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9.5 | 칼럼·시평 [문화비평]
예술적 형상화에 있어서 당파성의 문제-영화
양은숙(2004-01-27 11:23:02)


 현실에 대한 인간의 미적 관계는 인간의. 생활이나 행동의 모든 영역에 나타난다. 그 나타나는 방식의 최고 형태가 예술이다. 인간은 리얼한 개개의 물상을 그것들의 생생한 직접성을통해서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명가하려는 풍부한 정신적 경험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의미부여의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현실에 대한 미적관계이다. 이론적 사고와는 달리 미적의식은 실재의 물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한다. 과학적 개념과는 반대로 미적의식은 구체적 형상을 산출한다. 형상은 우선 과학이나 철학에서 다루는 논리 혹은 개념이라는 것과 구별된다. 과학적 인식과 예술적 인식은 각기 다른 자기의 언어를 갖고 독자적인 방법을 태한다. 예술은 대중의 정신적 무기라는 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어떤 경우라도 완수할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롭다. 바로 이때문에 레닌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예술과 문학은 ‘그 나라의 빛이며, 힘이며, 미래인 수백만 수천만 노동자’에게 봉사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었다. 창작의 진정한 자유는 대중과의 결합과 대중들의 이익에의 의식적 봉사에 있다. 어떤 특정계급을 해방하는 것에 의해 전 인류를 해방하는 계급, 흑 프률레타리아계급의 당파성의 관철에 의해서 사회적 진리의 총체를 묘사하는 리얼리즘을 실현시킬수 있다. 즉, 당파성이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이는 역사적 의미와 당대의 의미가 있다. 우리시대의 당파성이란 노동자계급의 시각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발전의 합법칙에 대한 인식, 프롤레타리아적 삶의 체계 관철이라는 실천적 의미가 분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구두닦이 ‘두철이’의 변화 이유에서 당파성을 견지해내지 못하고 있고 더욱, 주인공‘종수’의 광주항쟁을 통한 정치적 각성과 미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중요한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당파성에 입각한 형상확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인공이라는 학생
출신은 우리 운동의 기수가 될 수 없다.’라는 단세포적 변혁관을 대중에게 선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은 말이 많고 잘 알지만 그만큼 고민과 번뇌가 많고 나약하다. 노동자는 우리 운동의 주력군으로 항상 용감하다’는 식의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발상이이 영화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하면, 노동차 계급의 자발적 투쟁 의지가 지식인의 목적의식적 과학
성과 굳건히 결합되어져야 하는 중요한 문재가무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 나이어린 구두닦이 소년은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어가는가 하는 계급적 각성의 문제, 역사적 사건속에 있는 한 개인이 계급적으로 변화되는 과정들은 온데 간데 없고 지식인의 가슴앓이만 훈장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철이와 종수의 단순한 출신주의적 채색대비는, 대중들에게 과학적 사고에 입각한 진일보적 정서를 고양시키려는 측면보다 “예이 ! 구두 닦이보다 못한놈, 배운 놈은 다 저렇다니까”하며 단순감각적인 선호판단으로 지식인의 계급적 각성의 가능성을 무시하게끔 할 뿔만 아니라, 나아가 찝찝하면서도 두철이를 막연하게 동조해야만 하는 것이 옳겠지라며 새마을 도덕극 같은 자본주의적 윤리감을 대중들에게 강요하는 측면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무지하고 부도덕하기까지한 구두닦이가 어떠한 과정을 겪으면서 계급적 각성을 해가는개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그 변화의 내용을 당파적으로 어떻게 형상화 해야하는가가 없이 출신이 좋으니까 역사와 진보적 존재로 나가야 한다라는 것이다. 역사의 주체가 노동자 계급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계급을‘가까이 할수 없는 당신’으로 할 수 밖에 없는 패배주의가 너무도 색채 진하게 자리잡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가시적인 출신성분의 비교로 당파성을 해결해내려 하고 있다. 패배와 좌절의 상징으로 대학생 운동가(아마 당시의 사회상황으로 봐서는 지하운동 서클에 가입하여 학습을 하고 강학으로 활동하는)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대중에게 기회주의와 패배주의의 못된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허위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약한 지식인이지만 광주라는 전민중적인 투쟁시기때1작지만 확실한 힘의 축적이 되어지는 정치적 각성과 그 의지의 모아짐의 정확성, 그리고밝은전망에 촛점이 맞춰졌어야 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박노해의 시에서처럼, ‘이불을 꿰매면서’아픈 각성의 바늘(계급적 각성)을 찌르는, 작지만 당찬 계급적 변화의 모습, 정확한 현실에 대한 인식의 축적, 밝은 전망의 모습이 그려져야 할것이며, 그를 통해 대중들이 각성의 짜릿한 자기동일적 감동을 맛보아야하고 그 과정 중에서 당파성의 내용이 살찌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파성에 입각한 내용의 심화가 있어야지만, 현실에는 그 존재가 미미할지라도 계급적 전망에 의한 닥관적인 밝음, 즉 혁명적 낭만주의도 빛을 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메시지 전달을 위한 대중적 설득화의 형식원리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억지 짜맞추기 식의 소재선택을 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내용의 흐름, 어떤내용의 메시지가 지금 현재의 선전내용인가에 따라 소재 선태이 되지않고 대중들이 갖고 있는 현상적인, 단순이미지 결합 방식의 소재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청문회열기를 만들었었던 대중들의 질높은 현재적 정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대중들의 광범위한, 익숙한 일상적 정서로부터 공명을 해들어가는 소재가 선태되어져야 하는데, 동두천이 주는 미국의 의미, 꼭 동두천과 연관된 미국의 의미에 대한 주장이 없이 무책임한 오버랩으로 정서를 강요하는 유치한 삼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동두천 생활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미국인의 부도덕성을 드러내고 그 뒤 몇마디 덧불이는 처리과정으로 미국의 본질을 얼마나 많이 파헤쳐졌다고 할수 있을까. 동두천 상황설정도 잘못되었지만 미국인 개인을 가시화시켜 미국의 본질을 드러내자는 것도 무리였다. 오히려 철저한 미국의 본질이 을바른 파악의 형태로 가기위해서는 계급모순적 관점에서 보아야하며 아울러 그들의 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체제논리를 파헤치려는 시도가 예술적 형상화로 나타나야 옳으며, 미국이라는 거대한 추상적 실체를 구체화 해내기위해서는 단계적인 인식과 그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변화와 대중의 변화를 이룩해가는 모습의 형상화가 되어야 한다!
리얼리즘은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의 공감을 유지 시키는무기이다. 엉성한상황설정으로 감정을 이끌어내려고 애쓰는 것보다 (관객들은 무덤덤한데) 실질상황(현실)을 리얼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상황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라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관해 고리끼는 “사실을·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람직한 그리고 가능한 것을 상상효}는 일이 필요하다. 보잘것 없는 듯 하지만 그러나 특징적인것을 추려내어 커다란 그리고 전형적인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로써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분해주고 있다. 인간을 오늘의 모습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내일 있어야 할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될 모습으로 묘사해 내는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즉 문예물은 하나의 전망으로 보여주고, 그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을 북돋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 영화는 실패하고 있다. 예술창작방법에서 잘못된 세계관만 앞서고 또 추상화될 때 세계관은 현실과 유리됨으로써 급기야 이념의 박탈현상에까지 치닫는다. 현실은 어떠한 관념적 디자인보다 준엄하다.즉 현실을 을바르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동시에 옳은 세계관을 재고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조건이다. 예술작품의 형상화란 현실의 단순·극사실적 기록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예술은 수동적인 거울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투사되는 무기여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현실과 연관 속에서 우리가 건설해야 될 사회에 대한 필연적 예측과 미래의 인간상을 현재 상황에서 그 단초를 묘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오!꿈의 나라”는 현실에 대한 을바르고 정확한 묘사 실패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 미국의 본질을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한 미군 병사에게 떠맡기고는 쓰러져 울먹이는 주인공은, 밤거리의 이속한 이슬을 맡으며 고통과 번뇌와 갈등 속에서 영원히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듣고나 있겠다는 것처럼 이 영화는 끝나게 된다. 자신의 큰 고민을 딛고 일어서는, 그럽으로써 우리 시대에 어둠속의 빛이 되는 아름다운 전망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술은 구체적 역사적인 현상이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서 예술의 많은 기농도 변해왔다. 예술은 다륨아닌 그것에 의해 실제 현실의 변화, 사회적 욕구와 관심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여러종류의 사명을 실현해 왔다. 예술이 다른 모든 물적 ·감성적 활동과 다른것은 예술작품은 언제나 정신활동의 결과이고, 현실의 일정한 제법칙에 대한 인간의 자각이고, 현실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관계, 즉 인간의 사상과 감정에 대상을 두고 표현한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감정 ·의지 ·사상에 의해 작용하는 일정한 지식, 현실의 제현상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을 한다. 예술적 형상화는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지니고 현실을 리얼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대중들에게 변혁의 정서(정치적 각성)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럼으로써 대중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로 나서게 하고 주인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예술창작품이 대중과 만나게 되기까지는 대중들과 같이 하는 호흡 ·맥박을 잃지않고, 쓰러져 있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제작자의 고민이 우러나 있어야 한다. 즉 진한 인류애적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의 창작물을 대해야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