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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특집 [특별기획-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2 <익산>]
금강과 평야가 만든 다양성의 문화
들에서 길러진 풍류와 민속놀이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2003-07-03 15:30:53)
익산평야는 김제 금만평야 다음으로 드넓다. 그만큼 평야지대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농경문화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랄 수 있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농경사회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들노래와 농요가 그렇고, 대보름 달밤 아래 울리던 익산 우도농악 가락도, 12개 마을이 함께 풍년을 기원하던 금마 기세배놀이도 드넓은 평야가 만들어낸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특히 기세배놀이는 이웃하는 마을과 공동으로 농사짓지 않으면 안되던 농경사회의 소산인 두레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중의 하나다. 
이런 전통문화는 전북의 곡창지대를 이루는 부안, 김제, 정읍과 함께 전라도 평야문화를 대표한다. 하지만 제 아무리 농경사회라도 지역별 문화는 존재한다. 익산도 예외는 아니다. 
그 첫 번째로 유입된 문화가 익산의 전통문화와 맞물려 색다른 문화를 낳았다는 점이다.
흔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발전한 놀이와 권농을 다그치는 놀이 따위가 많은 평야지대와 달리, 갯마을과 섬 지역은 풍어와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의례와 관련된 민속 놀이가 많다. 그런데 갯마을도 섬도 아닌 이 지역에서 무속적 제의 모습을 보이는 민속문화가 남아있다면 익산만이 가지는 특징이지 않을까. 금강의 물줄기가 낳은 웅포 용왕제와 성포 별신제가 그것이다. 
지금이야 금강하구둑으로 막혀 있지만 익산은 그 옛날 우리나라 5대 포구중의 하나였던 웅포 포구와 성포 포구의 고장이다. 조선시대 세종 10년(1428)에 함열현 피포, 지금으로 말하면 웅포면 고창리의 고창마을에 덕성창이라는 조창을 세웠는데, ‘경국대전’에 규정된 조선수를 보면 나주의 영산창이 53척, 영광의 법성포창이 39척, 덕성창이 63척으로 정하고 있어 얼마나 번성한 포구였는지를 실감케 한다. 또한 여산에 나암창이 설치됐다가 다시 함열의 진포 부근 성당포로 옮겨 성당창이라 하고 전라도 8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수납, 조운케 했다고도 전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뱃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례가 발전했음은 당연하다. 그 제례의식이 남아 오늘에 이른 것이 웅포 용왕제와 성포 별신제다. 100년이 넘게 단절되어 왔고, 그것이 세곡을 보호하기 위해 민관이 함께 치루던 것이 민속으로 흘러왔다는 해석도 다분하지만 이런 무속적 제의는 분명 익산만이 가지는 문화적 특징이랄 수 있다.
지리적 여건도 문화의 유입을 도운 촉매제다. 익산은 전라도 초입으로 북쪽은 충청도 중부문화권과 동쪽은 완주에 이어지는 산악문화권과 그리고 남쪽은 평야로 이어지는 평야문화권과 연결돼 다양한 색채의 문화적 요소가 유입돼 정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들노래다. 
“영감아 영감아 아아---/무정한 영감아아--/육칠월만 물에 메뚜기 뒷다리한티 채죽은 영감아아/???”
김제와 이곳에서만 불려지는 들노래 ‘만물산야’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들노래는 동부 산악권의 메나리조가 중심이라는 것. 여기에 남도 계면조가 혼합돼 있다. 또한 남도 계면조를 빼면 경상북도 안동에서 불려지는 ‘만물산야’와 똑같다. 이에 대해 금강 물줄기를 타거나 완주 산악지대를 통해 동부 산악권의 가락이 유입됐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옛날 못 먹던 시절 만석지기가 많던 이 지역으로 경상도 사람들이 품을 팔러 오면서 전해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는다.
성포농악도 유입문화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흔히 농악대회에서 성포농악은 “좌도굿인지 우도굿인지 모호한” 가락으로 이야기돼 항상 탈락하는 수모를 맛봤다고 한다. 조사결과는 대개 평야지대에서 나타나는 우도농악이 아닌 좌도농악. 그것뿐이 아니다. 웃다리 농악이라는 충청도 지역의 특색뿐 아니라 다양한 좌도지역의 굿 가락이 혼재돼 있다고 한다. 포구가 성행하던 시절 남원, 임실, 진안 등의 세곡을 조운케 했던 조창이 있었다는 점에서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익산 우도농악도 어찌보면 유입된 문화랄 수 있다. 
보유자로 지정된 이는 김형순 옹. 그러나 그의 고향은 익산이 아니다. 부안출생인 그는 김제, 정읍을 두루 다니며 농악을 배웠고 정읍농악단에서 기량을 연마한 잽이다. 그러던 중 익산에 정착하면서 농악에 관심있는 사람을 모아 1953년 이리농악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농악단은 익산지역의 ‘토종’ 굿이라기보다는 마을을 돌던 전문잽이, 일명 걸립패들의 굿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오히려 좌도굿인 성포농악이나 금마 기세배놀이를 중심으로 발달한 금마 농악 등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농악이었다는 것이 타당하다. 무형문화재 보존정책으로 주객이 바뀌어 버린 셈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전문가들에 의해 오늘을 대표하는 익산 전통문화의 틀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남원과 함께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불리게 된 경위도 여기에 기인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명창 임방울이 한창이던 시절의 주무대가 이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익산 평야의 세 만석지기 중 최씨성을 가진 이가 풍류를 즐겨 전국의 풍류꾼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의 하나가 임방울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그 옛날 소리꾼의 삶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 충남출신 정춘풍과 김성옥 명창이 부촌(富村)인 익산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일게다. 
그렇다고 다른 지역의 소리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망성면 내촌리에서 태어나 일제 시대에 활약한 정정열제의 정정열 명창이 그렇고, 여산에서 출생해 순조와 헌종과 철종때에 이름을 날린 신만엽, 송만갑과 어깨를 겨루었던 유공열 등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소리꾼들이다. 특이한 것은 이들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여산에서 살고 있다는 점. 당시 여산의 풍요로움과 문화적 풍토가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선비들의 풍류가 드러나는 이리 향제줄풍류가 보존돼 있고, 거문고의 명인 신쾌동의 고향이자 활동무대였던 익산은 이런 선비들의 풍류문화부터 전통 농경사회 문화, 그리고 전문잽이와 소리꾼들의 주 활동무대였다.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가 익산에서 형성됐고, 지금도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익산 들녁에도 개화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의 민속놀이가 전국민속경연대회 출전을 위해 각색되고 재현돼 원형을 잃어가고 있고, 그나마 무리한 도농통합으로 인해 농촌의 도시화 물결로 공동체 삶과 함께 문화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익산문화는 이제 더 이상 삶과 함께 하지 않고 있다. 
풍년을 기원하던 기세배놀이에선 두레정신을 찾기 어렵고, 기계화된 농사일에서 들노래의 흥겨움을 찾기란 쉽지 않다. 판소리조차 조통달 판소리 전수관만이 겨우 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며 신쾌동의 고장이라지만 그를 아는 이 별로 없다. 그나마 새터마을 등 몇몇 마을에서 거리제 등을 펼치지만 대보름 달밤의 판굿도 서운함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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