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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 | 특집 [종이 위 작은 기적]
조선시대 역사와 사람들의 일상을 만나다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동희(2016-03-15 10:57:37)





『미암일기(眉巖日記)』는 16세기 전라감사와 대사헌을 지낸 미암 유희춘이 55세 되던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577년(선조 10) 5월까지 대략 11년에 걸쳐 쓴 일기이다. 본래는 총 14책이었으나 현재는 11책만이 전하고 있다. 이 중 10책은 그의 일기이고, 1책은 자신과 부인 송덕봉의 시문을 모아둔 것이다. 보물 260호로, 미암 후손들의 세거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미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큰 책으로 근래에 일상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책의 가치 또한 더욱 커지고 있다.
 미암은 1513년(중종 8) 전라도 해남현 해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선산이며 해남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호남사림을 이끈 대학자이며 『표해록』의 저자인 최부의 딸이며, 그의 처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이름 높은 송덕봉이다. 미암은 또 장성사람 하서 김인후와 사돈간이다. 김인후는 향교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사람이다.
미암은 26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35세 때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20여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석방되어 홍문관부제학, 전라감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고 1575년 창평(현 담양)으로 낙향하여 1577년 향년 64세로 여생을 마감하였다.


『미암일기』가 역사학계에 일찍이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그날그날의 일들을 기록한 자필 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한 대목을 보면, 미암은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1571년(선조 4) 2월 4일 전라감사 후보 1순위에 올랐으며, 2월 11일 전라도 영리(營吏) 나덕린과 마두(馬頭) 최광수로부터 전라감사에 임용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소식이 전해지자 친지와 지인들로부터 축하인사가 연일 쇄도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주까지 마중나온 전라감영의 도사, 검률, 심약, 영리들의 영접과 알현을 받았다.
3월 3일 한양에 입경하여 임금에게 숙배하였으며, 전라감사 임용에 따라 부ㆍ조ㆍ증조 삼대를 추증하는 명을 받고, 광흥창에서 녹봉으로 쌀 10석, 콩 7석, 명주[紬] 1필, 포 4필을 받았다. 이어 조정대신들을 찾아가 인사하고, 전라감사를 만나 도내 사정을 들었다.
3월 13일에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교서와 밀부를 받고 곧바로 남대문을 나와 전주로 출발하였다. 3월 21일 전라도 관문인 여산에 도착하여 관리들의 영접을 받고 향교 문묘에 가서 알성하였다. 22일에 전주로 들어와 경기전 태조어진에 숙배한 후 후대청(後大廳)에 들어가 관리들의 공ㆍ사례(公ㆍ私禮)를 받고 차를 마신 다음 감사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이튿날 향교 문묘 알성후 종일토록 공사를 처결하였다.
 미암은 전라감사로 부임한 3월 21일부터 10월 14일 대사헌에 임용되어 전라도를 떠날 때가지 201일을 재임하였는데 이중 전주에 머문 것은 21일에 불과하다. 나머지 180일은 전라도 각군현을 순력하였다. 조선전기만해도 감사들이 감영에 머물지 않고 각 군현을 순력하며 통치하는 행영제(行營制)였으며, 조선후기 17세기에 감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통치하는 유영제(留營制)로 바뀌었다.
 『미암일기』가 근래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일상사 때문이다. 이 일기에는 벼슬살이만이 아니라 16세기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음식, 재산증식, 부부생활, 노후생활 등 일상생활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사대부가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로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암에게는 방굿덕이라는 천첩이 있었고, 그 소생으로 해성ㆍ해복ㆍ해명ㆍ해귀 네명의 딸이 있었다. 양첩소생은 서녀, 천첩소생은 얼녀라고 한다. 미암의 천첩 소생 딸들은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하나가 천민이면 그 소생은 천민인 것에 따라서 천민이었다. 방굿덕도 그 소생들도 남의 집 노비였다. 그래서 노비들이 주인에게 바치는 신공(身貢)을 미암이 매년 내어 주었다. 미암은 맏이 해성을 혼인 시킨후 해성의 주인 홍번에게 간청하여 말 한필을 주고 면천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네명의 서녀를 모두 남의 집 노비에서 면천시켜 양인으로 승격시켰다. 미암은 딸들을 면천시키고 무척 기뻐했다.
남의 집 종인 네 딸을 면천시키는 데에는 주인에게서 이들을 매입하는 돈만이 아니라 조정의 요직에 자리하고 있는 미암의 사회적 지위도 작용하였다. 미암은 둘째 얼녀 해복의 주인 이구에게도 말을 몸값으로 주고 면천시키려고 하였는데 이구는 이를 사양하고 그의 사위 이정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1년간을 끌다가 해복은 면천되었으며, 4년후 미암은 이정을 입사시키기 위해 진력했고, 이정은 건원릉 참봉직에 임용되었다. 이정은 나머지 두 얼녀의 주인이기도 하였다. 3녀와 4녀 해명과 해귀는 해복이 양인이 된지 6년후 저화 600장을 주인 이구에게 몸값으로 주고 면천되어 양인으로 승격되었다.






『미암일기』는 16세기 사대부가의 관직생활과 일상생활을 때로는 불편한 내용까지 담아내고 있는 일상사의 보고이다. 하지만 한시대 한사람의 이야기이므로 일반화하는데 한계도 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시대는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담양문화원에서 국역되었으며,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는 대중서로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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