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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 | 특집 [2002전주국제영화제]
2002 전주국제영화제 되돌아보기전주영화제, 그리고 즐거운 기억들
이진우 단편영화 감독(2003-03-26 16:04:14)

나처럼 영화와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라면 국제영화제 혹은 영화제는 천당이자 곧 지옥을 의미한다. 일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영화들의 홍수라는 즐거운 비명 속에서 어떤 영화를 우선적으로 감상할 것인가의 선택이 고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 때문에 영화제라는 잔칫상을 제대로 받으려면 오랫동안 꼼꼼히 감상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의 상영시간이 중복될 경우 한 영화를 포기해야만 하는 고통역시 뒤따르기 마련인데, 올해 3회 전주영화제는 그 고통이 아주 심한 영화제였다. 여하튼 개막 전날 밤 12시까지 애쓴 보람으로 나는 한 장의 감상시간표(?)를 마련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사실 난 이번 전주영화제의 화두 전쟁과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매력적인 부분은 미국 독립영화와 디지털의 개입 부분이었다. 파졸리니 영화들은 서울 상영회를 핑계로 감상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한국단편의 선택 비평가주간은 대부분 이미 본 영화들이라는 이유로, 애니메이션은 개인적 취향을 빙자해서 시간표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는 계획은 진짜 계획이 아니라고 했던가? 마이크 피기스의 호텔을 비롯해 두 편의 디지털 영화를 감상하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별다른 기대 없이 시간에 쫓겨 무작정 들어간 후루마야 도모유키의 나쁜 녀석들이나 애당초 계획에 없었던 울리히 사이들의 영화들은 의외의 기쁨을 주었다.

독립영화에 전망을 두고 고민하는 내 개인적 취향을 바탕으로 영화제를 발언한다는 것이 상당히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알지만, 전주 영화제의 색깔이 예년에 비해 선명해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특히 한국 단편 부문 비평가주간의 새로운 시도와 전주 영화제가 그 탄생과 더불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 영화, 그리고 아시아를 비롯한 전세계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 등이 국내 어느 영화제와 구별되는 전주영화제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명한 감독의 신작과 알려진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권위 있는(개똥보다도 못한 권위라고 생각하지만) 이벤트성 영화제와는 달리 전주 영화제가 선택한 길은 그리 순탄한 길은 아니다. 당장 영화광들을 위한 축제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지역 시민들을 위한 대중적인 영화들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계의 독립영화, 디지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전주영화제를 찾아야만 한다면, 이미 이것으로 전주영화제의 존재가치가 충분히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주영화제가 주목한 디지털 영화는 나 같은 독립영화 감독과 영화 연출, 제작에 관심이 있는 일반 대중의 영화 제작에 대한 수용성을 증대한 훌륭한 매체이다. 혹자는 디지털 영상미학을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년이 넘는 필름의 역사에 비하면 고작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디지털 영화를 논하기에 너무 이르다. 아직도 개척되지 않은 많은 영역이 존재하고 그 미래를 전주영화제가 선점한 것이다.

부산처럼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영화제는 아니지만 전주영화제는 전주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한 영화제로 인정 받고 있다. 물론 독립영화, 디지털 영화의 개념이 생경한 많은 시민들에게 전주영화제의 프로그램이 가지는 명분, 혹은 장점 만으로 행복한 영화감상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접할 수 없는 영화를 찾아보면서 헐리우드와 충무로 상업영화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영화보기의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전주 영화제의 참 맛은 재미를 쫓아 영화를 보기보다는, 데이트 장소로 영화제 상영관을 찾기보다는 혼자서 조용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영화를 찾아 다니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의 참 맛은 영화를 찾아보는데 있다. 자기 기호에 맞는 영화를 찾아 다니고, 또 그렇게 영화를 찾아 다니며 자기도 모르게 또 다른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기쁨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를 하루에 서너 편을 보는 것은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힘든 노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제의 끝머리에서 항상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를 보기위해 안내책자를 뒤지고 이리저리 극장을 향해 뛰어다니던 즐거운 기억들이 항상 소중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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