, 광주항쟁의 배후도, 오늘의 농촌의 현실도 모두 제국주의의 결과물들로 설명된다. 여기에 요즈음 부각되기 시작한 핵문제도 또 첨가된다. 군산의 핵기지와 영광의 원전건설은 반핵의 기치를 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모든 일련의 사회현실은 이곳 미술패에게 이들 활동의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역운동은 바로 지역의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문제에 밀착되어 있고 바로 그 현장에서 모든 일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운동보다 강한 성실성을 획득한다. 전체는 시공간상의 문제 때문에 추상화될 위험성이 늘 내재한다. 그러나 전체는 산술적 의미에서의 지역와 합은 아니지만 각 지역의 문제들을 종합하여 완급에 따라 선후의 문제와 강약위 문제를 정리, 조망할 수 있고 또 문제의 상호관계를 분석, 정리할 수 있는 강점을 갖는다. 따라서 전체와 지역이 불협화음을 가질 소지를 항상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는 운동의 미숙함 때문에 나옴직한 초기적 현상일 뿐이다. 전북지역은 앞서의 농촌현장과 함께 학원현장을 갖는다. 노동현장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형편이다. 정치적인 정세가 그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노동현장은 사실 넓고 충분한데도 아직 사회적으로 쟁점화해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학생대상의 운동은 학생을 학생이라는 단위계급으로 분류하여 시한적이며, 삶의 토대가 각기 다르고 지향하는바 삶의 양태가 다르며, 또 20대 전후의 연령층이기 때문에 계급의 동질성을 갖는 집단에 비해 연대가 약하고 목표도 통일되기 어려우며 사회에 대한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데 있어서도 감상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체학원가의 운동성향이 식반론에 기울게 되는 것도 계급적 당파성을 가질 수 없는 학원의 내적요인 때문일 것이다. 조국통일전선 및 반외세 자주화전선은 쉽게 구축될 수 있어도 즉 숫적으로 동조하는 학생을 많이 확보해 낼 수 있으나 노학연대투쟁의 경우는 양상이 매우 다른 실정이다. 통일의 문제는 감상적으로 동조하기가 쉽다. 구체적이지 못하지만 일단 추상적으로는 합의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그렇게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다. 순수한 뜻으로 모두 포용할자세가 되어있다. 통일을 주장한다 하여 집권세력에 타격을 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역대 정권이 항상 그 정체가 흔들릴 때마다 통일정책을 전가의 보도 마냥 휘둘러 왔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번 문목사 사건은 이를 그 반대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제, 반미도 사안은 다르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사실비켜서 있는 것이다.
국내외의 문제가 뒤엉켜 서로에게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작용받아 어느것 하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가닥가닥을 잘 짚어보면 자연히 발견되는 바 그 모든 것이전부 문제의 핵심과 무차별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반외세, 반미 소리를 필요이상으로 높이면 높일수록, 모든 것에 우선하여 통일만을 주장하면 할수록 국내모순은 사소해 보이고 시시하며, 가리워져서 보여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전체운동이란 형감각을 잃을 경우 결국 기득권 층만 돕는 일이 된다. 오늘날, 특히 미술운동권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제작물들은 이상의 문제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독재정권이 곧잘 국내모순으로 은폐하기 위하여 민족을 들먹이면서 눈승심리를 역이용, 사회적 불균형과 모순으로 야기되는 분노와 욕구불만을 전쟁놀음으로 승화시키곤 하지 않았던가?
현재까지의 미술작업들은 현상적인 것만으로 접근, 그 문제의 본질은 그려내지 못하고 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단이 외적 요인에서 왔다는 것을 일단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분단은 우리 사회전체에 내면화되고 정서화되어 있다. 이것을 제국주의가 획책하였건 그대리자들인 독재집단이 만들어낸 반공이데올로기가 원인이었건, 또는 자본주의의 하수인인 독점자본가가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던, 그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 혹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것에 병들고 찌들어 그런 것을 한편 지지하고, 또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일본 깃발을 찢고 철조망을 부수고, 정치집단의 수괴들을 학대하는, 그것도 거의 판에 박은 듯 비슷비슷하게 그려내는 그림 가지고는 현재에 있어서 문제를 붕띄어 놓기만 하고 기실 실질적으로 얻어내는 것이 없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겉모습은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작 그 내용은 다 놓치고 있는것이나 다름없다. 선전, 선동성은 어느 정도 확보했는지 모르지만, 즉 자극시키고 흥분시키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의 내면화, 일상화, 생활화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러한 운동양상의 반복은 아무런 성과없는 소모전과 흡사하다. 적이 분명하다면 패퇴시킬 전술, 전략이 분명해야 한다. 매일 같은 방식의 전술, 전략으로는 백전백패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식반론을 중심으로 한 운동전략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북사회를 농촌중심사회라고 합의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정치, 경제 정책상에서 농촌문제가 논의되고 결정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자본주의하에서의 농촌사회임을 직시하지 않을 경우 본질을 떠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반봉건적 요소가 남아있다 할 경우라도 농촌문제를 농촌문제로만 접근하는 부분에서 그런 것이지 이것이 자본주의를 메카니즘으로 하는 전체 사회의 구조가 반봉건적으로 전일하게 규명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점은 이사회의 농업생산의 전과정을 일별하면 그대로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지가의 문제가 그러하고 농산물의 시장논리 또한 자본주의의 유통체계 바로 그대로다. 그 어느 것 하나그 자체의 논리와 필요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없다. 측 농촌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내적논리와 그 외적 구조물인 정치체계에 의해 완전히 해체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통일이 되면, 제국주의가 떠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역문제에 천착하여 전체변혁운동의 당면과제를 곧게 잡아주는 것과, 또 사회전체에 유기체적 속성을 바로 보아 지역분파주의에 함몰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또한 우리 모두의 임무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용태의 시는 이 시대의 운동에 직접 시사하는 것이 많다. 그의 시가 그리고 있는 내용은 바로 이 시대의 농민이 삶 속에서 체질화하고 내면화한 문제들이다. 그의 시가 운동성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한 설득력을 가지고 호소하는 운동력을 필자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3. 문화운동에서의 미학의 문제
우리는 문화문예의 힘을 믿는가? 물론 믿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이를 평가하거나 대충 무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단일반 대중 뿐만 아니라 이를 직접 생산하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문화는‘한 사회의 총체적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무형의 힘’이다. 이 문화의 정의 자체에 이미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문제가 포함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게 정의되든 문화에 운동이란 말을 붙여 합성어를 만든 것은 이를 보다 가속화시키고 널리 보다 효과적으로 파급시키자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무엇으로 사회를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화내용이 요체로 동장하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세워놓고 있다.‘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는다’.또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문예’등. 따라서 민중적 내용을 담고, 민중이 행위하고, 민중을 위무하고, 최종적으로 민중의 것인 문화가 과연 무엇일까라는 개념규정의 최종귀착점은‘민중’이 된다. 민중적 내용이란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 즉 ‘민중이 해방’되는 세상이며 민중적 세계관이 실제 구현되는 사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문예운동은 민중세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복무하는 것을 이름하는 것이 된다. 사회를 전이시킬 주체가 민중이 되는 것이요 이 사회에서 그일을 담당할 사람이 민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은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결국 남게된다. 즉 민중개념이 확실해지지 않고서는 민중의 세상도 해방도 모두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말것이다. 민중의 세계관이 자리매김 되어야 이에 따라 문예도 그 존재양태가 세워질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운동은 진행되는 젓이고 그 과정속에서 輪치 못한 국면국면이 중첩되면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설혹 이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당연히 수정, 보완되고 변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매 과정마다 운동의 중심뼈대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개념이 정확해야 한다. 민중개념이 과학적이지 못하고 심정적이며 자의적인 것으로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 재단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동의 역량을 대폭 감소시키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현재까지 식반론의 민중개념은 계급의 설정이 애매하고 따라서 그 물적토대 또한 규정하기가 불가능하여 사실상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즉 민중이상상의, 추상의 개념으로 설정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 행동과 강령이 현실주의에 입각하지 않는 민족의 개념을 상정하여 통일문제를 최우선적으로 내세우는 지도 모른다.
필자가 문예 운동계를 이분법으로 추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문예운동은 사실상 통일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그미학도 분리 되어있는 것이다. 미학의 출발을 현실에서 하느냐, 아니면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어느 논리가 타당하다라는 연역논리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경계가 분명히 그어진다. 신신국독자는 현실주의를 어디까지나 버리지 않는다. 이에 비해 식반은 최근 들어 그 모형을 북한의 ‘문예이론’에 접근시키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밝히기에는 지면상의 문제 등 어려움이 많다. 다만 이론의 출발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사상에 기초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런 점에서는 양자가 마찬가지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현실의 과학적 인식을 제일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북한의 문예이론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사회체제가 다르고 그 다른 체제에서 그 사회를 구축하고 실현해내는떼 적용되었던 이론과 규범인 문예이론이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장에서 얼마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확실히 미지수이다. 인적, 물적 토대를 갖춘 사회에서의 이론 및 그 생산물의 성과를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운동권에서, 이를 비록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적용한다하더라도 그 기본 틀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많은 문제를 불러 얄요킬 것은 뻔하다. 이런 점에서 문화가‘인간의 물적생산과정과 관련된 정신적 창조물’이라는 정의를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무갈등론에 바탕한 민족해방투쟁의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영웅상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한다. 이는 현실을 선별적으로 보고 재단하게 되어 정확한 사실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에 중층적으로 쌓여있는 모순과 갈등구조를 파헤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소시켜 민중적 질서로 개혁해 나가는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속도전, 종자론 및 집체창작론 등은 활용할만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보겠다. 북한의 문예이론은 사회주의체제의 제도권 미술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며 내건 개성중심주의 미학, 그러나 결국 상품생산에 다름 아닌 자본주의 미학을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극복하면서 우선주의, 선차성을 극복해야 하는 이름의 과제를 우리는 안고 있을 것이다. 문예가 소통의 한 방식이고 사고와 느낌, 가치를 주고받는 수단이라면 공동체 단위마다, 사회마다 마치 언어와 같은 일정한 특수한 체계 가진 그들끼리만 통하는 특정한방식, 또한 형식을 산정할수 있을 것이다. 그 단위가 지역이면 지역적 양식이 되는 것이고 민족이라고 설정하면 민족적 형식이 될 것이다. 다시 처음 논의로 되돌아와서 ‘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는다’라는 명제에서 민족적 형식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남아있다. 이것은 연회, 문학, 미술, 음악마다 전혀 입장을 달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더 어려운 문제다. 다만 여기서는 그 원칙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민족적 형식이 전통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데 아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전통이라는 말에서 다분히 복고적인 냄새를 맡게 된다. 실제 전통은 ‘옛날 그대로 그렇게 따라서 해본다’라는 데 의미가 있다. 판소리를 한번 따라서 그렇게 해 볼려고 해 본 사람과, 그냥 듣기만 한 사람과, 또 춤판에서 한판 흐드러지게 놀아본 사람과, 구경만하고 손하나 까딱해 보지 않은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렇다. 전통계숭이란 일단 그렇게 따라서 하면서 시작된다. 그와 같이 따라서 하지 않으면 역사에 단절이 생기고 결국 마당이 깨져나간다. 그러나 전통속에는 과거 봉건지배 집단의 통치 이데을로기가 요소요소에 녹아들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잘못하면 따라 시작하다 각 장르마다 요구하는 전문성의 요구에 빠져 민중적 삶의 건강성에서 일탈한, 기교주의나 주술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으로 함몰하기 쉽상이다. 이를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전통계승의 장 실제가 요구하는 이러한 강한 형식적 완결주의(모든 형식은 이를 강요하는 기본 내재율을 가지고 있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 여기’의 절실한 현실적 요구를 구현할 수 있는 현실주의의 바탕에서 이를 수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민족형식에 입각한다는 뜻을 전통계승이라는 의미로 경직되게 받아들여 출발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민중공동체가 요구하는 형식’으로 인식하여 실천으로서의 형상화 작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민족이란용어를 될 수 있는 대로 안쓰려는 필자로서는 기본명제를 ‘민중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이나 ‘역사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는다’라고 쓰고 싶다.)
4. 문화운동의 주체와 현장
문화란 일정한 역사후 단계, 즉 인류의 생산력발달 수준획 특정단계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존재의 내용물이며 형식이다. 노동자계급인 민중은 물질적 생산의 직접담당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성에 노출되어 온몸으로 이에 부딪치게 된다.
민중은 이 싸옴에서 한편으로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집요한 문화공세에 패퇴하여 이의 확대재생산구조에 매몰됨 으로써 역사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순의 실체와 불합리의 근원을 몸 전체로 깨달아 역사 변혁의 주체로 부상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갖는다. 민중이역사의 부름과 발전 법칙에 따라 스스로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고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자리하게끔 견인하는 것이 문예운동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 문예운동은 목적의식을 지닌 주체의 형성과정이며 이들 목적 의식적 주체들이 광범위한 대중의 잠재적인 목적지향성을 일깨우며 스스로 대중과 통일되는 세계로 나아가는 진보적 발전과정이다. 문예운동에서의 주체는 문예운동을 이끄는 자가 민중이어야 한다는 뜻과 그 내용에 민중이 주체로서 각인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그렇다고 하여 문예운동의 현장이 반드시 노동자를 중심으로한 특정장소나 모임일 수만은 없다. 물론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중세계관의 확산과 이의 잠재적 동조충을 현실적으로 가시화시켜 용직이게 하는데 운동의 목표가 있는 만큼 현장은 사회전체 그 어디도 현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자신의 가정부터가 현장이고 직장 또한 현장이 되는 것이다. 이익집단은 물론 혈연집단, 학연집단, 종교집단 및 각종 단체들이 모두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지배집단이 만드는 제도의 집단도 현장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들 체제를 일단 인정하자는 의미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정예조직과 선도집단으로서의 현장을 제외하고는 결국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기존의 대중 조직층이다. 이를 우리의 운동력으로 치환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방향으로 전화시키는 과정이 펼쳐지는 것은 모두 현장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삶의 터전을 떠남으로써 현장에 접근하고 현장에 진입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은 자칫 분파주의를 야기하여 대중성을 스스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새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직을 토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5. 인적, 물적 토대 및 유통구조
여기서 우리는 지배세력이 만들어 내는 지배문화의 현실과 실태 그리고 그 조직과 위력을 다시 한번 재인식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잘못 문화의 속성과 그 파급효과를 너무 사소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의 위력은 테레비 광고효과에 대하여 주시함으로써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독재권력이 텔레비전의 보급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테레비와 신문동의 대중매체에 대한 통제장치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놓지 않으려고 인간 힘을 쓰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문화운동은 매스미디어를 동원한 통치지배집단 및 독점자본문화 지배집단의 정통성과 합리성 및 치적을 홍보하는 문화, 자본주의체제와 그 우월성을 강조하는 체제수호문화, 안보와 안정을 빌미로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문화, 반공이데올로기롤 확대재생산 하는 분단의 문화, 군사문화, 향락소비문화, 퇴폐음란문화, 매판 신식민지 문화 등의 폭력에 대응할 만한 인적, 물적 토대는 물론 유통구조를 어떻게 구축해내고 결국 이를 어떻게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문화는 기호이고 몇이다. 그리고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승리한다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승리한다 하더라도 문화적으로 패배하면 결국 패배하게 된다. 지배문화에 맞설 대항, 대안문화를 정치적 경제적 대용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여닮 양키고우 홈을 외치는 입으로 양담배와 코카콜라를 즐긴다면 그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다. 문화는 반복이고 조직이며 유통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매체의 확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출판매체, 즉 그 본래의 유통질서를 이용할 수 있는 문학, 복제의 용이성과 파급성을 이용할 수 있는 음악, 영화 동은 이런 점에서 문예운동의 선도집단이 될 수 있다. 또 몸과 몸으로 부딪치며 한마당에서 직접교감이 가능한 연회 또한 마당이라는 매체의 효과를 십분 발휘할 수 있다. 미술은 인쇄효과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과 불박이로서의 벽화와 효과, 즉 그 공공성을 이용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미술운동에서 판화의 복제성에는 주목하면서 인쇄의 복제성을 적극 활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 중의 하나이다. 이상에서 보았을 때 기존의 체계화한 매체를 십분 이용하는 방법과 그 구체적 전략을 세우는 일 또한, 조직을 확대하고 현장을 넓혀 가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고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매스미디어에 파고드는 일이다. 그 본래의 조직과 여파는 실로 가공할 만 하니까 말이다. 아울러 제도교육의 현장도 교육의 확대재생산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그만큼 중요한 장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효과적인 것은 시장의 유통질서를 이용, 이들 제도문화를 무력화시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조사를 하고 대중들의 기호를 알아보는 동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기초조사를 선행해야 할 것이다. 고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시장질서가 전일하게 조직화되어 었다는 현실을 망각할 채 열정과 투신이라는 것만으로 그 모두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인적토대는 운동패에 합류할려는 많은 지망생과 이를 길러낼만한 발전된 역량을 갖추고 있는 학원을 중심으로 해서 어느 정도 확보되고 있다. 그러나 학원중심의 전략도 한계가 있음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협의의 인적 토대는 운동의 행위자를 말하지만 광의의 토대는 운동에 동조하고 따르는 대중일 것이다. 물적 토대가 현재로서는 운동의 지속성과 확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최대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운동의 생활화와 삶의 운동화하고 직접 맞닿는 문제이다. 이것이 구축되지 않으면 뜻과 의지, 열정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깨지고 만다. 지금과 같은 영세성서로가 서로에 매달리는 것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는 자체의 재생산구조를 물화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집단인 문화문예운동에서 맡아낼 수밖에 없다. 기존의 시장구조, 즉 그 유통구조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확보해내야 하는 것이다.
III-맺는말
이글은 머릿말에서도 밝힌 것처럼 정확한 논리적 체계를 미쳐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쓰여졌다. 그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문예의 한 분야인 미술생산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과정에서 부딪치고 맞닥뜨렸던 과제들과 문예운동의 전개과정에 따라 제기되었던 문제들과를 함께 조응시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볼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은 우리시대 변혁의 중심고리를 계급모순에서 찾지 않고 민족모순에서 출발하는 식반론의 입장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의의를 제기함과 동시에 또한 식반론에 편향되어 펼쳐지고 있는 전북문화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에서라기 보다는 심정적인 진단이 보다 많이 작용된 결과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징후는 정확한 문맥으로 공개화되지 않았을 뿐 이미 그 내적논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민중의 계급성 즉 당파성이 과학적 전망을 갖지 못할 경우 다시 말하여 민중개념이 계급성을 명확한 근거로하여 규정되지 않을 경우 운동주체도, 운동대상도 불투명하게 된다. 민중은 노동자계급으로 전일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문예운동도 그 전술과 전략이 수립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우리는 대항문화에 주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전인적인 존재인만큼 그 대안문화도 동시에 향유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 전체적 의미에서의 대안문화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현실적 요구와 정서도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물도 제작, 공급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민중적 시각과 세계관에 입각해서 말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전투성을 고취시키는 그것뿐만 아니라 휴식하고 위안 받는, 그래서 정서적 균형을 유지하고 결국 건강한 인간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생활문예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과 목적에 따라 그 대상과 목표에 따라 다종다양의 생산물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역할분담이 자연히 이룩될 것이고 전문성도 그 목표가 요구하는 만큼의 균형을 유지하며 성숙될 것이다. 운동이 지속적이며 결국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불적토대를 여하히 구축할 것인가 하는 일이 제일의 과제가 된다.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시장의 유통질서를 파고들어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과학적이고도 치밀한 시장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농민운동, 노동운동의 현장의 기본조사처럼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일상생활을 연구하여 생활 문예품을 개발하는 일은 그만큼의 운동을 대중화시키고 확대시키는 작업이 된다.
끝으로 지면상의 문제, 또 본인의 시야의 한계 동의 이유 때문에 음악, 연극, 연회 및 문학분야에 소홀했던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리고 사회성격론에 운동의 촛점을 맞춘 관계로 마치 사회과학적 전제와 토대위에서만 문예의 방향이 설정되는 듯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게끔 기술한 점 등 문제의 소지가 많음을 시인한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통일하고 수렴해가는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문예운동을 알고자 하는 일반인을 위해 이 글이 쓰여지지 못하고 운동권 내부의 논의구조를 보다 활성화하고 긴밀하게 하자는 의도에서 쓰여져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많은 질정을 부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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