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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특집 [특집]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
신순철 원광대교수 한국사(2004-01-29 15:11:23)



1. 머리말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3년 앞둔 지금, 이 사건의 명칭으로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몇가지 주요쟁점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못한 분야의 연구도 진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못한 분야의 연구도 진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고부민란으로 비롯되는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을 일별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농민전쟁에 관한 저술이 많지만 주요한 논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1-4『역사비평』계간 7-10호(1989 겨울-1990 가을)
․ 정창렬, 「고부민락연구」상․하『한국사연구』제48, 49집(1985)
․ 오지영, 『동학사』, 영창서관, 1938.
․ 김상기, 『동학과 동학란』, 1975, 한국일보사. (1931, 동아일보연재)
․ 한우근, 『동학과 농민봉기』, 일조각, 1983.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금강출판사, 1980.
&#8228; 문순태, 『동학기행』, 1984, <주간조선> 연재물.
위의 논저들을 참조하여, 편의상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을 고부민란 단계, 무장봉기단계, 집강소단계, 9월 재봉기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고부민란 단계
1) 사발통문 거사계획
1893년 보은집회가 열리고 있던 시기에 이른다 ‘金???’이라고 기록되어진 호남지역 동학도들은 원평에서 별도의 집회를 가졌다. 이로써 남접의 교조신원운동은 봉건왕조에 저항하는 정치운동화 하는 내면적 성숙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봉건적 수탈구조의 심화로 인하여 농민의 처지나 다름없게 된 몰락양반층이 민란의 지도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동학내 남북접의 계급적 차별성 등에 의한 것으로 설명된다.
1893년 12월경 고부군민은 두차례에 걸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민소를 올렸으나 모두 갇히거나 매를 맞고 쫓겨났다. 농민들은 마침내 ‘사발통문’을 돌려 군수의 학정에 맞서 봉기할 것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에 발견된 ‘사발통문’은 몇가지 의문점이 있지만 1893년 12월경 고부 농민들은 무장보기를 계획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탐관오리들을 징치하며 서울로 진격해 갈 준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거사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던 것은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이임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후 고부군수로 배임도니 자가 6인이나 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결국 조병갑이 1894년 2월 13에 재임하게 되어TEk. 고부민란은 바로 조병갑의 재임과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다.

2) 고부민란
2월 15일 밤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를 중심으로하는 고부군민 수백명은 이평에서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죄인을 석방한 후 이튿날 새벽 만석보를 헐고 세미를 농민에게 돌려주는 한편 봉기 원인이 되었던 조병갑의 가렴주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① 이미 있던 만석보와 팔왕보 아래쪽에 새로운 보를 쌓고 당초 약속과는 달리 수세조로 7백여석을 거두었고 진황지에 대해서도 당초 약속과는 달리 추수 후에 강제로 세를 거둔 것.
② 부민에게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죄를 얽어 엽전 2만냥을 늑탈한 것.
③ 그 아비가 태인군수로 있었는데 송덕비 건립을 위하여 천냥을 거둔 것.
④ 대동미를 정미로 환산하여 돈을 거두고서는 이를 나쁜 쌀을 사서 채우고 나머지를 착복한 것.
봉기가 일어나자 감사 김문현은 감영병과 군교를 동원하여 이를 평정코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3월 21일 의정부에 장계를 올리니 정부는 군수를 파직하고 후임군수 박원명(용안현감), 안핵사 이용택(장흥부사)를 임명하였다.
4월초, 박원명이 부임하여 농민들을 무마하여 안정을 회복하는 듯 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도임하여 가담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군수를 협박하고 동학도와 군민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자 진정국면을 맞았던 고부 민심은 다시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3. 무장봉기 단계
이해 4월 26일은 동학교주 최시형의 탄생일인바, 이 무렵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는 각지에 통문을 보내 무장에서 수천 농민과 함께 재봉기를 선언하고, 고부를 거쳐 백산에 이르니 각지에서 모인 농민의 수가 8천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전봉준으 대장으로 하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고(총사령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김덕명 오지영, 영솔장 최경선, 비서 송회옥 정백현 등)이제 고부군민의 농민봉기는 지역적인 국지성을 벗어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보수체제의 강화로 인한 봉건적 모순의 심화는 이 시기 농민들로 하여금 ‘참다 참다 못해 일어’나게 하는 전면적인 반봉건 농민전쟁의 계기가 된 것이다.
5월초 태인 원평을 거쳐 황토현에서 감영병과 향병으로 구성된 관군을 대파한 농민군은 정읍흥덕 무장을 차례로 점령하고 5월16일에는 영광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감사로부터 농민군의 재봉기 소식을 접한 정부는 양호초토사로 홍계훈을 임명하여 경군 8백명을 파견하여 5월 10일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5월 25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농민군과 접전하였으나 대패하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장성에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한 농민군은 원평을 거쳐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뒤따라온 관군과 산발적인 접전을 계속하다가 5월 7일 감사 김학진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였다. 이때 감사는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수락하고 이를 집강소를 통하여 개혁하기로 하였다.

4. 집강소 개혁 단계

7월 하순경 전라도 53개읍에 농민군이 주도하는 집강소가 설치되고 이를 통하여 폐정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개혁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드물지만 손화중은 광주지역을, 김개남은 남원지역을 관장하고 전봉준은 각지를 다니면서 개혁을 독려하였다.
집강소의 조직은 동학의 六任制를 근간으로 하여 교화기관 규찰기관 군사동원기관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집강소 개혁의 주체는 빈농하층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경제적인 수탈구조의 혁파(균전관, 전운사 등 삼정), 신분 해방, 농민의 억울한 사정처리, 토지분작 추진 및 지대 인하 등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농민전쟁으로 인하 청국과 일본의 파병은 국내정치세력 판도에 커다란 변활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7월 23일 일본은 무력에 의한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을 축출하고 진일 개화파 정권을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한 일본은 청국 군대를 선제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변화 특히 일본의 내정간섭은 농민군의 개혁에 차질과 불안을 가져오게 되었고 동학 내부에 갈등을 빚어오던 남북접이 함께 10월 반외세의 재봉기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전주화약과 집강소 시기는 농민전쟁의 실패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로 농민정권을 창출한 시기여&#50437;며 또한 이시기에 10월 재봉기를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5. 10월 재봉기 단계
10월초 전봉준은 삼례에서 재봉기하여 여산강경을 거쳐 논산에 이르니 농민군의 수가 수만명에 이르러렀다고 한다. 정부는 관군과 일본군을 공주로 파견하여 농민군의 진로를 봉쇄토벌코자 하였다. 따라서 농민군의 주력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11월 하순 이래의 효포이인 판치 우금치 전투를 벌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빈번이 패전하였다.
이 무렵 전봉준은 관구에게 농민군의 거병이 바노이세에 있으니만큼 구국의 대열에 함께할 것을 요청하는 고시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황해 충청 경상 강원도 등지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여 일본군또는 정부군과 싸웠다.
전봉준은 12월 중순에 논산까지 후퇴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논산 은진에서 다시 패하고 태인전투를 끝으로 뿔뿔이 해상하였다.
12월 말로부터 이듬해 정초에 이르기까지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의 지도부는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고 농민전쟁에 가담했던 농민들은 고햐응로 돌아갈 수 없었고 성을 바꾸거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의 일부는 의병전쟁과 활빈당 투쟁, 그리고 민족해방 운동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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