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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특집 [특집]
갑오농학농민전쟁 이후의 이야기
송기숙(2004-01-29 16:17:27)

필자와 역사학자 사이에는 많은 점에 있어서 시각차가 나타납니다. 물론 필자도 역사학자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어떤 일정한 주제로 접근해 들어가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필자는 살아있는 그 당시 사람들이 정치, 경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총체적으로 보려하는 반면 역사학자는 단편적인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차이가 납니다. 잠시 후에 언급되겠지만 예를 들어 전주화약의 원인이 무엇이냐를 따질 때 청․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 화약을 맺게되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 하나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농민전쟁 전체 흐름으로 보아 백산에서 전국적 집회를 가지게 되고 황토재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게되며 전주에 입성하게 되는데 이런 승전 상황에서 화약을 맺게 된 이유가 단순한 외부적 조건만으로는 제대로 설명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현장을 조사 다닐 때 가능하면 농민 전쟁때의 계절에 맞춰서 다니고 있습니다. 전주 완산지방쪽을 조사하려고 할 때도 계절에 맞춰서 했는데, 전주화약을 맺는 그 때가 바로 소위 6월 망종이었습니다. 바로 모를 삼을 때이지요. 필자도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아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보리 타작을 하고 모심는 시기라 농촌에서는 굉장히 바쁠 때이지요. 농민들이 백산에 모인 것이 3월20일 (대게 음력으로 한달 쯤 차이가 있으니 양력 4월 20일이 되겠는데)인데 이때가 겨우 보리가 필 무렵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때가 보리고개의 절정이지요. 그때에는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의지가 대단히 강했습니다. 이것이 거기에 농민들이 모여든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벌써 6월에 들어서 전주에 입성을 했을 때는 집에 가면 보리타작을 할 때로 1년중 가장 바쁘고 고된 때입니다. 보리타작을 하고 모를 심어야 되는데 이를 놓쳐버리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주화약을 맺게 된 가장 중요한 내부적 조건의 하나는 그때가 가장 바쁜 농사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생활을 바탕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민중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작가들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이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무시해 버립니다. 실제로 작품을 쓸 때 필자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이 왜 갑자기 화약을 맺었나? 현장에 와서 보니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이화씨도 그때가 바쁜 농사철이라는 것을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와 필자는 생각을 달리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논리적인 이야기보다는 바로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겠습니다. 호남지역에서 왜 농민전쟁이 일어났습니까? 농민들의 고통스런 환경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똑같은데 어떻게 전라도에서는 일어나고 경상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부분은 소설의 상상력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어느 면에서는 지극히 비역사적인 설명이라 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점에 대하여 몇 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적인 상상력이라고는 하지만 소설가는 적어도 리얼리티를 추구합니다. 현실에 가장을 두고 개연성에 의해 글은 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점은 앞으로 역사학자들이 많이 설명해 내야할 부분입니다.
농민전쟁을 어떻게 보느냐? 크게 나누면 동학운동론(동학혁명론), 농민전쟁론(농민혁명론). 절충론 등으로 분류합니다. 요사이 소장학자들은 농민전쟁론으로 분류하고 여기에서도 갑오농민전쟁이라 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동학농민전쟁이라 부릅니다. 동학농민전쟁 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동학이라는 종교사상과 조직이 농민전쟁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측면을 중시하고, 갑오농민 전쟁 혹은 혁명이라고 부르는경우는 그것을 과소평가하거나 거의 무시해 버렸을 때 명명됩니다. 갑오냐, 동학이냐 하는 것은 이런 차이인데 이 전쟁의 장기적 전망과 역사발전론을 관련시켜 볼 때 이것이 전쟁이냐 혁명이냐 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발전법칙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려는 것을 역사주의라고 합니다. 역사주의는 너무 도식적입니다. 사실을 법칙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발전법칙이라고 하는 신을 갖다 놓고서 거기다 발이 안 맞는다고 발가락을 자르고 뒤축을 자르고 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습들은 놔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지난번 한길문학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 16세기 독일농민전쟁을 레닌이 어떻게 평가하였습니까. 민초를 대단히 중요시했습니다. 여기서 레닌도 얘기할 때 역사해석을 도식적으로 하지말고 그 역사발전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학이 조직에서부터 이념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기여한 당시, 농민에게 파급되었던 동학도의 수적규모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습니다.
익산이 접주였던 오지영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쓴 “동학사”를 보면, 1892년 8월 무장 선운사에서 손화중이를 비롯한 동학도 들이 미륵비결을 꺼내 갔다는 소문이 나니까 세상이 발칵 뒤집혔답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망하고 그 비결을 꺼낸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 벼락살을 다스리고 동학도와 손화중이가 그 비결을 꺼냈으니 말입니다. 그후 몇 달 사이에 손화중의 집에는 수만명의 새로운 동학도가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거의가 동학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동학예식이라고 하는 입도 예식은 간단합니다. 고개 숙이고 물을 부을 때 “내가 동학도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 다음 가장 확실한 일차자료가 ‘동학사’와 구례에 있던 황매천의 ‘오하기문’입니다. 물론 농민전쟁 전체의 움직임을 동학도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하기문’에 보면 여비를 마련해서 보은으로 모여든 사람이 8여명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동학도 뿐만아니라 다른분류의 사람도 모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직부터 거의 동학조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동학사살상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 진보적인 학자로는 정창렬씨가 있는데 그조차도 동학경전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학경전은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허구화된 주자학의 윤리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견실한 태도(어른이나 자연에 순종하는 마음)를 강화해서 우리의 의식속에 내면화 시키자는 것이지요. 그 논리에 의하면 소위 후천개벽이라고 하는 것도 혁명사상이 아니라 종교적인 변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동학사상에 대해서 정창열씨만큼 명확하고 정치하게 설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필자도 그 부분에 대한 그의 해석을 인정합니다만 그때 농민전쟁에 동학이 이념적으로 관여한 부분은 경전이 아니라 경전에 들어가지 않은 그 당시 최시형을 포함한 동학접주들이 지니고 있었던 구체적인 실천사상이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실천사상은 평등입니다. 인내천이라는 표현이 처음 기록에 나온 것은 손병희 때이지만 이미 이때 평등사상이 이 사람들의 포교의 기본이 됩니다. 이에 관한 행적담이 있습니다.
최시형이 자기가 잘 아는 가난한 신도집에 들어갔는데 행랑채에서 그집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습니다. 항상 들어 다니는 집이기 때문에 며느리가 베를 짜는 줄 알면서도 주인이 나오니까 “누가 베를 짜고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습니다.”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내가 실컷 가르쳐도 당신은 그렇게 대답합니까 한울님이 짜고 있다고 대답하세요. 며느리가 짜고 있는 줄 압니다. 내가 지금 물어본 것은 동학사상에 따라 어느 만큼 수행을 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울님이 짜고 있다고 대답하라고 한 것 바로 여기에 인간은 곧 하늘이라고 하는 인내천 사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며느리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고, 사회신분으로는 종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완전한 평등사상이지요.
1891년경 농민전쟁 발발 3년전 최시형이 전라도에 내려옵니다. 이때 전라도에는 편의장이라고 하는 접주들이 대표기구가 있었는데 우도 편의장은 윤상우라고 하는 양반출신이고 좌도 편의장은 남계천이라고 하는 전주출신의 종이었습니다. 최시형이 내려오니까 전라도 동학접주들이 모두 모여 가지고 도대체 종놈을 갖다가 어떻게 접주로 세웁니까? 우리가 어떻게 종한테 가서 굽실거리겠습니까? 라고 항의합니다. 그러니까 최시형이 “너희들 왜 그러느냐? 반상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관념이 아니냐 지금 너희들 동학접주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그런 반상의 관념에 젖어 있는 것이냐?”라며 질책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거의 향반으로 출세한 유식자이기 때문에 접주들은 그 말이 맞는데 실천이 안된다하여 또다시 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놈들이 무슨 동학도들이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윤상우를 동학 편의장에서 빼버리고 남계천을 좌․우 편의장, 전라도 전체의 우두머리로 정해버리고 올라갑니다.
이 정도로 평등사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실천합니다 그는 못된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이 후천 개벽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보다 먼저 최제우는 여종이 둘이 있었습니다. 여종 하나는 며느리로 삼고 하나는 수양딸로 삼습니다. 종의 신분을 그대로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바로 인내천이라는 소리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늘이라는 소리는 바로 주자학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제우의 ‘칼노래’가 동학경전대전에서 빠진 것도 그것이 지나치게 전투적인 것이 어서입니다. ‘좌도난정’의 구체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내천이 라는 말도 구체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 손병희가 일제시대에 와서 천도교를 세울 때 구체적으로 표방하게 됩니다.
인내천 사상은 평등사상입니다. 이 평등사상은 단순한 산술적, 관념적 평등사상이 아니라 아주 내용 있는 평등사상입니다. 종도 하늘이다. 양반도 하늘이다. 임금도 사람이니까 하늘이다. 모두가 하늘만큼 위한 상태라고 하는 점에서 평등한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말은 안썼지만 인내천이라는 말을 씀으로 해서 구체적으로 사람은 하늘만큼 귀한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그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이런 사상들이 밑바닥 사람들한테 얼마나 깊게 먹혀들어 갔겠습니까? 평등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변혁사상이 민중들에게 호소 했을때 많은 민중들이 호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백산집회때 제일 강력한 부대가 손화중 부대라 하는데 이들은 무당, 백정, 사당패등 최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동학은 내세관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후천개벽을 한다는 현실사상입니다. 하늘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평등하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매개로 내세워진 것이지 하늘 자체를 종교적 신비의 대상으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동학자체가 종교적인 형식을 빌린 사회변혁 사상이지요. 그리고 ‘동학’ 이라고 한 것은 서구의 서학이라는 말에 대하여 붙인 것으로 민족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체적인 실천면에서 필자는 동학을 이렇게 봅니다. 농민전쟁의 경우에 동학의 중요한 실천사상이었던 인내천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변혁사상이 기본적 이념으로 크게 역할한 것입니다. 주자학은 무자비한 사상이었습니다. 이 주자학에 대해 농민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 “양반과 부호와 관리들이 우리를 이렇게 수탈해 가니까 저놈들을 때려부수자.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임금이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주자학을 때려 부숴야 한다. 주자학을 그럴 때 바로 저놈들도 내 밥을 빼앗아 먹으니까 저놈들을 없애 버려야돼. 나는 하늘인데 하늘을 모독 한놈. 양반들도 마찬가지로 때려 부숴야 돼. 임금이란 놈도 내 밥을 빼앗아 먹어. 임금도 나쁜 놈이다. 이것도 쳐 없애야 된다.”이렇게 주자학에 대항할 만한 사상으로 하늘하고 임금을 대항시켜야 국민들이 납득을 하지 철저하게 그야말로 시멘트처럼 굳어 있는 주자학 사상을 어떻게 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그 당시의 동학이라고 하는 종교가 농민전쟁의 이념 형성에 그야말로 기본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럼 왜 구백제권(충청.전라)에서만 농민전쟁이 일어났느냐? 이것은 요사이 지역감정이 원인을 삼국시대로 까지 끌고 올라가는 위험을 안고 있는 논리입니다. 장길산을 쓴 황석영씨는 주자학에 대결해서 벽혁을 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로 미륵사상을 잡았습니다.
미륵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를 변화시키는 사상입니다. 석가모니의 아미타신앙은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에 의해서 서방정토에 간다는 것인 반면에 미륵신앙은 2가지가 있는데 구 신라권에서 믿던 미륵탄생경과 구백제권의 미륵사생신앙입니다. 미륵탄생경이라는 것은 인간을 현세적인 계급에 의해 1품, 2품, 3품으로 나누고 미륵이 도솔천이라고 하는 고에서 천인중생을 계도하고 있는데 1,2품이 죽으면 그곳으로 올라가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올 때 함께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생경은 이 세상에 나올 부처를 천명으로 보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네 번째 부처이고 미륵부처가 이세상에 나오 다섯 번째 부처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미륵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돌부처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은 아무튼 미륵이 도솔천에서 이세상에 내려와 커다란 언덕의 용화수에서 세 번 법회를 여는데 누구든지 그 법회에 참여만 하면 전부 용화셰계에 들어갑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몇 사람만 계도하다 말았지만 미륵이 시세상에 오면 전부를 계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륵을 석가보니보다 훨씬 크게 보는 것입니다. 미륵은 석가모니 제자로서 젊어서 요절을 했기 때문에 미륵부처의 특징은 젊고 큽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계도하는 만큼의 크기와도 비례합니다.
신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통일신라 이전 화랑제도가 생길 무렵에는 미륵신앙이 불교 신앙 이었습니다. 이때 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져 전체가 서로 위기의식에 처해 있었습니다.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용화세계를 세운다고 하는 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에서는 화랑제도를 제도적으로 확립하였습니다. 화랑이라고 하는 것은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왔을 때 미륵세상을 세울 향도, 용화향도입니다. 물론 백제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의 내용들과는 다릅니다. 신라가 통일하면서 위기의식이 사라지면서 현세적인 신앙이 아니라 귀족중심의 소위 정통신앙으로 바뀝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선행을 하느냐 하는 신앙으로 바뀌고 미륵신앙은 구백제권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신라가 안정기를 거쳐 쇠퇴기를 들어가면서 지배층의 수탈이 굉장히 심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저들을 전부 였다고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염원이 신라 민중의식의 바탕에 깔려 이 미륵신앙이 일반민중신앙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 백제권의 저항이 원체 세었기 때문에 이 미륵신앙을 제도 권안 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긴박한 일이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금산사입니다. 진표스님이 신라정부에서 돈을 받아 미륵삼도량이라고 하는 금산사, 법주사, 단련사 등 세 절을 지어 제도권에서 내평개쳤던 미륵신앙을 제도권 안으로 끌여 들이면서 점찰법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미륵신앙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라왕조에 저항할 수 있는 이념적 토대가 됩니다.
점찰법에서는 점찰경이라고 하는 경전을 가지고 점을 치는데 ‘네가 지금 못하는 것은 과거의 나쁜 업원때문’이라고 점을 쳐줍니다. 이것은 구백제권 민중의 고통을 개인업보로 개인화 시켜버려 저항의식을 숙이게 하려는 반동적인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후 삼국때는 어떻습니까? 궁예 자신이 내가 미륵이라고 자처하고 나섭니다. 견훤도 나는 금산사 미륵이다라고 미륵을 자처하고 나옵니다. 미륵사상은 현세적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 민중들의 소망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회 변혁의 중심사상이 되어 고려시대까지 계속해서 내려옵니다. 그것이 고려시대까지 계속해서 내려옵니다. 그것이 고려시대 와서는 도선이 도참사상을 바탕으로 구백제권을 중심으로 해서 내려옵니다. 이것이 농민 전쟁이 일어 날 때 바로 선운사 미륵속에 있는 비결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현세적인 민중들의 생활원리가 되어 사회변혁의 원리로 작용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소위 호남지역 사람들의 기질을 보면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 지역 사람들이라고 원나라 기록에도 나옵니다. 병자호란 때에도 남한산성까지 쫓아 올라가 제일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 바로 전라도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난 이후 경상도에서는 18군데 전라도에서는 36군데에서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대 가장 강렬하게 싸운 지역이 전라도인데 이쪽이 수탈이 더 심했기 때문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이쪽 사람들은 불의에 대항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학에서는 기질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역사적 요인으로 잡지 않습니다만 이런 기질이 역사를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농민전쟁에서도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농민전쟁 뒤에 있었던 의병 전쟁의 경우 1기, 2기는 양반들이 어떻게 해서 벼슬이나 얻어볼까 해서 일어난 것이고 1909년 한일 합방직전에 일어난 제 3기 의병은 농민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라남북도에서 전국의 79%가 일어납니다. 구례 연자평이라는 곳에서는 한 동네 사람들이 나가면 30~50명 단위가 되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전라도가 가장 크게 일어납니다.
이때 일본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남조선 대토벌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남조선하면 한강이 남이 되어야 할텐데 토벌작전은 노량상맥 남쪽으로 북으로는 부안, 동쪽으로는 섬진강, 바다는 군함으로 완전포위를 하여 일본군 2개연대가 동원되어 토벌작전이 전개됩니다. 이때 제일 많은 의병을 거느린 사람이 광주에서 일어난 심만일이라는 의병장으로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의병이 지닌 무기는 몇 사람은 조총이고 모두 다 대창이었습니다. 소작쟁의 같은 반봉건 투쟁도 전라도에서 가장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소작쟁의 같은 반 종건 투쟁도 전라도에서 가장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건, 농민전쟁 이런 것들 모두는 정통성을 재대로 확보하지 못한 집권층에 대항한 것입니다. 정통적 요구를 누가 실현하느냐 할 때 바로 이 지역 농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민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이 민족의 정통적 요구를 대표적으로 실현한 것입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못된 정권에 대하여 반항했지 제대로 된 정권에 대해서는 반항한 적이 없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병자호란때 임금을 지킬려고 싸웠고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 반골 이겠습니까? 손 놔두고 일본놈 하고 안 싸우고 의병이 안 일어나고 농민전쟁이 안 일어난 사람들이 반골 이겠습니까? 이쪽사람들은 민족전체의 정통적 요구에 충실하게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왜 농민전쟁이 전라도에서만 일어났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필자의 대답입니다. 농민전쟁이 전라도에서 일어난 이유를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만 가지고 설명한 다면 똑같은 원인이 있었던 경상도에서는 왜 안 일어났느냐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그 이유를 정통성에서 설명해야 합니다.. 필자는 이런 것에 대해서 하나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무지랭이였던 농민들의 위대한 정신에서 우리민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현실에 살려내고 싶고 역사에 대한 우리 민족의 낙관적 전망을 하고 싶은 것이 내가 「녹두장군」을 쓰는 의도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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