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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 | 특집 [세대횡단 문화읽기]
장수 남양리(長水 南陽里)출토유물
윤 덕 향 전북대교수 고고학(2004-01-29 10:57:18)

1988년 11월 25일경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승남씨로부터 옛날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전화가 있었다. 전화상으로 들은 바로는 이들 물건이 돌로만든 유구에서 출토되었고 청동과 쇠로 만든 것이 섰여 있으며 또 돌로만든것도 있다는 점에서 청동기시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현지를 찾아가서 유물들을 보았는데 첫눈에 돌덧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임을 알 수 있었다. 유물들 대강 사진을 찍고 간단히 도면을 작성한 다음 유물이 나왔다는 밭을 둘러보았는데 발견자는 이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없었던 듯 밭을 갈다가 돌들이 많이 있어서 돌을 주워내다가 보니 유물들이 나왔다는 대답이었다. 밭은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작은 내를 끼고 펼쳐진 얼마간의 들을 이루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같은 경우처럼 밭이나 논을 갈다가 아니면 산에 나무를 심다가 유물이 나올 경우 무심히 이를 버리는 수도 없지 않다. 이 유물을 발견한 김승남씨도 처음에는 무심히 여겼으나 유물중 청동거울의 뒷면에 가는 선으로 무늬가 있는 점이 호기심을 끌었고 그런 유물을 이전에 박물관에서 본기억이 있어 수습한 다음 전북대 박물관으로 전화를 하였다고 한다. 또 때로는 땅에서 나온것에는 귀신이 붙어있다고 하여 일부러 이를 깨뜨리거나 없애버리는 수도 있다. 아니면 좀 인식이 되어 있는 경우 골동품상에 가져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관청에 신고한다는 것이 보통사람으로서는 좀 꺼려지는 일이고 의식에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의식에 바탕하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땅에서 나온 유물을 신고하면 이곳 저곳에서 경위를 묻는다 하여 오라가라하며 차비가 될까말까한정도를 보상금으로 지급하는 일이 적지않았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차비도 될까말까 보상금조차도 꿩구어먹은 자리처럼 아무런 통보는 없는 수도 있었다.
이 유물을 발견한 사람도 관계당국에 신고를 할 생각은 아니고 지방 국립대학인 전죽대학교에 이 유물을 기증하거나 골동품상에 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 들어 신고를 할 경우 보상이 신속하며 보상금액도 적지 않고 이전처럼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었으나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그래서 우리학교에 기증을 한다고 할 경우 이 유물들에 합당한 보상이 보장되지 않으며 곧 개관될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이 지역사회를 휘아여 보다 바람직하며 신고를 하지않고 임의로 골동품상에 팔면 법에 저촉된다는 점을 들어 신고를 강권하였다. 그리고 혹 무슨 사정이 있어 신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면 학교 박물관에라도 기증해 주기를 바란다면서 어떻게 처리하든 그 내용을 연락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전주로 돌아왔다. 학교로 온 다음에도 마음이 놓이지않다가 발견자와 고등학교 동찬인 발물관 조교를 통하여 발견자가 신고를 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게 되었다. 그 후이 유물은 정당한 정차를 거쳐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발견자에게는 당초의 기대보다 많은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또 유물이 발견된 밭에 대하여 발견자의 증언을 토대로 지건길(池建吉) 국립박물관장이 간단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검파두식(劒把頭;칼자루 끝장식)이 추가로 발견되고 유구가 돌덧널무덤이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ABANF은 세형 동검과 칼손잡이 머리장식, 동모, 동경, 쇠도끼, 쇠끌, 돌화살촉, 돌칼등으로 전북지방에서 청동기, 철기가 석기와 함께 출토된 최초의 예에 속한다.
1) 세형동검(細形銅劒)과 칼자루 끝장식
세형동검은 한반도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의 하나로 처음 한반도에 전해진 동검인 만주식동검(滿洲式銅)에서 발전된 한국식 동검을 말한다. 즉 한반도에서 자체적으로 발전된 동검을 세형 동검이라고하는데 이 동검은 거푸집에서 빼낸 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보통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만들어진 동검은 거푸집에서 꺼낸 다음날에 세우는 작업을 거치지 않은 상태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동검은 사용하지않고 곧바로 무덤에 꺼묻힌 것이며 그 형태로 미루어보나 세형동검중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형식이다. 칼자루 끝에장식은 말 그대로 칼의 자루부분 뒤쪽 끝에 붙이는 것으로 장식적인 기능과 더불어 칼에 무게를 더해주는 것이다. 청동으로 만든이 유물은 누에고치를 길게 반으로 짧은 가지가 달려있어 십자형을 이루는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인 형태의 칼자루 끝장식이다.
세형동검은 칼로서 베거나 찌르는 무기로서 사용하였을 것이며 생각할 수도있다. 그러나 그 재질이 베거나 찌르는데 부적절하며 이곳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거푸집에서 꺼낸 다음날을 세우지 않은 것은 더구나 사용되었을 것으로 볼수가 없다. 따라서 베거나 찌르는 기능을 가진 무기라기 보다는 칼이 가지는 기능을 상징하는 도구로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실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갈이라는 무기가 가지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 동경(銅鏡)
한쪽면에 평평하고 반대쪽 면의 가장자리가 반원형 단면을 이루며 두툼하고 안쪽에 2개의 꼬다리가 있는 원형 평면의 거울이다. 꼬다리가 있는 뒷면에는 가는 선으로 된무늬가 있는데 이 무늬는 기본적으로 길고 폭이 좁은 직각 3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무늬는 마치 톱날처럼 보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거울의 평면이 둥근 것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꼬다리에는 끈을 꿰어 어딘가 부착하여 거울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거울처럼 뒷면에 가는 선을 이용하여 무늬를 넣은 거울은 한반도의 특징적인 것으로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거울은 보통 여성들이 화장을 위하여 사용하는 물건이나 청동기시대의 경우에 화장을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이 유물처럼 부착되는 면이 밖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즉 장식이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거울의 무늬는 감추어지는 부분에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매우 힘들여 무늬를 넣었고 그 무늬를 넣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과 복잡한 공정이 필요한 점을 감안한다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주된 사용면인 앞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다는 점과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 평면이라는 점에서 태양 빛을 연장하는 도구로 해석하고 있다. 또 이 유물의 뒷면에는 3각형만이 표현되어 있으나 동심원이 있는 거울이 적지않아서 더욱 그같은 가능성이 강하다. 그리고 3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무늬가 여성이 가지는 속성, 즉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관념이 표현된 것이다 고대 인류나 현재를 살고 있는 집단들의 경우 여성은 매우 신비한 존재로 인식된다. 즉 어느날 갑자기 배가 부르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아이를 낳는다는 점에서 여성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생산과 풍요를 관념적으로 상징하는 무늬가 있으면서 동시에 태양 빛을 연장하는 기능을 가진 이 거울은 아마도 원시 주술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그 주술 담당자에게 소속되는 물건일 것이다. 즉 원시 주술사는 이 거울을 몸에 지니고 거울이 가지고 있는 태양빝의 연장이라는 힘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어둠으로 상징되는 나쁜 것을 물리쳐서 생산과 풍요를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3) 동모
청동으로 만든 이 창은 짧고 뭉퉁한 형태로 전형적인 한국식 동모이다. 날이 세워진 끝의 반대쪽 끝에는 원통형의 자루구멍이 있어 나무자루를 끼웠던 것으로 보이며 바깥에는 이 나무자루를 고정하기 위한 못을 박았던 구멍이 있다. 거푸집에서 꺼낸 다음 같아서 날을 세웠으며 초록색의 녹이 전면에 슬어있다.

4) 쇠도끼와 쇠끌
2점이 모두 쇠물을 부어 만든 주조(鑄造) 철기로 쇠도끼에는 자루를 끼우기 위한 구멍이 있고 마름모꼴의 못구멍도 있다. 쇠끝에도 자루를 끼우기 위한 구멍이 있으며 길이가 길고 폭이 좁은 장방형 평면을 보인다.

5)돌칼, 돌화살촉
돌칼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평면을 보이는데 넓은 쪽에 날이 세워져있으며 좁은 쪽은 곧으며 양측면은 양간 휘어진다. 한쪽면에서 갈아서 세운 날은 중심쪽이 안으로 들어오는 곡선을 이루며 날이 있는 쪽 가운데 부분에 구먼이 뚫려 있다. 이같은 돌칼은 본디 중간부분에 2개의 구멍이 있어 그 구멍에 끈을 꿰어 손에 결박하여 곡식의 이삭을 따는데 사용한 것이다. 이돌칼은 날부분이 매우 많아 닳아있고 날을 다시 갈아서 세운 흔적이 있어 실제 사용하던 것을 껴묻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은 정식 발굴조사를 통한 적이 아니라서 유구가 분명하지않으며 함께 껴묻혔을 토기가 조사되지 않았으나 몇가지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의 돌덧널에서 이같은 류의 유물이 적지않게 출토 되고 있으나 대부분 금강의 중류, 하류지역에서 출토 되었는데 금강상류에서도 그같은 유물이 출토되는 것이 확인 되었다. 둘째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석기의 공반관계를 통하여 이 유물들이 청동기가 쇠퇴하고 철기의 생산이 본격화되는 단계, 즉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시기는 역사기록상의 마한의 형성과 관계가 있는 시기이며 유물들이 통하여 그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쇠도끼나 쇠끌, 돌칼등과 같은 실용기가 있으면서 보이는 세형동검이나 의식적인 속성이 강한 동경이 함께 출토된 점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생산도구에 사용하면서고 전통적인 도구를 의식에 이용하고 있는 존재, 즉 토착집단의 존재를 의미한다. 끝으로 동경을 통하여 이집단에 주술적인 의식을 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동시에 힘을 상징하는 동검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제정일치9祭政一致)의 지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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