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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 특집 [오래된 가게]
30년 냉각기가 쏟아내는 OB의 추억
최정학(2016-01-15 10:41:15)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때마침 오후 한 나절 시간도 남아돈다. 평일 오후의 여유, 때 아닌 겨울비가 내리니 낮술을 마시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비 내리고 어두운 오후에는 낮술도 괜찮다. 익산의 OB 엘베강. 몇 번인가 이름만 듣던 곳이다. 체인점 방식이 없던 1980년대, OB생맥주를 들여와 팔던 '신식' 술집.
익산역 바로 앞에서 작은 간판을 발견하고 들어선 곳은 예상대로다. 문을 여니, 세로형의 좁은 공간이 길게 이어져 있다. 30년도 넘은 이곳의 모든 물건들이 온전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살얼음 맥주잔, 두 번 볶아낸 땅콩, 인기 좋은 오징어입
맥주 한잔을 시키자 옛날 500cc 컵에 찰랑찰랑 맥주가 가득 담겨 나온다. 불에 갓 구운 땅콩과 조미김 한 봉지가 딸려 나온다. 맥주는 더 없이 시원하다. 살얼음이 입안을 간질이는 첫 모금이 인상적이다. 기본안주로 나오는 땅콩은 이 집이 자랑하는 안주다. 오븐으로 먼저 볶고 나서, 손님에게 내 올 때마다 불로 다시 한 번 볶아낸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자 하나 둘 손님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혼자오기도 하고, 둘이 오기도 하고, 셋이 오기도 한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는 맥주와 안주 하나를 시키고는 혼자 온 손님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둘이나 셋이서 온 손님들은 한정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 온 손님도 어색하지 않다. 늘 그 시간이면 그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았다는 듯이. 사람들은 이 집이 자랑하는 '오징어 입' 안주 하나를 시키고는 오래도록 앉아 500cc의 시원한 얼음맥주를 몇 잔 씩 비워낸다.

오비 엘베강은 익산 토박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익산의 명물이다. 1982년 김칠선 할머니가 잃어버린 딸을 찾아다니며 가장 번화한 이곳에 문을 열었다. 지금이야 익산 곳곳에 번화가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역전 아니면 어디 변변히 술 마실 곳도 없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던 곳이었다. 익산시민들은 물론이고 인근 대학교의 학생들도 단체로 이곳에 와 술을 마셨다.
그 사이 가게가 알려지고 할머니의 사연이 전파를 타면서 잃어버린 딸도 찾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제 가게에 있는 시간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대신 가게에는 조카며느리 조명순 씨가 지킨다.

 

그림 속 청년들은 희끗한 머리로 다시 잔을 든다
가게는 대를 이어가면서도 30년 전과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처음 들여왔던 생맥주를 지금도 그대로 가져오고, 그렇게 들여온 생맥주는 냉각기를 쓰지 않고 숙성한다. 생맥주를 뽑아내는 꼭지는 30년 세월의 손때가 묻어, 오히려 더 찬란한 금빛을 낸다. 요즘의 최신식 시설에 비해 조금 불편하더라도, 바꾸지 않는다. 30년 전의 이 맛을 찾아 저 먼 곳에서 찾아오는 오래된 단골들을 생각하면, 바꿀 수도 없다.

가게 벽면 한쪽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언젠가의 가게의 정경, 단골이던 화가가 오래 전 그려준 그림이라고 한다. 길게 이어진 테이블을 가득채운 손님들이 어색함 없이 서로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다. 지금은 다만 그림 속 젊은 사람들이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저씨들이 되었을 뿐, 엘베강은 늘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그 맛을 지켜나가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야 계산서를 본다. 조금 야박한 감도 없지 않지만, 안주를 시키지 않았으니 맥주 값만 계산하면 된다. 2,500원. 안주를 시켰더라도 5,000원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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