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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특집 [특집]
갑오동학농민전쟁 시민강좌ꊵ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규명을 둘러싼 제문제
이윤갑(2004-01-29 16:16:31)

1. 「동학난」,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1984년의 농민전쟁(=혁명)」의 역사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그간 크게는 세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첫째는 이를 「동학난」 혹은 「동학비당의 반란」으로 규정하는 견해였다. 이러한 견해를 가졌던 것은 당시의 봉건지배세력과 일제의 식민사학자 들이었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식민사학자들의 견해였다.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정체성이론과 타율성 이론을 양대 골격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날조해 내었고, 「1894년 농민전쟁」의 성격을 그 틀내에서 왜곡시켰다. 식민사학자들은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날조한 경체성론에 입각해 농민전쟁이 발생한 한말의 역사발전 단계를 고대사회 혹은 고작해야 내적 발전계기를 갖추지 못한 낙후한 아시아적 봉건사회라고 강변하였다. 그리고 그런 단계의 낙후한 사회에서는 봉건말기적 혹은 근대적 농민 전쟁이나 혁명이 발생할 아무런 객관적 주체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인식 위에서 식민사학자들은 농민전쟁을 다름 아니라 부정적 민족성인 당파성에 기인한 변란, 즉 일개 파당 이라할 동학당에 의해 야기된 당쟁적 사건(「동학비난」 「동학변란」)으로 매도하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을 일선동조론에 근거한 근대화 노력으로 미화하고, 농민전쟁의 반침략으로(=반일) 투쟁을 청의 원 세 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타율적 사건의 대표적 사례라고 억지부렸다.
농민전쟁에 대한 정체론적 인식은 일제 관학자들의 영향하에서 한국사를 연구하였던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 실증사학자들은 정체성론이나 타율성론에 공공연하게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말기 사회의 부패퇴락상만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사학자들의 정체성론 구축에 일조하고 있었다. 행방 후 남북이 분단되는 과정에서 남한의 역사학계가 이른바 실증사학파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로 인해 남한 학계에서는 「동학난」이라는 농민전쟁의 성격규정이 1950년대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물론 해방 후 남한 학계의 「동학난」이라는 성격 규정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가령 농민전쟁을 당쟁적 혹은 타율적 변란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부패한 봉건지배세력과 일제침략세력에 저항한 반봉건적 반침략적 성격을 갖는 종교운동으로 적극 평가한 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의 실증사학자들은 조선 말기 사회를 정체론적 시각에서 보는 점에서 식민사학자들과 기본적으로 공통되었다. 실증사학자들은 조선사회를 식민사학자들과는 달리 중앙집권적 관료적 봉건사회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규정은 용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한 낙후한 아시아적 봉건사회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식민사학자들의 아시아적 봉건사회론은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내재적 계기의 결여를 최대의 이론적 특징으로 하였다. 실증사학자들의 봉건사회론 또한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관료충의 횡포와 수탈을 극심하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을 갖춘다고 보았고, 그로 인해 봉건사회를 극복할 내재적 조건이 형성되기 어렵다고 파악하였다. 이런 인식에 근거해 실증사학자들은 농민정쟁을 관료층의 끝없는 가렴주구(삼정문란)로 인해 부패하고 정체하면서 붕괴로 치닫고 있는 현실 모순에 대한 농민들의 방어적 저항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봉건사회의 극복을 지향하는 근대변혁운동이 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봉건적 틀 내에서의 농민운동 따라서 구체적인 사회변혁사상 보다는 추상적 유토피아적 종교사상에 의해 지도되는 전근대적 농민운동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증사학자들이 농민전쟁 연구에서 동학사상을 중시하였던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실증사학자들의 봉건사회론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나 농민전쟁에서 제기된 근대적 요구나 지향을 설명하기 곤란하였던 것이고, 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해 근대적 요구나 지향은 내재적 산물이 아니고 외래적인 것 즉 서양사상의 도입 혹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창안된 것(=동학사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는 주로 천도교 측에서 제기한 견해로 농민전쟁을「동학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천도교는 3.1운동의 경험을 주요 기반으로하여 1920년대에 교리 사회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직후라 사회주의 사상이 조선내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천도교의 교리사회화 운동도 사회주의 사상을 영향을 일정하게 받게 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천도교의 역사 또한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천도교측은 농민전쟁을 민증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목표로 한「혁신운동」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성격규정은 농민전쟁에 대한 인식에서 획기적인 전환이자 발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교측의 「동학혁명」론은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큰 한계를 농민전쟁을「혁명」으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혁명일 수 있게한 요인을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에서 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동학사상의 근대성과 민족성에서 찾은 것이었다. 그 논리를 단순화시켜 보면 근대성과 민족성을 지닌 동학사상에 의해 전쟁이 지도되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봉건사회가 도달한 발전단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혁명이 된다는 것이었다. 혁명이라 규정하면서도 그것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시민혁명」 혹은 「민족혁명」등의 보편적인 혁명개념으로 표현하지 않고 굳이 「동학혁명」으로 부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러한 한계로 말미암아 「동학혁명」이라는 규정은 농민전쟁의 실체나 역사적 성격을 매우 제한적으로 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세 번째는 해방 후 남북한 역사학계에서 통설로 자리 잡은 견해로 그 성격을 봉건사회 해체기에 발생한 「농민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농민전쟁」으로 성격 규정이 가능하게 된 것은 해방을 계기로 우리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진전하여 조선 말기 사회가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도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이다. 농민전쟁론은 다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농민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전쟁의 발생 및 전개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을 중시하는 종교적 외피론 즉 「동학농민전쟁」론이다. 이 견해는 봉건사회 말기의 반봉건 농민투쟁이 그 고유한 한계인 지역분산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반봉건농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를 동학의 사상과 조직에서 찾는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론이 앞의「동학혁명」론과 다른 점은 후자가 농민전쟁의 근대성과 혁명성을 동학사상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만 보는데 비해 전자는 봉건사회 말기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반봉건 농민투쟁의 발전과정 소에서 이미 필연화 되었던 것이고, 동학은 다만 전쟁으로의 발전을 앞당기는 매개 계기 즉 반봉건 농민전쟁이라는 알맹이를 보다 앞당겨 갖추게 하는 「외피」열할을 하였다고 파악한다. 물론「외피」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동학사상과 농민전쟁의 지도이념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보며, 따라서 이 양자사이의 연관성을 해명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교적 외피론」은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앞서 진척시켰던 북한 학계와 일본의 조선사 연구자들에 의해 주로 1950년대 중반경에 집중적으로 제기 되었다.
둘째는, 「종교적 외피론」을 둘러 싼 논쟁과정에서 제기되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은 견해로, 동학사상과 농민전쟁의 지도 이념(=전봉준의 개혁사상) 사이의 차별성, 단절성을 부각시키는 독자적 농민전쟁론 즉 「갑오농민전쟁」론이다. 이 견해는 농민전쟁의 지도 이념이 된 전봉준의 개혁사상은 동학 사상과는 무관하며 조선 후기 이래의 실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파악한다. 실학사상 가운데서도 특히 다산 정약용의 개혁사상보다 구체적으로는 「경제유표」가운데 체계화된 개혁사상이 전봉준을 위시한 농민전쟁 지도부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또한 전쟁 수행을 위해 농민동원에 이용된 조직도 동학교문의 포교조직이 아니라 비록 동학의 최하부 조직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전체로서는 전봉준 등의 남접세력이 별도로 만든 조직으로 파악한다. 요컨대 이 견해의 특징은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반봉건 농민운동의 사상 및 조직 발전의 결정적 계기를 기본적으로 봉건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 나온 실학적 개혁사상과 반봉건 투쟁의 발전에서 구한 다는 점이고, 또한 동학의 그와 같은 역할을 부정하는 데 있다. 또한 이 견해는 갑오농민전쟁의 농민전쟁으로서의 한계도 분명히 하였다. 즉 갑오농민전쟁을 혁명적 부르조아지나 노동계급의 영도 없이 오로지 사회계급적 제한성을 갖는 소농민이 달리 말하면 그 자체가 과도기적 계급으로 독자적 근대사회를 수립할 능력이 없는 소농민이 주체가 되어 추진한 것이고, 그로 인해 투쟁을 봉건제도의 철폐문제와 결합시키지 못하는 중세기적 농민전쟁의 결함을 지니게 되고 말았다고 파악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은 어디까지나 봉전사회 말기의 사회경제적 모순에 저항하는 농민 전쟁일 뿐이지 결코 근대변혁을 목표로 한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견해였다.
셋째는, 18. 19세기의 조선사회에 대한 연구가 확대 진전하면서 1960년대 말 이래 주로 남한 학계에서 제기된 견해로, 농민전쟁을 「중세기적 농민전쟁」으로만 보지 않고 더 나아가 아래로부터의 근대 변혁을 추구하는 농민전쟁으로 보는 「갑오농민전쟁(=혁명)」론이다. 이 견해는 농민전쟁의 발생과정과 동학과의 관련성을 보는 점에서는 앞의 「갑오농민전쟁」론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차이를 보이는 점은 앞의 견해가 동학의 역할을 경직적으로 배격하고 있는 점에 비해 이 견해는 비록 부차적인 것으로 보지만 어느 정도 동학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견해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점은 농민전쟁을 지주적 변혁운동과 대립적으로 발전한 농민적 반봉건 근대변혁운동으로 위치지워 인식하는 것이다. 즉 농민전쟁을 경제적으로는 소농민 경제의 자립성 획득, 소상품 생산자로서 경제적 성장도모, 소상인의 상권을 지키고, 그들의 자본축적을 지향하는 것 등을 목표로 하고, 사회적으로는 양반층 중심의 공동체적 지배질서를 깨뜨리고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자유 자립의 획득, 봉건적 신분질서에서 해방된 평등사회의 실현 성취, 전국단위의 지배권력 장악 등을 지향한 아래로부터의 부르조아적 변혁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무론 이 견해도 농민전쟁이 직접적으로 부르조아 변혁을 표방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의 객관적 조건에 비추어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과 사회적 평등을 지향한 농민전쟁이 이미 중세기적 농민운동의 한계를 벗어나 농민층이 주체가 되는 자본주의 발전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창출해 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2. 성격규명과 관련한 몇가지 문제점들
1894년의 농민전쟁의 성격 규명을 둘러싼 농쟁에서 「동학난」이나 「동학혁명」을 주장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이다. 현재의 연구자들은 그것을 봉건사회 해체기의 「농민전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전쟁과 동학의 관련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또는 그것을 중세기적 농민전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근대변혁운동으로 위치지울 것인가를 놓고는 여전히 의견의 대립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민전쟁자체에 대한 사실적 연구가 진척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에 못지 않게 그 발생을 필연적이게 하였던 19세기말의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임술농민항쟁 이후의 반봉건 농민투쟁의 발전과정 등 전쟁의 주객관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 필요가 있다.
논쟁의 해결을 위해 보다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구체적 분야를 열거하면 먼저 개항 이후의 상품화폐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을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문제이다. 그 간의 연구에서는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주로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성을 부각시키는 문제의식으로 조명한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 연구의 주된 논리를 보면 개항 이후의 상품화폐 경제가 제국주의 의 침략과 고로 인한 대외 무역의 발전 및 그의 편승한 봉건반동의 강화를 주된 계기로 발전하였고, 그로 인해 내재적 자본주의 발전은 왜곡 내지 해체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는 한 갑오농민전쟁은 중세기적 농민전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비록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부각 시킬수는 있으나 개항후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극히 일면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고, 또한 그 논리가 적어도 갑오농민전쟁기 까지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점도 많다는 문제가 있다.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연구함에 있어 제국주의의 침략에 주목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내재적 자본주의 발전이 더욱 확대되고 농민층 분해가 격화되어 반봉건 투쟁 및 계급 계층간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어 간 사실을 올바로 해명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가렴주구 혹은 토색으로 표현되는 봉건지배 세력의 봉건반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시기의 봉건적 수탈이 전시기에 비해 더욱 강화되었고, 농민경제는 그로 인해 파탄상태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농민전쟁을 중세기적 농민전쟁으로 규정짓게 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많은 반성을 요한다. 우선 임술항쟁 이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검토한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실제 이 기간에는 호포법이 단행되고 양전이 시행되고 일부 환곡이 사창으로 전환되는 등 농민들의 부세부담을 완화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또한 무단토호가 징치되고 서원이 철폐되는 등 양반들의 신분제 지배도 급속히 약화되어 갔다. 이러한 변동을 초래한 기본적 계기는 임술항쟁 등과 같은 피지배 농민층의 반봉건 투쟁이었다. 반봉건 투쟁을 봉건지배세력의 이와 같은 양보를 계기로 더욱 확대 강화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농민전쟁이 발생한 19세가 말의 객관적 사회경제적 조건은 봉건지배체제가 약화 내지 해채 되고 있는 반면 반봉건 농민투쟁이 확대 강화되는 이른바 혁명적 위기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료에 빈번히 등장하는 봉건지배세력의 가렴주구와 농민들의 항쟁을 기계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혁명적 위기라는 조건을 염두에 두고 역사주의적으로 해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임술항쟁 이전 시기에는 농민들이 거의 문제삼지 않던 수탈조차 집단항쟁(=민란)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될 정도였던 것이다. 농민전쟁은 봉건지배층의 수탈 강화에 기인하는 방어적 성격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임술항쟁이후 반봉건 투쟁을 더욱 확대 강화시켜 간 피기배 농민층의 공세적 변혁투쟁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셋째는, 소빈농층의 이해에 입각해 사회개혁을 모색하였던 농촌지식인의 사상적 동향을 해명하는 작업이다. 농민전쟁은 농민층이 주도하였지만, 그들의 이념적 사상적 지도를 담당하였던 것은 혁명적 농촌지식인들이었다. 전봉준이나 이기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 존재였다.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다산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18, 19세기의 실학적 개혁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갑오농민전쟁은 농민들의 사회계급적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에서 혁명적 농촌지식인들과 결합함으로써 근대 변혁을 위한 공세적 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봉건적 경제제도와 사회제도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한 집강소의 개혁요강에서 그러한 전환은 보다 분명히 각인되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전쟁에 가담해 농촌 지식인들의 사상적 동향과, 아울러 독립 장영농 체제에 근거한 그들의 근대 변혁론의 한계를 올바로 해명하는 작업은 갑오농민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데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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