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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 칼럼·시평 [저널초점]
전교조는 인정되어야 한다
문화저널(2004-01-27 12:03:31)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그리고 임수경양의 방북으로 야기된 통일논의와 더불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문제가 시국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제 국민들의 관심은, 전교조 결성의 당위성 못지 않게, 정부와 전교조간의 현실적인 대립이 어떠한 모습으로 끝맺을 것인가에 쏠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문교부의 대량해직, 실정법 차원에서의 처벌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교조의 합법성 쟁취를 위해 몸을 내던진 교사들의 단식농성과 학생 및 재야단체들의 지지연대 투쟁이 서로 맞물려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객관적인 제삼자로서의 입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불가피한 편가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전교조와 이률 둘러싼 현 상황에 대한 본질적 이해는 단순한 교육전문가의 관심사라는 차원을 떠나 우리 모든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서도 긴요한 현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은 전교조가 89년 7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성가신’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나라에서 교원들의 자발적인 단체는 이미 1960년, 좌우익의 대결이 일정한 형태로 그 모습을 감추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부문 이어진 4·19 혁명의 분위기 속에 교직원 노조의 결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5·16 군사 쿠테타를 거치면서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되었으며, 그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권력은 교육을 지배이데올로기 주입과 자신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육현장에 대한 관권적 억압은 더욱 심화되고 교사들도 대부분 중앙의 지시와 통제에 순응하는 교육방식에 순치되어 갔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사회전반의 민주화 요구가 감상적 차원을 벗어나 이론적으로 정리되고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대명제하에 결집되기 시작하면서, 교사들 자신이 교육현장의 문제들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자각적인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을 출발로, 참교육을 위한 교사들의 결집이 가시화되고 1987년 “민주실천을 위한전국교사협의회”라는 전국적 규모의 단체로 나타나게 된다. 전교협은 당시에 입시교육, 관료중심의 교육 등 교육계 전반에 만연되어 있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선결과제가 교육악법의 개정에 있다는 사실을 현장체험을 통해 확인하였다. 이른바 여소야대의 정치구도 속에서 그 가능성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타진하였으나, 정부 당국과 여권의 부정적 태도, 대한교련, 사립학교재단연합 등 기득권보호에 혈안이 된 교육귀족단체들의 완강한 방해 그리고 야권의 미온적이고 타협적인 태도 등으로 인하여 전교협을 비롯한 민주적 교원 단체들의 노력은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화된 민주적 교원단체들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교육현장에서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참교육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교직원 노조의 결성인 것이다. 둘째로 유념해야 할 일은 전교조가 교원들의 처우개선이나 도모하는 이익단체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간 교원들의 처우가 다른 사기업체와 비교해서 혹은 절대적인 임금수준에 있어서 교원들의 교육에의 헌신도와는 동떨어진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는 점은 문교부를 비롯한 정부당국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외면한 채, 임금수준이나 처우조건의 향상만을 외치는 교원들의 집단이라면 민주의식이 성장한우리 국민들의 외면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 교원 자신들인 것이다. 입시교육의 굴레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외치며 죽음의 길을 택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공범자의 한 사람으로 괴로워하는 교사, 돈봉투를 주고받는 왜곡된 교육현실을 한잔의 소주로 위안하는 교사, 일방적인 지시와 형식적인 보고로 일관된 교무회의에 시달리고 근무성적평점에 초조해야 하는 교사, 더우기 주어진 교과서와 교수방법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야만 하는 교사들에게 처우개선이나 임금향상보다 더 목마른 것은, 자신이 진정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치고 학생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일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소망은 “참교육”이라는 뭉뚱그려진 한마디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참교육의 소망은 교사 개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그 소망을 피부로 느끼는 교원들의 단결된 힘으로 나타날 때에만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반민주세력들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단결된 힘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고 그 요청을 수렴하고자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교원노조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현재 정부나 여권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원지위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대응방식은 교원의 처우개선이라는 말초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교원노조의 의의를 희석시키는 한편, 교원들간의 내부적 분열을 유인하는 정략적인 것으로서 교원들이 진정 바라는 참교육 실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문교부와 전교조간의 대립상황이 단순히 제도교육의 개선 내지 개혁에 대한 입장의 편차라는 구도로 단순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상황은, 좁게는 현재의 교육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세력과 참교육 실현을 위해 최소한의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의 대립이며, 넓게는 반민주세력과 민주세력간의 대립인 것이다. 교육은 사회규범을 그 구성원에게 내면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병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정권이 타락하고 부패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내지는 연장하기 위한 도구로서 교육을 장악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며, 이러한 사실은 특히 유신이후 정권을 장악한 자들이 학교교육을 그들의 정치선전의 장으로 이용해 온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교육이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교사들의 손에 의해 자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권자체에 대한 중대한 위기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정부가 교육의 자주성을 부인하고 관료교육, 통제교육의 틀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며, 정권 자체의 정당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 문교당국이 수백명의 교사들을 교단에서 내몰고 자주적 교원단체의 해체를 강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올해 들어 보혁 내지 좌우대결로 구분하여 민주 세력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매도해버리는 탄압 방식을 자주적 교원단체들에 대해서도 다를 바 없이 구사하고 있는 것은, 이제 전교조 문제가 단순한 교육문제의 차원을 떠나 이 사회에서 현존하고 있는 민주, 반민주 세력의 대립이 또 다른 형태로 현실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6·29 선언 이후 국민에 대한 화해 제의에서 출발된 현행 헌법이 과거와는 달리 공무원에 대해서까지 노동조합결성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문교당국이 전교조에 대한 강권적 탄압을 자행하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을 위반하고 과거 5공이나 유신시절로 회귀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는 여러 징후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직도 막은 내리지 않았다. 정부는 다시 국민에 대한 약속을 상기하고 대역전의 단원을 맺는 한 가닥의 슬기로움을 찾아 전교조를 인정하고 교사에 대한 교권침해를 중단하고 징계교사들을 원상 복귀시키는 결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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