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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 | 특집 [종이 위 작은 기적]
“우리 근현대사가 거기 있다”
시골촌로의 26년 일기
문동환(2016-03-15 10:55:33)





"약 22년. 군에 보내니, 금할 수 없다, 면에 간 걸로 인정하면 되지, 그러나 자전차로 곳 들어온 것만 같다."
1969. 4. 24- 큰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적은 감상
"부모를 무쵠코 행동한다면서, 부득히 부서버렸다. 그리고 너를 교과서 교0까지도 전부 뒤저 학교는 중지해라 했다."
1969. 8. 17- 자녀들의 성적이 나쁘고 행실에 문제가 있어 훈계, 훈육한 내용
가족 및 집안의 대소사와 자녀교육 문제에서부터 농사일, 마을 주민들과의 일상적 관계와 마을의 다양한 행사,
신평면과 임실군을 포함한 지역사회의 동향, 선거와 새마을운동 등 모든 상황과 사건들을 기록했다.


시골의 평범한 촌로가 남긴 일기는 역사가 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역사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기존에는 위인 중심의 역사나 거시적인 역사만을 '역사'로 취급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위로부터의 역사는 역사의 동학에서 당대의 사회구성원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시키거나 아예 배제시키는 한계를 지닌다. 사실 우리가 배운 역사라는 게 십중팔구 이런 것들이었다. 미시사나 생활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미시사와 생활사는 기존 주류 중심의 역사서술에서는 다루지 않던 평범한 소시민의 삶이나 삶의 과정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천착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산파일기'다. 산파일기는 미국 건국초기인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산파로 활동했던 마서 무어 밸러드라는 한 여성의 일기를 토대로 한 저술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의학관행과 관습, 폭력과 강간, 여성의 경제활동 등이 생생이 담겨 있는데, 개인의 기록이 후대에 와서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산파일기 출간을 계기로 기존 역사학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개인의 기록과 같은 미시적 영역이 엄연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고, 평범한 개인의 삶이 지닌 동학도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었다.


그는 잉크를 적셔서 쓰던 펜글씨나 볼펜으로 일기를 적었다.
기분이 상해서 술을 마신 날의 일기는
일기장에 쳐진 줄을 무시하고 함부로 쓴 흐트러진 글씨체였고,
농사계획이나 집안 행사 등에 관한 일정 등은
반듯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일기장에 적어 놓았다.
중요한 일은 별지에 작성해 그 날짜의 일기 옆에 붙여 놓기도 하였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유사한 차원에서 일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창평일기'다. 창평일기는 임실군 신평면 창평리에서 칠십 평생을 사셨던 최내우라는 분이 1969년부터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하루 전인 1994년 6월 17일까지 26년간의 일상을 일기로 담아낸 것이다. 창평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은 이렇다. 2008년경,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임실군 지역 조사팀을 이끌던 함한희교수(전북대 문화인류학)가 현지 조사과정에서 최내우옹의 장남인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으로부터 '월파유고(月波遺稿)'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되어 건네받았고, 이후 함교수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성호 박사(전북대 SSK개인기록연구실 전임연구원)가 창평일기의 존재를 알게 되어 가족의 동의를 얻고 일기 전문을 입수하게 됐다.


'1964년 7월 25일 모친께서 별세하였다.
천지가 내려앉은 듯 하였다.
병환이 난지 15일만인데, 처음에 배가 아프시다고 하셨다.
또 술을 즐겨 하시었다. 2, 3일 지나자 복부가 이상했다. 체한 듯 싶다고 하시었다.
임실에 체를 잘 내리는 사람이 있다 하여 오시라고 했다.
별로 효과를 못 보았다.
배는 날이 갈수록 부어갔다.
할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하고 침구를 준비하여 전주 유승국 병원으로 갔다.
유승국 의원께서 진찰하여 복막염으로 판명이 나왔다.
입원을 요구했더니 입원실이 업다고 한다. 다시 도립병원으로 갔다.'
- 최내우 씨의 회고록 『월파유고』 中


"월파유고는 장남인 최성미원장께서 선친의 회고록 원본을 발췌해서 출간한 건데, 이걸 함(한희)선생님한테 준 거에요. 근데 원본은 주지 않았고. 그런데 이걸 받아서 보니까 중간 중간에 뭔가가 빠져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집에 찾아가서 보니까 월파유고 원본이 있고 별도로 일기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상자 채로 일기 원본을 받아온 이성호박사는 일기 전문을 사본으로 제작했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대여섯 명의 일기연구팀을 구성해서 SSK계획서 작성과 일기 입력작업을 병행했다. 이후 개인기록에 대한 연구가 한국연구재단의 SSK사업에 선정되고 나서 연구작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는데 지난 2013년 입력작업을 거친 일기의 원문이 총 4권으로 완간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원문이 A4용지로 1,7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일기연구는 일차적으로 입력작업을 통해 가독성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는데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필자인 최내우옹은 어지간한 낱말은 모두 한자로 써놓았는데 오기도 적지 않았고, 한자로 쓰이지 않는 낱말까지도 낱말의 새김과 뜻에 착안해서 스스로 한자표현을 고안해서 적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입력작업이 끝난 일기는 사회학, 인류학, 언어학, 경제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연구진들이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돈거래, 농촌폭력, 농민들의 기후에 대한 인식, 언어사회학 등 주제별로 분류해서 분석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을을 찾아가 일기 속의 사건이나 경험들을 확인하고, 관련 선행연구나 자료 확인을 거쳐 일기연구의 엄밀성을 확보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창평일기는 단순히 26년간의 일상의 기록이 아니다.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의 고도성장기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났고 그것이 한 개인의 삶에서는 어떻게 경험되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연구팀이 주목하는 것도 이 점이다. "현대의 일기를 자료로 삼은 연구는 없어요. 역사학에서도 난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연구를 하지만 일상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잖아요. 그런데 현대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일기는 가장 좋은 자료입니다. 무엇보다 일기의 사실성을 확인하는 게 용이하기 때문에 왜곡이나 과장의 위험도 훨씬 덜하죠. 구술사만 하더라도 구술을 하는 당사자가 구술과정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거든. 그런데 창평일기는 매일매일의 기록이고 지금도 현장에 가서 확인과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왜곡이나 과장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연구팀은 창평일기 이후 경북 김천의 '아포일기'를 발굴해서 연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일기연구 성과가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일기에 관한 제보도 이어지고 있다. 학계에서도 연구팀에 특강이나 학술세미나 발표를 요청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일기에 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연구팀은 다른 국가의 개인기록 수집으로까지 범위를 넓혀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이 한 사회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비교연구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창평일기와 같은 평범한 개인의 기록이 모여 근대성을 성찰하는 데 유용한 통로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일기를 수집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서의 연구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별로 효과를 못 보았다.
배는 날이 갈수록 부어갔다.
할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하고 침구를 준비하여
전주 유승국 병원으로 갔다.
유승국 의원께서 진찰하여 복막염으로
판명이 나왔다.
입원을 요구했더니 입원실이 업다고 한다.
다시 도립병원으로 갔다.
- 최내우 씨의 회고록 『월파유고』 中


에릭 울프(Eric Wolf)는 '역사가 없는 사람들'(people without history)을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 옮겨 놓았다. 기록에 대한 최내우옹의 집념과 창평일기의 가치에 주목한 연구팀의 노력도 다르지 않다. 우리네 그 누군가도 역사속의 인물이며, 그 삶도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러한 작업은 위로부터의 역사가 주목하지 않는 무수한 삶의 스펙트럼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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