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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특집 [시사의 창]
국민의 힘으로 ‘선거판’을 민중이 주인되는 ‘살판’으로 만들어야
이재규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북 연합 편집실장(2004-01-29 11:00:20)

많은 사람들이 올해 걱정을 하고 있다. 올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법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총선과 대통령 선거, 그리고 기초와 광역, 두 차례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합하여 네차례의 선거열풍이 휩쓸고 지나갈 예정이다. 따라서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선거의 해’로 기록되는 해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를 걱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선거 관행을 놓고 볼 때 선거철을 맞아 많은 돈이 풀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렇잖아도 91년에 1백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고 잇는 우리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제도언론에 의해 다분히 부추겨지고 정당화되고 있는 이러한 데마고기는 정당한가. 연이은 선거 때문에 우리 경제가 망가질 것(어떻게 해서든 선거를 미루거나 넘겨보려는 집권세력에 의해 즐겨 사용되는 선거망국론의 대표적 예이다)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두가지의 측면에서 중대한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그 하나는 당연시 되면서 통용되고 있는 선거 - 돈풀기의 등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책임을 모두에게 돌리면서 선거 자체를 거부하는 심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선거때만 되면 등장하는 안주고 안받기 캠페인은 알고보면 교묘한 양비론이다. 실상 경제를 교란시킬 정도의 금권 타락선거를 주도할 수 있는 세력은 돈줄을 쥐고 있는 집권세력 뿐인데도 정치인 모두, 국민 전체를 타락의 공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두가 나쁜 놈이면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최근 중앙선관위의 현상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구호를 보면 분명해진다. “받는 손 사라지면 주는 손도 사라진다” 이 슬로건의 핵심은 “받는 손”에 있다. 언뜻 국민의 주체적 의식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이 구호 내부에는 금권타락선거의 책임을 국민대중의 의식수준, 이름하여 민도에 돌리려는 교묘한 복선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집권세력이 교묘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통해 국민들에게 선거혐오증을 조장하면서 되도록 선거를 회피하려는 이유는 명백하다. 선거시기에는 어찌되었든 국민의 정치적 관심이 증대하고 지배세력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대대적으로 공격받으면서 정치적 불안정을 가속화한다. 집권세력이 늘 주창하는 ‘사회적 안정’을 달성하는데 있어 불필요한 지출(국민에게 그 아까운 돈을 써야 하니까)을 해야 하고 물리적 통제와 같은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 대신 마음에 없는 아부와 정치공작을 전개해야만 한다. 통치가 원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독재세력과 선거와는 관계가 멀어왔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이유 외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자치단체장) 선거 연기론’의 배경은 실은 다음의 이유에 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단순히 지자체 선거만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간단히 미루어 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번 시기의 지방자치단체장선거는 지자제의 정착이라는 고유의 의미뿐만 아니라 대통령선거의 공정성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단체장선거가 실시되어 대통령선거 직전에 수족같았던 여권 인사 대신에 야당성향의 단체장이 들어선다면 대통령선거에서 필수적인 ‘현장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고 이것은 집권세력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올해 총선결과에 따라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겠지만 여당은 이와 같은 배경 때문에 어떤 논리나 구실을 동원해서라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미루려 할 것이고 이를 저지하고 예정된 선거일정을 관찰하려는 야당세력의 일대격돌이 92년 중반기에 전개될 것이다. 이처럼 네 번의 선거가 모두 서로 깊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같이 중요시될 수 밖에 없다. 여러 가지 변수가 가능하겠지만 이 네 번의 선거가 다 실시되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무엇보다도 민자당세력은 가장 먼저 다가오는 총선에서 자신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면 숙원사업인 내각제 개헌을 즉각 시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이후의 정국은 현재의 예상구도와는 매우 판이한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선거판’이 날아가고 ‘가두정치’와 독재 세력의 고전적 묵기인 ‘벌거벗은 물리력’과의 일대격돌로 정국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본디 선거란 정치권력의 진정한 주인인 국민대중이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절차이다. 독재체계 하에서는 이러한 주권재민의 구체적 구현수단인 선거 자체가 부정되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규제와 탄압조치 아래에서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 만다. 6공체제에서는 전두환정권 치하에서처럼 노골적인 선거부정이나 물리적 탄압으로 일관하는 공포정치 대신에 선거절차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창출’의 외향을 획득하기 위해 선거일정을 존중하는 대신 교묘한 대중조작과 공작정치, 집중적인 탄압을 배합하는 총체적 정치전쟁을 구사한다. 지배세력의 직접적인 물리력행사가 기만적인 형태로나마 이완되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민중역량 성장을 반영함과 동시에 지배세력의 통치수단이 그만큼 교활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올해의 정치상황을 규정지어본다면 (운동권의 표현을 빌리자면) “92~93년은 현 지배세력의 정치일정에 따라 주요한 선거를 통해 지배체제를 합법적으로 재편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정권의 향방을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간의 경쟁과 투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며, 이를 계기로 민중의 정치적 관심이 고조되고 일상적으로 경험해오던 불만과 개혁적 요구가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시기”이다. 그리하여 92~93년은 독재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잇는 군부, 관료집단(TK세력)과 보수정당 사이에 정권경쟁이 본격화함과 아울러 민중운동의 고양과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적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이를 저지하고 고립, 무력화하려는 지배세력 사이에 치열한 대립과 격돌이 전개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물질적 재부의 관할수단인 국가권력을 누가 먹느냐를 걸고 한판 판갈이 싸움이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미칠 영향은 개개 정치인의 입신 기회나 한판 걸판지게 얻어 먹을 먹자판을 넘어서서 민족 전체의 운명결정에 연결되어 있다.
올해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염려와 걱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번 기만적인 선거절차를 통해 합법적인 권력연장의 날개를 파쇼세력에게 달아주는 해로 될 것인가, 아니면 군부독재의 연장에 중대한 파열구를 내고 민주정부 수립의 큰 길로 한걸음 힘차게 내딛는 한해가 될 것인가. 그간 지역적 분열, 여당과의 기회주의적 타협과 동요로 국민대중으로부터 기대를 상실해 왔던 보수야당세력이 통합을 이루고, 내부분열과 역량분산, 그리고 대중적으로 변혁의 전망을 가시화시켜 내지 못하여 국민대중에게 희망과 기대를 심어주는 믿음직한 세력으로 다가서지 못한 민족민주세력 또한 「전국연합」으로 결집함으로써 국민의 관망적 태도를 적극적 참여에로 전환시켜 낼 수 있는 계기를 맞고 있으며, 최근 민중생활의 위기에 따른 정치적 불안, 민주적 개혁요구들이 이러한 기대감과 결부되어 광범한 반독재 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점 등이 이 시기의 정세가 매우 역동적 양상을 띨것으로 예컨케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이 모든 역동적인 가능성을 매듭짓는 국민의 힘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표현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민의 정치적 실천은, 힘은 선거시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한 표 잘던지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국민대중을 협소한 거수기로 전락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민정치의 시작이다. 우리를 ‘찍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국민이 ‘나섭시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실천은 올바른 정치적 선택 - 한표를 던지는 데에 한정될 것이 아니라 공정선거의 실현을 위한 국민적 감시운동, 생존권의 즉각적 보장을 위한 각계각층의 대중 운동에까지로 넓어져야 한다. 아니 진정한 국민정치가 확보되고 있지 못한 억압과 압제의 시절에는 대중적 행동만이 진정한 실천의 본류가 될 것이다.
지배세력은 이미 치밀한 권력 연장직전에 들어갔다. 역사의 격변기에 늘 등장하는 권력의 하수인들 - 화려한 외관과 달변으로 일시적으로 국민 일부를 현혹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앞잡이들을 동원하여 반독재진영 내부를 어지럽히고 정치적 다원주의를 가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독재세력의 다수화를 보장받으려 한다. 정치적 선택이 망설여지는 이러한 시기에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판단선은 독재세력이냐 아니냐로 그어져야 한다. 최선이면 좋겠지만 그것이 안될때면 차선이라도 선택함으로써 독재의 연장을 일단 저지하는 것. 그것이 당면한 또 가능한 정치적 목표이다.
역사는 격동하며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냉소와 좌절에 빠져 추악한 자들의 밑바닥에서 변함없이 고통받는 우민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 행동과 낙관으로 뭉친 진정한 민중으로 거듭날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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