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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지역에서 종이잡지를 만드는 삶
이용원 월간토마토 편집장 (2023-12-04 11:53:23)



지역에서 종이잡지를 만드는 삶


이용원 《월간 토마토》 편집장



무슨 일을 하는지 소개할 때마다 가장 많이 접하는 반응은 ‘우와, 대단하다’이다. 물론, ‘대단하다’라는 표현이 놀랄 정도로 훌륭한 일을 한다는 칭송은 아니다. 이 반응에는 요즘 누가 ‘종이 잡지’를 읽는다고 무모하게 잡지를 발행하는지…,에 관한 호기심과 의구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훌륭한 일을 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 이런 반응쯤은 별로 상관없다. 2007년 5월, 대전에서 《월간 토마토》라는 잡지를 창간한 건 그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듣고 세상을 관찰하며 사유하고, 그 결과를 다른 이와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왜 잡지를 만드는지에 대한 질문을 생각보다 자주 받았다. ‘잡지’보다는 ‘잡지를 발간하는 행위’에 더 주목하는 주위 반응이 조금은 신기했다. 아무리 마음이 내키는 대로 시작한 일이라고는 해도, 궁금한 이들에게 잡지 발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답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매번 ‘그냥요’라고 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찾기 시작한 해답은 지난 16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했다.


잡지 발행 초창기에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문화 예술 행위를 매개하면서 ‘예술의 일상성’을 꾀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창의적 시민만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시민의 창의성은 일상적으로 예술을 수용하는 행위를 통해 고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지역 예술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한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새로운 시도를 펼치는 지역 예술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업을 시민에게 충실히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잡지 발간 7년 차를 지나면서 우리는 기록에 좀 더 방점을 찍었다. 지역에서 기록해야 마땅함에도 사라지는 것들을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지역 이야기를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누가 신경이나 쓰겠느냐고 날카롭게 되묻기도 했다. 지역의 장소와 사람, 현장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런 설명에 누군가는 ‘굳이’ 종이여야 할 필요가 꼭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감성적인 질문자에게는 ‘종이 감수성’을 설명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읽어 왔다. 모니터 위에 빛은 여전히 ‘흉내 내기’라는 주장을 펼친다. 


좀 더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이에게는 종이가 지닌 ‘보존성’에 관해 말한다. 인류가 발명한 정보의 보존 수단 중 종이를 뛰어넘는 매체는 아직 없다고 말이다. 전자매체를 완전히 파괴할 위협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반면에 종이는 다르다. 얼마 전에는 화산 폭발로 땅속에 묻혀 2000년 이상을 보낸 고대 로마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파피루스 두루마기 내용 일부를 AI 분석 기술로 읽어냈고 조만간 전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이런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잡지를 발간하면서 전자 매체보다 우선해 종이를 도구로 삼은 이유는 ‘발견의 우연성’이다. 삶터 주변에 서점이 있어야 하는 이유와 같다. 우연한 만남 후 즉각적인 수용이 가능한 종이 매체는 점점 더 획일화되는 세상 속에서 다양성을 확보할 있는 방법이다.


여하튼, 세월이 흐르면서 삐쭉빼쭉했던 잡지 발간 이유도 비바람에 깎이며 둥글둥글해졌다. 다양한 이유가 섞이고 간섭하며 우리가 종이 잡지를 발행하는 이유의 끝은 결국 ‘이야기’에 닿았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며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는 힘은 바로 ‘이야기’다. 이제 지역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공유하기 위해 잡지를 발간한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확장한 사업 영역이 단행본 출간이다. 매월 잡지를 만들고 종종 단행본을 출간하는 일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우리가 ‘이야기’에 천착한 이유는 모든 관계 형성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 어떤 존재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과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형성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니다. 오직 유일한 방법이다. 이야기를 공유해야 비로소 친구를 만들고 가족을 구성하며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말과 그림, 몸짓, 문자 등 이야기를 공유하는 수단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반대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다양한 수단의 발전도 꾸준히 꾀했다. 여러 수단 중 하나로 우리는 종이 잡지를 만들고 단행본을 출판하며 공동체(지역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공유해야 할 ‘이야기’를 묶어낸다.


공동체성이 심각하게 무너졌다는데 대체로 동의하는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지역에서 종이 잡지를 발간하는 이유와 가치를 ‘이야기’에서 찾는 우리 시각에서 보면, 공동체가 무너진 이유는 ‘이야기’를 제대로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활성화나 복원은 몇 번의 이벤트나 굳건한 다짐 등으로 활성화거나 복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마땅히 공유해야 할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더군다나, 지역은 이야기의 소실이 더욱 심각하다.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제와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서울 집중 현상이 일어났다. 지역은 그저 변방으로서 대형사건·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부턴가 지역을 ‘로컬’이라 부르며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곳에서 묵묵히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던 지역을 마치 갑자기 등장한 신기한 영역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지역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상업적 관점이 진하게 어렸다. 소외된 채 남았던 지역의 고유성을 차별화한 마케팅이 가능한 상품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지역’이 고작 ‘상품성’으로 평가받으며 소비되는 현실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서울에 있는 소위 ‘콘텐츠 회사’가 지역을 돌아다니며 관련한 일을 벌이는 모습도 종종 발견한다. 지역이 담은 이야기를 지역에서 담아낼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것이 천박한 자본의 법칙이었다.


이런 현상을 보며 지역에서 매월 월간지를 만들어 내는 일이 고되고 어렵지만,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다양한 이유로 지역에서 나오던 잡지가 폐간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아리고 쓰렸다. 점점 더 지역 고유의 문화를 담아내는 종이 잡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전주에서 ‘지역 문화를 지켜가는 든든한 힘’으로 발간을 이어오는 《문화저널》로부터 창간 36주년 기념호에 실을 원고 청탁을 받았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 긴 시간 쉼 없이 잡지를 발간하는 일이 가진 고귀한 가치와 열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 종이 잡지를 만드는 이에게 원고를 청탁한 마음도 조금은 알 듯했다. 


그렇기에 ‘축하한다’라는 말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36년 동안 전주에 터를 잡고 지역 문화를 지켜온 《문화저널》이 걸어온 역사는 곧 문명의 역사다. 비로소 ‘글로 밝힌 밝은 세상’ 말이다. 그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밝은 등대처럼 문화의 밝은 빛을 밝게 비추기를 기원한다.



이용원   

2007년 문화예술잡지 [월간 토마토]를 창간. 편집장인 동시에 대전의 유래와 역사, 흔적을 찾아 마을을 답사하고 취재하여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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