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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 | 칼럼·시평 [문화시평]
관객을 작품의 숲에 가두어라
-'검은새'를 보고_
김길수 연극평론가 순천대교수(2004-01-27 16:19:47)

연변 만주 벌판에서는 검은새의 모습올 볼 수 있다. 백두산 기슭에서도 검은새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이도배하를 거쳐 압록강에 그 메아리를 울리게 한다. 과장된 표현일지 모른다. 어쨌든 필자의 가슴엔 백두의 검은새는 시간과 역사를 뛰어 넘어 지금도 뭉클함으로 남아있다. 바로 이 검은새를 무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 꿈만 같다. “검은새”는 죽은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의 영혼만을 상징할 수 없다. 만주벌판 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산재한 민족 모두의 끈끈한고 향회귀의 염원과 그 동질적 소망이 “검은새”를 통해 부활하는 듯싶다.〈검은새〉(정복근作 ·장제혁 演出)의 공연은 같은 피, 같은 삶을 나눈다는 것이 나라의 흥망성쇠 보다 훨씬 오래 가고 진하다는 교훈을 환기시켜 준다.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 하여 충신들은 죽임을 당한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검은새들이 등장하여 거두어 간다. 효수하라는 외침이 객석을 진동하며 귀청을 때린다. 잔혹스런 이 장면은 감상충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관객은 주늑 든 상태에서도 왜 이 끔찍스런 상황이 벌어졌는가 하는 궁금중을 떨칠 길이 없다.
함길도 절제사 이정옥이 대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사건이 이 공연의 기본 줄거리이다. 이 같은 줄거리가 역사의 어두운 편린 속에 묻혀 부정적으로 매도되어 왔다면 오히려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통념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시각에서 과거 역사를 재조명토록 유도하고 있다.
왕조에 충성해야 한다는 허울 속에 당시 사대부나 지배층들의 허위상이 폭로된다. 수양의 변란에 아부 굴종하는 이들의 형태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왕조 사관으로 변형된다. 이들이 이정옥을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할 때 관객의 비판력은 점차 증대되기에 이른다. 반면 “발해”, “말갈”, “숙진”, “여진”, “고려”, “백제”, “신라”라는 이름들이 군중 무용과 더불어 외쳐진다. 민족의 동질성이 어디까지 확대되고있는가 하는 점은 자명해 진다. 이 같은 메시지는 단순한 교훈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시적 상상력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원래 한 피가 있었소. 피가 흐르고 모여서 백성이 되었소/한 곳 태백산에 이를 한울로부터 천부인을 받아 홍범으로 삼았소.
/박달나무 아래 신수두를 이루어 피는 아름답게 당당하게 굽이치며 흘렀소.
/중국의 삼황오제조차 이 피의 한 끝이며 산에서 우씨에게 홍범구주를 주어 치수하는 법을 가르친 것도 이 피였소.
/세월은 흐르고 피는 누리를 덮으며 뻗어 나갔소.
어떤 갈래는 가늘게---/숙진… 여진… 말갈…/어떤 갈래는 굵게.
/불리지… 창해… 발해…/골을 이루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줄기도 있었소.
/신라… 고려… 조선---/줄기는 너무 멀리 너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 가늘해지고 미미해지고 힘을 잃었소. 빛나던 근본을 잃고 시들었소.” 엄청난 마력을 지닌 이 언어는 우리 민족의역사적 원초성과 그 동질성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분단 현실의 부끄러움을 냉혹히 성찰토록 해준다.
시적 분위기는 소리의 반복을 통해 박진감과 생명력으로 이어진다. 추상적인 개념들이 연극 대사에 적합치 않음을 감안한 탓인지 추상 언어 역시 반복된다. 언어의 반복은 다양한 의미를 성찰토록 하는데 톡톡한 몫을 해내고 있다.
이 공연은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가 무리 없이 실현되었다는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은 무대미학을 향한 철저한 탐색과 실험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무대 중앙후면엔 반투명 방식의 검정 커텐이 드리워져 있다. “검은 새”라는 추상적 형상들이 커텐 뒤를 흐느적거리며 지나간다. 검붉은 조명이 측면에서 투사되고 조명 빛깔과 커튼의 색상 그리고 검은새의 형상이 서로 合--된다. 대본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창의적 연출력은 집단 놀이, 군무로 이어지는 공동 연행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역사물은 구체적 사건 나열에 의존하기 쉽다. 이 공연에 삽입된 추상적인 몸짓 언어는 구체적 현실에 양념과 엑기스 기능을 철저히 수행한다. 추상적 표현 형식이 살아났던 이유는 관계의 다양성 및 다의성에 기초를 둔 덕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놀이적 요소의 삽입은 무거운 이 공연의 분위기에 신명과 활력을 부여하면서 난장판의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만끽토록 해준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구성상의 취약성으로 인해 인식의 폭이 좁았고 감동의 깊이 또한 약하다는 아쉬움을 주고있다. 예술성은 뜯어 볼수록 맛이 우러나오는데 있다. 예술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장 문 밖에서 그리고 집에서도 줄곧 주인공의 딜레머로 고민하도록 해준다.
동시에 극속의 축적된 불합리상이 있을 경우 거기에 대한 비판력이 지속하도록 유도해 준다. 그런 측면에서 이 공연은 원작의 맹점으로 인해 상당한 손해를 본 셈이다. 이정옥의 내적 번민과 회의가 가끔삽입되는 데 이 점은 그 자체로서상당한가치를지닌다고볼수있다.그러나 이 같은 모티브의 설정이 다른 장면과 과연 긴밀한 연결 고리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확실치 않다. 이 같은 모티브가 살아나도록 줄기차게 이 극이 전개되었다면 대단한 갈등 파장을 야기시키면서 관객을 줄 곧 흡인시켰을 것이다. 반면 비판적 성찰올 겨냥한 반동적 모티브의 설정은 그런 대로 수긍이 가지만 반복, 변조 내지 축적의 수법이 확실치 않아 그 효능 또한 악화되어버린 감이 있다. 여기서 이정옥을 살해 하려는 음모 진행과정 등은 혼란스러움올 느낄 정도의 난잡한 장면 처리로 냉정한 비판 행위를 방해 해 버린 주범이 되고 있다. 아울러 피의 모티브 역시 용두사미격으로 점차 약화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다양한 모티브들이 이처럼 상호 연결 고리를 갖지 못함에 따라 각각의 모티브는 오히려 상대방의 효능을 저해하거나, 희석시켜 버린다. 연출자는 구성면에서 원작의 취약성을 뜯어 고치기 위해 탐색하고 고민한 혼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껍질을 벗어야한다. 각 장면들 하나 하나 탐미주의적 섬세함이 스며 있지만 작품이라는 전체 틀의 측면에서 관객을 녹아웃 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연출가적 탐색 의지가 무대 미학적요소 및 배우술의 측면에서 그런 대로 성과를 거둔 반면 작품이란 숲 속에 관객 모두를 가두어야 한다는 숙제가 남겨진 듯 싶다. 이 때문에 원작 선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극작 워크숍을 받지 못한 지역 연극계로선 이 만한 택스트를 무대화 하는 것도 대단한 성과로 꼽을 수 있겠다.
이 공연의 무대화는 잊혀진 사실(史實), 은폐된 역사를 바로 성찰케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훈적 메시지는 설교장이나 강의실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다.
문제는 메시지에 대한 지속적 인식여부이다. 동시에 메시지 성찰을 향한 감동 창출 여부이다. 바로 이점이 역사와 역사극의 차이점이다.
이 차이의 간격을 얼마나 벌리느냐하는 점은 예술적 환타지가 얼마만큼 유발되었는가의 여부와 직결된다고 하겠다. 아픔의 역사, 부끄러움의 역사를 뛰어 넘는 길은 부끄러움의 틈새를 풍성히 채워 넣어줄 상상력의 창조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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