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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칼럼·시평 [문화저널]
카라르 부인의 무기에 관하여
이원양(2004-01-27 12:13:30)


 “카라르 부인의 무기”(Die Gewe-hre der Frau Canar)는 “서 푼짜리 오페라” 다음으로 커다란 연극적 성공을 거둔 베르돌트 브레히트의 단막극이다. 이 회곡은 1937년 6월 초에 그첫 판이 완성되었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후 곧바로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 브레히트는 덴마크의 해변에 있는 스벤보르에 정착해서 작가로서 반파시즘 투쟁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파리로 망명해서 반파시즘 연극 운동을 하고 있던 불가리아 계 독일 연출가인 슬라탄 두도프(Slatan Dudow)는 1936년 9월 4일자로 브레히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페인 내란에 대한 시사성있는 연극작품을 써 달라는 제의를 하였다. 1931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운 스페인은 여러 가지 내정상의 문제로 혼란을 거듭하다가 1936년 2월 선거에서 공화당 좌파, 사회당 그리고 공산당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둔 후에는 보수와 혁신 세력간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같은해 7월 프량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구데타를 일으켜서 1939년 3월 공화국 정부가 와해될 때까지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계속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란이었다. 당시 스페인 내란은 유럽 지성인의 최대 관심사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가담하여 공화국을 위해 참전하였다. 반란군은 이태리의 파시스트 정부와 독일의 나치스 정권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의 민주정부는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불간섭의 원칙을 고수하였고 따라서 공화국 정부에 대한 무기 금수령을 내렸다. 훗날 미국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태리와 독일이 반란군 장성들을 직접 지원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스페인 내란은 외형적으로는 내란의 성격을 띄면서도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서 민주주의와 파시즘간의 갈등이 라는 국제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불간섭은 파시즘 독재의 묵인을, 나아가서는 그 지원을 못하였다. 1937년 4월 26일에 있었던 독일군에 의한 게르니카 시의 무차별 폭격-피카소는 이를 주제로 ‘게르니카라는 명작을 남겼다-으로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이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아무도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망명지에서 반파시즘 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브레히트는 스페인 내란초부터 덴마크의 신문을 위시한 여러 신문에서 스페인의 정치 및 군사적 사태진전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1937년 봄엔 프랑코군에 의해 봉쇄된항구 및 공업 도시인 벌바오를 중심으로 한 북부전선 전투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4-5월 중에 완성된 회곡의 제목은 “빌바오를 공격하는 장군들”(GenerHle iiber Bi-lbao)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연 연습 한 달 전인 1937년8월엔 이미 북부전선이 무너진 다음이라 브레히트는 연극의 무대를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어부의 집으로 옮기고, 제목은 “가라 부인의 무기”로 변경하였으며, 따라서 주인공의 이름도 테레자 카라르로 바꿨다. 1937년 7월에는 파리에서 문화 수호를 위한 제2회 국제 작가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어서 브레히트는 덴마크 여배우인 루트 베를라우와 파리로 갔다. 그는 회의에서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해서 가지고 갔으나 회의 장소가 스페인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브레히트는 참석하지 않고 연설은 대독되었을 뿐이다. 그는 이 연설문에서 연극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 동안 문화는 정신적인 무기로만 수호되어 왔으나, 이제 물질적인 무기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물질적인 무기로 수호되어야 한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쓰는데 있어서 에이레의 작가 폰 밀링톤 신지의“바다로 말을 타고 간 사람들”(Reiterans Meer, 1940)에서 착상을 따왔다 고 밝히고 있다. 이 단막극에서는, 남편과 아들들을 바다에서 잃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다로 간 아들이 역시 거기서 횡사한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2년전 아스투리엔 지방의 노동자 봉기에서 남편을 잃은 카라르 부인은 반란군과의‘전투에 참전하기를 열망하는 두 아들을 거의 경찰관처럼 감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큰 아들 후앙을 바다에 내보내 고기잡이를 하게 하고 작은아들과 함께 집에서 그의 등불을 보며 그를 지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 민병대로 참전하고 있는 동생이 와서 매부인 카롤로스의 총기를 가지고 가려고 한다. 후앙의 여자 친구인 마뉴앨라가 모든 전투 가능한 남자의 출정을 결의한 마을 회의에 후앙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카라르 부인의 태도를 비난하고 후앙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간다. 긍지에 몰린 그녀는 마을 신부를 데리고 오지만, 그도 역시 그녀의 동생과의 대화에서 중립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동생이 둘째 아들과 함께 숨겨 놓은 총을 찾아 내자그녀는 자기의 재산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다툰다. 이때 여교사였던 딸을 전선에서 잃은 이웃 여인이 와서 그녀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카라르 부인을 격노하게 한다. 논리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그녀의 태도는 더욱더 경직된다. 그때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이유 없이 순시선에 의해서 총살을 당한 큰아들 후앙의 시체를 들고 들어온다. 이에 그녀의 태도가 급변화 한다. 카라르 부인은 무기를 내 줄뿐만 아니라동생 및 작은 아들과 함께 같이 전선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이상이 회곡의 줄거리이다. 주인공인 어부의 미망인 차라르 부인의 예에서 당시 스페인 내란에 대한 서방 민주국가들의 중립성을 내세운 “불간섭주의”가 주제로 램어지고 있다. 카라르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두 아들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며 그들을 감시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반란군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녀 역시 반란군에 반대하며, 전쟁에 부상을 입은 이웃 사람을 간호하고 부모가 전쟁터에 나가 훌로 된 어린이들을 돌보아주고 있다. 그녀는 인도주의적인 봉사에 헌신하고 있는 평화주의자이다. 2년전 남편을 잃은 그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어려운 시기를 살아남으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파시스트인 반란군에 대항하는 데는 평화주의적 입장으로 만은 부족하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장군들을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회곡에서는 주인공 차라르 부인의 내면적인 태도 변화의 과정이 밀도 있게 그려져 있으며, 점차적으로 긍지에 몰리다가 마침내 그녀의 큰 아들의 죽음이라는 파국을 계기로 해서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신지의 선례에서와는 달리 파국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출발로 이어진다. 그녀는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한 장군들의 말을 그저 위협으로만 생각해 왔지만 이제 그의 아들의 죽음에서 파시스트들의 본성을 째달았으며, 이들에게 대항하여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역시 하나의 동조에 불과하다는 인야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르 부인의 태도 변화과정은 언어적인 변에서도 필연적인 귀결로 나타난다. 전선에서 총기를 가지러 온동생인 페드로는 끊임없이 자기 언어의 실재를 강조하는데 비하여, 그녀는“장군들도 아주 나쁘기는 하지만 인간이며 말 상대가 되지 않는 지진과 같지는 않다”고 믿으며, 파시스트들의 선전문에서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문구에 집착하여 그녀의 입장을 견지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연극적 사건 진행이 진척됨에 따라서 그녀의 입장 고수는 불기눔해진다. 본래 거짓말쟁이가 아닌 그녀는 그녀가 하는 말과 그녀의 내심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들이 전혀 의중에도 없는 말만을 하도록 집요하게 강요하는 것이 가장 고약한 일”이라고 그녀는 고백한다. 따라서 “그녀가자기 정당화를 시도하면 할수록 객관적으로 더욱더 그녀가 옳지 않다는 것이 입중된다.” 그녀가 결국은 지금까지의 중립적 입장을 포기하며 파시스트들에게 대항해서 싸우기로 한 것은 실재를 인정한 것이며 또한 환상을 버리고 실재를 따르는 페드로의 언어에 굴복한 것이기도 하다. 이 희곡의 정치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은 페드로와 마을 신부 사이의 논쟁에서 격렬하게 전개되며, 이 장면은 이 회곡의 중심부를 이루고 었다. 원래 차라르 부인이 지원을 받기 위해서 데려온 신부도 그녀와 같이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반란군의 편은 아니지만“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직접 참전하지 않고 역시 마을 사람들을 돕고 있는 평화주의자이다. 그러나 “불간섭주의를 찬성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장군들이 스페인 민족에게 저지르는 모든 학살행위를 승인하는 것이라”는 페드로의 비난에 대해서 그는 그저 손을 들어 보이며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할 뿔이다. 그러나 페드로는 바로 그런 자세로 바다호쓰에서 5천명 노동자들이 집에서 끌려나와 총살되었다고 말한다. 즉, 신부의 거부의자세는 바로 항복의 자세이기도 하며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III-브레히트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감정이입의) 회곡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실제로 이 희곡은 여러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소위 3통일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장소는 안달루시아에 있는 어부의 집으로 한정되어 있고, 시간은 약45분간이다. 즉, 연극은 카라르 부인이 가마에 식빵 반죽을 넣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 구어진 식빵을 꺼내는 것으로 끝난다. 식빵의 반죽이 구어져서 익는 것은 상징적으로 그녀의 확신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공연 시간과 공연된 시간이 일치한다. 사건 진행은 여주인공의 내면적 심경의 변화를 묘사하면서 필연적인 파국을 거쳐서 통찰에 이르는 과정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있다. 분석적인 회곡의 전형인 “외디푸스 짱’에서처럼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서 카라르 부인은 점점 더 사실과 직면하게 되며 그녀의 입장은 점점 해체되어간다. 또한 후앙의 시체를 앞에 놓고 기도하는 세 여인은 회람 비극의 합창대를 연상시켜 준다. 「브레히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환상의 연극 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하고 이로써 반파시즘 운동에 기여하려고 하였던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작품이 거둔 연극적 성과를 보건대 작가가 의도한 효과를 충분히 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곡이 스페인 내전이라는 대사건괴 여주인공 카라르 부인을 복합적으로 묘사하지 못하였다는 약점이 지적되고있다. 이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 희곡 기법의 약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 회곡 기법의 약점이기도 하다. 브레히트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1939년 5월 말에 있었던 스톡훌륨 공연에서는 서곡과 발문을 추가하여 이 회곡을 하나의 역사적인 비유극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서곡과 발문은 후에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작가 자신이 이 회곡을 추후에 비유극으로 만드는 것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 또 다른 보완책으로 브레히트는 “스페인의 사태를 보여주는 기록영화나 또는 다른 선전 행사와 함께 공연할’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회곡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이 순간적으로 이제까지의 입장을 버리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이며, 이런 갑작스런 변화가 신빙성있게 보이려면 어떻게 연기를 해야 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처음 공연부터 브레히트는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대본을 고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것을 주인공의 연기 방법을 통해서 보완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공연부분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IV.
이 회국은 “서푼짜리 오페라”와는 달리 세계 제 2 차 대전 이후에 비로소 많이 공연된 히트작이 되었다. 1970년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366회 공연이 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그후400회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24개 외국어로의 번역이 확인되었었다. 몇개의 주요 공연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초연은 슬라탄 두도프의 연출로 1937년 10월 16일 파리에서 있었다. 헬레네 바이켈의 주연과 독일 망명 연극인들이 참여한 이 공연은 당시 독일 망명객들에 의해서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당시의 공연명이 전하고 있다. 덴마크에서의 공연은 루트 베툴라우의 연출로1937년 12월 19일 코펜하겐에서 아마추어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주연은 다그마 안드레아센magmar Andrea-sen)이었는데, 다음해인 1938년 코펜하겐의 교육대학에서 재공연 될 때는 헬레네 바이젤로 교체되었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두 배우의 연기를 비교하여 연기슬의 두 가지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 하나는 카라르 부인을‘“암시적으로 연기하여, 감정이입을 실행하고 강요하며, 더 ‘장렬한 감동을 동원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제시하려는 인물에 대한 입장표명을 명확히 하고 그런 것을 관객으로부터 강요하는 것”이다. 헬레네 바이겔의 연기법인 두번째 가능성이 브레히트의 서사적 연극 양식에 맞는 것임은 분명하다.
프라이에 도이훼 뷔네에 의한 스톡훌름 공연은 1939년 5월말에 있었다. 이미 스페인 공화국은 1939년 3월 28일 마드리드의 함락으로 와해 되었고 브레히트는 북상하는 나치스의 추적을피해 스톡흘름의 리딩괴섬에 살고 있었다. 이런 변화된 상황하에서 브레히트는 배우들과 접촉하면서 서곡과 발문을 써서 이 희곡을 하나의 “역사적비유극”으로 만들었다. 공화국이 와해된 후 카라트 부인은 동생 페드로와 함께 프랑스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데, 투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보초병이 질문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페드로는 자기 누이의 이야기를 역사적인 예로 이야기해 준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 있었던 주요 공연으로는 1952년 11월16일 베를린 앙상블에 의한 공연을 들 수 있으며 브레히트의 지도로 이루어 졌다(연출: 에곤 몽크). 헬레네 바이 겔이 다시 주연을 하였으며 그후 1955년까지 49회나 무대에 올려졌다. 이것은 동독 텔레비에 의해서 녹화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시대는 다시 변화하여 전쟁의 참혹함은 점점 잊혀져가고 평화주의는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더군다나 한국 전쟁의 발발로 전쟁위협이 다시 증가하였고 독일은 재무장에 착수하였다. 1971년에는 베를린앙상블에 의한 재공연이 이루어졌다 (연출 : 루트 베르크하우스). 공연 연습 도중 작품의 결말에 대한 ‘열띤 토론이 극단내에서 있었는데, 이미 코펜하겐 초연때에도 이런 토론이 있었음은 마르틴이라는 사람이 브메히트에게 보낸 메모가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마르틴은 이 회곡이 “어떻게 하여 ‘중립적’인 어머니가 정치적인 투사로 성장해가는 가를 제시하는데 있어서-끝남과 새로운 출발을 보여 주는 강력한 결말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브레히트는 대본을 고치지는 않고 카라르 부인의 연기법을 변경하였다. 즉, 카라르 부인이 차례로 충격을 받을 때마다 연약해져서 가장 심한 충격을 받고서는 허물어져버리게 하는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충격을 받을때마다 점점 더 냉혹해지다가 마지막 충격을 받고는 갑자기 허물어져버리게 연기를 하여야 된다는 것이었다. 바이겔은 이미 1938년 2월의 코펜하겐 공연에서 이를 입증한 바있었다.
V.
이상에서 브레히트의 최다 공연작중의 하나인 “카라르 부인의 무기”를 간하게 분석하여 보았다. 작년 12월에 있었던 “서 푼짜리 오페라” 공연을 시작으로 해서 이제 브레히트 연극수용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달 23일로 예정된 전주 시립극단의 공연을 환영하며 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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