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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특집 [특집]
장수 삼절과 적상산 단풍
윤승용 한국일보 기자(2004-01-29 16:59:21)




먼저 고백할 것 몇가지가 있다.
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출향한지 15년동안 고향은 내게 거의 잊혀져 버렸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 휴가때나 대학방학시절 잠깐 스쳐지나는 것을 제외하면 단 며칠씩도 머물지 않았던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고교시절의 친한 벗들이 대개가 서울 언저리로 기어 올라와 살았던 탓에 친구 결혼을 빙자해 내려올 기회도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 9월말 갑자기 비록 시한부지만「전주주재 기자」로 낙향(?)을 명받았다. 지방화시대를 맞아 지방소식을 보다 넓힌다는 취지아래 회사측에서 기존의 서울편집국기자 10여명에 대해「고향앞으로 가!」라고 전보발령을 낸 것인데 필자뿐 아니라 함께 방이 붙은 대부분 동료들도 마치 사지(死地)에나 가는 것처럼 죽을 상을 지었다.
부임장을 받고 다시 찾은 고향 전주는 어느덧 내겐 타향으로 다가왔다. 전국체전을 준비하느라 도심을 새로 단장한 탓도 있지만 길도 새로 뚫린데다 제법 큰 건물도 여럿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도시외관이 바뀐 것보다도 10대후반에 어줍잖은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 낼 수 있었던 전주다운 풍물들, 예를들면 한 천원돈이면 적당한 막걸리와 함께 포식을 할 수 있었던 후문집, 풍남집등의 선술집과 남부시장 부근의 바나나빵집 그리고 오면가면 마주칠 수 있었던 동그스럼한 친구들의 얼굴들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여장을 풀자마자 취재원 확보를 위해 전주의 「소식」들이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나돌아 다니던 차에「문화저널」에 대한 얘기를 친구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전주와 전북을 사랑하는 꾼들이 모여 매월 잡지도 펴내고 향토답사도 다니는 모임이 있다』는 거였다.
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만해도「시골에서 뭐 제대로 일하는 곳이나 있겠나. 자기들끼리 모여 신세한탄이나 하는 조그만 소그룹 동인들이겠지」라고 생각했던게 솔직한 심정이다. 전주시 중앙동 코오롱스포츠 5층 건물 옥상의 허름한 가건물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이같은 예단이 필자의 문화저널에 대한 전부였던 것이다. 5층에 이르기까지 수험학원계단의 울긋불긋한 강좌안내 포스터며 허름한 외관을 한 가건물등이 그러한 판단을 더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 기자생활 7년동안 나름대로 터득한 재빠른 눈썰미로『야! 이곳이 보통곳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희숙씨의 친절한 안내로 필자는 단번에『야! 멋진 곳이구나』라는 느낌이 금방 드는거였다. 그 간의 활동상황을 대충 취재(?)하고 손에 착 달라붙는 적당한 부피의 「문화저널」기간호를 훑어본 뒤 필자는 그 자리에서 즉각 정기독자로 가입했고 22회 백제기행에 동참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문화저널과의 만남은 바로 이렇게 시작했다.
각설하고-.
문화저널이 22번째 백제기행을 떠나는 날은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시간에 맞추어 나오긴 했으나 시청주변에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다소 헤메다보니 10여분이나 지각을 해 버렸다. 그러나 시청 뒤편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우진문화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듯한 여행사 버스도 눈에 뜨이지 않고-. 벌써 떠났을까? 조바심이나 허둥대는데 길건너편에서 덩치 큰 정우성씨를 발견, 겨우 막차로 차에 올라 좌석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서로 낯이 익은지 정답게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느라 바쁜모습. 예정보다 30분 늦게 상오 9시 30분에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는 요리조리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가 이내 진안행 국도에 들어섰다.
창밖은 본격 단풍철이 지나서인지 빛바랜 고엽을 달고 서있는 활엽수만이 올망졸망하게 돌어선 야산이 한동안 계속됐다. 진안에 가까워지면서 부터는 산세가 제법 험해지더니 말로만 듣던 아흔아홉고개 모래재가 등장. 낡은 원대버스는 힘들여 굽이굽이 돌아올라야 했다.
상오 10시 50분.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인 논개사당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향토사학자 유기열씨(장수 의료보험조합장)가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유기열씨는 환갑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논개님에 대해 1시간여동안 설명을 베풀었다.
장수는 흔히 삼절(三絶)의 고장이라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때 진주 남강가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살신호국한 의암 주논개를 비롯 죽음을 무릅쓰고 단기로 왜군에 맞서 장수향교를 지켜낸 충복 정경손, 여기에 자신의 책임을 못다함을 통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무명(無名) 마부(馬夫)가 바로 이 고장 출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조 최대의 명정승인 황희정승도 이곳 장수출신이란다. 인구 5만도 채 안되는 변방산골에서 이처럼 충신, 명현이 배출됐다니 대단한 곳임에 틀림이 없다.
평생을 논개 현창 사업에 몰두했다는 유기열선생은 적절한 비유와 다양한 전적(典籍)등을 근거로 논개의 일생, 특히 논개가 결코 기생이 아니라는 사실과 논개의 유택을 장수땅에 모시지 못한데 대한 열변을 토해 우리 일행을 숙연케 했다. 아! 저 나이에 도대체 무얼바라고 4백년전의 한 여인의 삶에 인생을 바쳤을까. 논개의 이력은 거의 전적으로 유선생과 오치황선생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논개는 임란발발 18년전인 1574년 9월 3일 현재의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부락에서 훈장 주달문(朱達文)과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주달문은 이에 앞서 아들 하나를 얻었으나 15세 되던 해 괴질에 의해 여의고 말았는데 그 후 40이 넘도록 후사가 없자 장수명산 장안산에 백일기도를 한 끝에 자식을 하나 얻었는데 이 분이 바로 논개였다. 그런데 논개의 사주가 소위 갑술(甲戌)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여서 모두들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 같은 사주를 이른바 사갑사주(四甲四柱)라 하는데 이 같은 사주를 타고난 사람은 반드시 후에 대업(大業)을 이룬다는게 주위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주달문 부인의 사주 또한 4갑술 사주였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에게 4갑술의 뜻을 새겨 경상도방언(장수는 경상도와 가까다)으로 『개를 놓다(낳다)』는 뜻이 담개 논개(論介)라 이름지어주고 자신이 강학을 하는 서당 한켠에 앉혀 문자와 예도를 가르쳤다.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총명하게 자라던 논개는 13세 되던 해 부친이 병사한 후 세파의 시련에 시달려야 했다. 논개의 숙부중에 주달무라는 이가 있었는데 주색잡기와 노름에 미친 왈패였다. 주달무는 돈에 쪼들린 나머지 논개식구 몰래 논개를 지방 토호인 김풍헌(金風憲)에게 민며느리로 넘기기로 하고 엽전 3백냥등을 챙겨 달아난 것이다. 결국 김풍헌의 제소에 의해 논개 모녀는 관아에 끌려가 판결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천행이랄까. 당시 장수현감은 후에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명현 최경회(崔慶會)였는데 최현감은 논개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이들을 무죄 방면했다. 게다가 의지할 데 없는 논개 모녀에게 내아에 머물면서 병약한 최현감 부인의 시중을 들도록까지 선처를 베풀었다. 논개의 인생항로가 바뀐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런데 임란이 터져 최현감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직을 받아 진주성에 입성하게 되었고 논개도 부군을 따라 뒤늦게 진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논개가 진주성에 입성한지 2개월도 안되어 진주성은 왜장 게야무라 호꾸즈께(手??六?)가 이끄는 20만 대군 앞에 결국 함락되었고 최장군 또한 분을 이기지 못해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성이 함락되자 평민들속에 스며들어 숨어있던 논개는 『7월 7일 촉석루에서 승전연회가 있으니 기생들은 모두 집결하라』는 방을 보고 진주의 수안(首安)기생을 불러 자신을 기적에 올리도록 했다. 드디어 운명의 칠석날은 다가왔고 논개는 곱게 치장하고 촉석루연회에 참석했다.
남강변 바위로까지 적장을 꼬여 춤을 추던 논개는 대취한 적장을 힘껏 끌어안고 남강 푸른 물에 뛰어들어 함께 생을 끝맺었으니 이때 논개나이 방년 19세였다.
논개의 충절은 후세사가, 시인묵객들이 앞다투어 찬양했는데 우리가 아는 수주 변영로님의 「논개」도 그 중의 하나.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유기열선생은 마지막으로 논개의 무덤이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 있는 이유를 덧붙이며 다소 흥분하였다. 논개의 무덤을 찾은게 바로 자신이었다는 유선생은 4백여년이나 논개의 유해를 찾아내지 못한 실없는 사학자들을 탓한 것이다. 논개무덤을 찾은 과정도 흥미롭다. 논개가 남강에 투신한 후 장수에서부터 최장군을 따라간 의병들은 왜적 몰래 강물속을 뒤진 끝에 한달여만에 팔지를 낀 손으로 왜장을 껴안은 채 숨진 논개를 인양하는데 성공했다. (무쇠팔찌를 낌으로써 왜장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한 그 지혜는 어디서 나왔을까?) 대충 시체를 수습하고 장정 서넛이서 걸머메고 장수로 향했는데 지금 함양땅에 이르러 왜군일당이 장계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확인. 어쩔수 없이 방지부락 뒤편 삼남대로변에 안장하고 후일을 기약한 채 돌아 장수로 돌아왔다.
이 같은 사실과 전설을 근거로 유선생은 무려 14번이나 진주-함양간을 왕래한 끝에 진주에서 밤을 새워 장정들이 갈 수 있는 거리인 방지부락 뒤편에 「신라왕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큰 무덤을 발견했고, 문공부에 이를 신고한 끝에 논개무덤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문공부 직원들도 유선생이 진주-함양간을 14번이나 오가며 직접 「장정걸음걸이」로 재보았다는 데는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논개는 결코 기생이 아니라 몰락한 서생집안의 고명딸이었고 비록 후처였으나 최경회장군의 어엿한 부인이었단느 것이다. 논개가 기생을 불리운 계기는 조선조 문필가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기생」이라고 기록한게 첫 시작인데 이를 그냥 인용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유기열서생은 유몽인은 임란 당시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로 이씨왕조의 왕자들을 따라가 진주에서는 까마득한 평안도에 머물고 있었으며 때문에 논개의 행장을 직접 목격한게 아니라 풍문ㅇ르 전해듣고 쓴 것이라 믿을게 못 된다는 것. 또한 흔히 의기(義妓) 논개 할 때의 한자「義」자는「의로운 기생」의 뜻이 아니라「義首」「義足」할 때처럼 「~를 대신한다」는 뜻도 있으므로 「기생을 가장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논개는 촉석루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논개사당은 지난 53년 논개 순국 3백 61주년을 맞아 지역주민들이 주논개 사적보존위원회를 조직하고 건립에 착수, 2년만인 55년 10월 3일 완공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갹출한 성금으로만 짓다보니 너무 초라하고 비좁아 지난 74년 현재의 곳으로 이전 확장했다. 자유당 시절의 함태영 부통령의 글씨로 된 의암사(義岩祠)란 현판이 걸린 사당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글니 논개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뜨락에는 논개의 충정을 새긴「촉석의 기생장향견명비」가 세워져 있다. 끝날줄 모르는 유기열선생의 구수한 논개송(論介訟)을 들으며 장수향교를 거쳐 무주로 향했다.
해발 5백여 m의 고개를 오르내리기 몇 번, 낡은 버스가 숨이 턱에 찰 즈음인 하오 1시에 무주 안국식당에 도착했다. 각종 산채나물과 별미인 모래무지 조림등으로 시장한 배를 채웠다. 모처럼 시골 한정식으로 포만감을 누렸다. 더구나 주인이 애지중지하는「오미자술」맛까지 즐기는 기쁨을 누렸다.
다음 행선지는 적상산의 단풍과 사고지 및 안국사, 단풍이 들면 여인이 붉은 치마를 두릇 듯 하다고 해 적상산(赤裳山)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적상산은 해발 1철 30m에 달하는 꽤나 높은 험산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공사를 위해 새로 개설한 한전진입도로를 이용. 비교적 편하게 해발 8백m까지는 오를 수 있었다. 절정에 달한 적상산의 단풍에 넋을 잃은 채 굽이굽이를 돌아 상부탬 근처인 산성부근에 이르자 들넓은 대평우언이 펼쳐졌다. 그러나 상부탬 수몰예정지의 수목을 잘라내고 불도저로 밀어버린 대평원은 계곡의 원시림과 비교돼 큰 충격을 주었다. 전력생산을 위해 도대체 자연을 이처럼 송두리째 거덜내도 된단 말인가. 무주 양수발전소는 지난 87년 착공됐는데 사고지 부근인 표고 8백50m 지점에 상부댐을 쌓아 그 낙차를 이용, 60마kw의 전력을 생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상부댐 수몰지역(5만 5천평)과 상부댐 토석채취장(1만 3천평)일대는 태고의 수목과 각종 희귀식물의 군락지였는데 이번 댐공사로 벌린 상채기가 난 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해발 8백여m 이상에 거의 10만여평에 달하는 고원분지가 위치해 있어 예부터 산성을 쌓고 왕조실록 사고를 이 곳에 세우는 등 말 그래도 나라를 편안하게(安國)하던 곳이 폐허가 되다니-. 고려충렬왕 3년에 창건됐다는 안국사도 머지않아 물 속에 흔적도 없이 잠겨 버리리라. 장수고을에서는 선혈의 얼과 넋을 기리는 사업이 한창인데 한 켠에서는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괴를 일삼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감상과 분노에 젖을 틈도 잠시, 갑자기 하늘이 시커머지며 비구름과 돌풍이 몰아닥쳐 일행은 안국사와 사고지 탐방을 생략한 채 적상산 종주에 나서야 했다. 무주에서부터 들고온 막걸리와 시골김치로 허기를 다시 채운 뒤 적상산 주능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네 카메라를 맨채 맨 앞에서 리드하던 이흥재선생님 한동안 안보이더니 뒤늦게 헐레벌떡 나타났다. 안국사까지 내려가 몇커트하고 왔다고 한다. 대단한 사람이다. 문득 유기열 선생의 고집스런 얼굴과 이흥재 선생의 해맑은 얼굴이 대비가 돼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채왕석 회원의 채근에 따라 쉴 사이도 없이 30여분의 강행 끝에 주능선에 올라서니 운무가 발아래 가득하다.
잠시 숨길을 고른 뒤 다시 하산.
서창 마을에 다다른 것은 해가 산그늘에 숨어 들려는 하오 4시50분이었다.
약 4km의 계곡길을 불과 1시간만에 주파한 것이다.
전주로 돌아오는 찻속은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다는 이상훈씨의 멋진 노래솜씨로 지루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종 민주간의 기지넘친 화술도 크게 한몫 거들었고.
첫 번째로 참여한 백제기행은 참으로 뜻이 있었다. 다소 느슨한 일정에 의해 안국사와 사고지 등을 생략하는 등 흠잡을 데가 없진 않았지만 가뜩이나 문화적 토대가 협소한 전북에서 22번이나 이런 행사를 이끌어온 다는게 결코 쉽진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조그만 살림이지만 문화저널의 넉넉한 인정이 계속되길 빌며 내년 1월의 운주사행에도 동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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