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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6 | 칼럼·시평 [문화저널]
썰물
김저운 소설가(2004-01-27 14:48:09)

담배가 유난히 썼다. 잠올 설친 탓인가, 할멈은 더욱 깊숙히 빨았다가후-내뿜었다. 흰 연기는 반쯤 열린창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타고 창문께로 피어 올랐다. 밤새껏 귓전을때리던 파도 소리가 이제는 잠잠하다.아침 요기를 해야지 싶었다. 옛 상차렸던 밥이 있으니 국물이나 좀 데우면 될 것이다. 문지방을 나서는 걸음이 허청거렸다. 부엌 뒷문을 열자,비릿한 갯냄새가 혹하니 풍겨온다. 문득 간밤의 꿈이 생각났다. 비안도(飛雅島)가 날아오르고 있었지. 섬이 한 마리 기러기처럼 화악 날개를 펴고떠올랐었다. 그리고 수명선 쪽으로유유히 날아가더니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할멈은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늬 때와 마찬가지로 섬은 그 자리에 있었다.이녘에 길몽이면 어떻고 흉몽이면 어쩔 것이며, 그놈 간 날이라 꿈도그렇게 꿨겼지. 이제사 홀가분하게 저승에 간 것이여.바다가 싫다고 떠난 놈이었다. 그렇다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우직한 용기 하나로 서울에 가더니무슨 공장엔가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 이듬해 뼈와 가루가 되어돌아왔다. 노사분규인가 뭔가로 요란한속에서 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불였다는 것이다. 허망하고 기막혀바다만 쳐다보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일년이 지났다.연탄불이 꺼져 있었다. 자정 무렵에야 젯밥을 짓고 국을 끓이느라 불구멍을 열었으니, 아침까지 불기가남아 있을리 없다.
가스를 놓읍시다. 탄불 가는 일은젊은 사람들도 힘들어요. 이삽만원을 내놓으며 사정하다시피말하던 딸의 기미돋은 얼굴이 떠올랐다. 포장마차를 시작하면서부터 입술을 붉게 칠하고 머리를 부풀렸어도 콧등이며 눈자위에 얼룩진 그늘은 감춰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다 지 팔자 소관이여.
할멈은 부엌 문 기둥에 걸어 놓은수건으로 행하니 코를 풀고 다시 마루로 나와 앉았다. 딸 생각도 역시가슴 메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열 다섯에 하섬 앞 갯벌로 조개 캐러나갔다가 행방불명됐던 딸은 십년이지난여름에야꼭제 얼굴올 빼다박은듯한 네 살짜리 계집애를 매달고 돌아왔다.
지 뜻은 아니었어라우. 인자 어매옆에서만 살 것잉께 제발 아무 것도묻지 말어라우.

낯선 사내에 이끌려 부산까지 가서 지내다 왔다는 딸은 어머니 무릎에얼굴올 파묻고 울었다. 억지로 꿀려가다시피 했다니 사람 대접 못 받고 살았음엔 틀림없겠지만 그렇게 살아온 것만도 다행이었다.
여기 저기 떠돌다 다행히 인정 있는사람 만나살지 않았겄소. 어매 보고싶고 고향에 오고 싶어도 부끄러위용기가 안 나대요. 좀 살게 되면가야지 혔는디, 그예 그 사랍이 물귀신이 됐어라우. 넋도 못 건졌구만이라우.
딸은 한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다가이곳 양식장 일을 거들던 지금의 박서방 만나 군산으로 갔다. 도선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소주나 해물 안주를파는데, 그럭저럭 끼니나 잇는 모양이었다.이심전심이라더니 군산에서 전화가온 것은, 그렇게 마루 끝에 앉아 딸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랫만에듣는 딸의 목소리가 우선 반가왔지만전날 제 동생의 기일도 모른척 한게 괘씸한 마음은 여전했다. 어매------잔뜩 울음섞인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밥이라도 한 그릇 해 놓았지라우?
혼인도 못하고 간 놈 내가 살아있을 때라도 챙겨야지.
그 아 다녀감서 누님 못 됐다고 섭섭했겠네라우.
어려서 헤어진 걸 귀신이라고 얼마나 정이 있겄냐? 밤새껏 창문열어 두고 갔다. 그 새 혼백이라도다녀가라고------. 근디 너 무슨 일있는갑다? 저쪽에선 분명 흐득이는 눈치였다.
무언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단 생각이들었다. 박서방이요------. 일을 저질렀어라우. 그렇게 순한 사람이 무슨------.
죄를 졌당게요.
죄 ?
그것도 아주 큰 죄를------. 글씨그가 사람을------. 사람을 죽였단다. 앞마당이 벌떡일어나 이마를 후려치는 듯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그려서 어매한테도 못 가고------. 딸은 아예 느껴 울고 있었다.단속반원이 들이닥쳤다. 포장마차를 당장에 치우라는 거였다. 피조개를먹은 사람이 무슨 균인가로 죽어갔으니 아예 철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코앞에 있는 횟집들은 다 장사를 하는데 왜 우리만 못하게 하느냐, 위생적으로 잘 활 테니 좀 보아 달라------.딸도 매달려 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야멸차게 뿌리쳤다. 심지어는포장을 뜯어내고 리어카까지 끌어가려했다.그 때 박서방은 빙글거리며 웃고서서 구경하는 사내를보았다. 그 근처 포장마차를 휘젓고 다니며 으름짱을놓아 돈을 뜯어가곤 하던 사내였다. 그들 내외가 유독 마뜩치 않아 하니까 두고 보자는 식이더니, 잘 됐다는 듯 빈정거리는 얼굴이었다. 그를 노려보던 박서방은 생선회칼을 들었다. 딸이 우르르 달려들어 말리려 했으나 사내는 이미 피 가운데 엎어져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딸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겁먹은사랍들이 저만치에 까말게 몰려 있더란다.
그래 유치장에 갔어요. 그 일로 정신없이 뛰다보니 언제 연락할 겨를이 없어서------. 그 새 마당 구석엔 감꽃들이 하dig게 떨어져 있었다. 할멈은 청맹과니 처럼멀거니 앉아서 하루를 보냈다.
온갖 일들을 다보아온 할멈이었다.살았으면 이제 백발이 됐을 남편도삼십년 전에 바다에 나갔다가 영 돌아오질 않았고, 이웃집 또 이웃집의남정네들도 그렇게들 갔다. 심원(心元) 사는 동서는 동네 부녀자들끼리 섬에서 조개 캐고 돌아오다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스무 명이 몰사하는 사고속에서 갔고, 아들은또공장에서 노동운동 한다고 제 몸에 불을 질러죽었다.사람 사는 곳 어디든 마찬가지일터이지만, 이곳 바닷가 동네처럼 바람모진 땅이 또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한 집 두 집 사람들은 떠났다. 이십여가호가 살며 제법 큰 동네였던 마을이이제 겨우 열 가호나 될까. 할멈이처음 시집왔을 때만 해도 명절이면 장정들의 꽹과리 소리 징 소리가 마을을 울렸고 뒷산 당집엔 붉고 노란원색의 헝겊들이 화려하게 나풀댔었다. 그러나 이젠 다 허물어져가는 흙벽에 바닷바람만 우 몰려와서 딩굴다 휑하니 가곤 할 뿐이다.
그래도할멈은여길 떠날수없었다.그렇게 떠난 이들을 기다려야 할 것같아서였다.저녁때가 되자 할멈은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나도무지 조개를 캘 마음은 없었다. 그저황량히 드러누운 갯벌만 바라보았다.바닷새들의 울음소리가 먼 곳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문득 할멈은 바다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아침부터 요기한 게 아무것도없어 비틀대는 걸음이었다. 물이 밀리는 부근에서 할멈은 쓰러졌다.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쓰러져 누운 채 바라본 수평선은 봉숭아꽃물처럼 붉었다. 황흘한노을,그 노을이 꽃상여처럼 출렁이며 다가왔다.
할멈은 힘없이 눈을 돌려 비안도쪽을 바라보았다. 간밤의 꿈처럼 섬은막 날아오르는 기러기 모양으로 바다위에 떠올랐다. 할멈은 눈을 감았다.그려 파도가 나를 저 섬으로 데려다줄거여.다시한번 밀려 온 파도는 마른 헝깊같은 할멈을 가볍게 쓸어갔다. 썰물이었다.다음날 지방지의 사회면 맨 아래쪽에 1단짜리 기사가 실렸다.〈지난 29일, 부안군 산내면 하섬 앞바다에서 이 마을 김순녀(64세)씨가 조개를 캐던 중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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