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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0 | 칼럼·시평 [문화시평]
'겨레의 노래' 전주 공연을 보고-한 방송인의 시각에서-
진호·본지 발행인(2004-01-27 16:27:26)

"우리시대의 진정한 싸움은 어쩌면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세워 놓고, 바라보고 싶은 싸움 아닌지 모른다. 제자리를 떠나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돌아앉은 것들의 외로움과, 슬픔과, 처절함….
남준이의 시를 읽고 있으면 온통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그의 詩가 눈 내리는 법성포의 그 짙은 서정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 지랄들 아닌가?"
겨레의 노래 전주공연을 보면서 필자는 엉뚱하게도 詩人김용택이 박남준 시집「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뒷 표지에 썼던 위와 같은 글귀가 생각났다.
이제 우리의 노래문화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20세기 초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외래문명이 이 땅에서 우리의 노래인 「민요」를 상실케 한뒤, 「대중가요」라는 틀에 고이고 뒤틀려버린 이 풍토에 1990년, 우리는 다시 우리의 노래를 찾을 수 있을까?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어떤 노래이며, 언제 어떻게 흘러나오느냐에 각각의 반응이 다를지언정 사람들은 노래를 듣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대학이나 노동현장 등에서 나오는 「운동가요」는 이미 가장 효율적인 선전, 선동의 매체로 자리잡고 있으며, 친구나 동료들과 모임에나 회합에서, 노래는 꼭 있어야 하는 통과의식처럼 되어 있다.
「겨레의 공연」을 평하기에 앞서 기쁠때나 슬플때나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우리의 노래는 과연 어떤 노래인가를 필자의 경우에 빗대어 잠시 언급해 본다.
70년대초 고교시절을 지낸 사람들은 「김추자」라는 가수를 기억할 것이고, 그의 풍부한 볼륨과 선정적 음색과 함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요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씩씩하게 싸우다 돌아온 근육질의 한 상사를 좋아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시절 필자에게 월남으로 떠나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군인들은 영웅이었을 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와 군사정권의 잔인한 장막 뒤에 죽어갔는지를 생각할 수도 없을 일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공연評」이란 제목 하에 무슨 넋두리냐는 힐난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대중 가요는 어떤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지 자료를 참고로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유행가의 성립기(20C초~1926)
민요의 재창조 능력이 쇠퇴하면서 극히 피상적인 계몽적 내용의 창가류, 최남선의 창가로 대표되는 〈경부철도가〉〈한양가〉〈조선유람가〉등의 계몽창가는 주로 "신문화의 찬양" "국토예찬"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런 주제의식들은 곧이어 애국 계몽운동이나 3·1운동이후의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로 이어진다.
2)일제시대 유행가요(1926~1945)
1920년대에 이르면 축음기와 레코드가 부유층의 필수품이 된다. 상업자본과 함께 일본 레코드사의 조선 상륙을 결정적으로 부추긴 노래〈사의찬미〉는 윤심덕의 극적인 정사사건으로 더욱 선풍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 후 30년대 유행가는 초기 유행가와는 달리 한민족 고유의 리듬이라 할 수 있는 3박자 계열이 퇴조하고 전형적 왜색가요인 〈홍도야 울지마라〉〈번지없는 주막〉〈나그네 설움〉등 세칭 "뽕짝"이라고 불리는 트로트리듬의 왜색가요들이 식민지문화의 공허함과 천박함을 더해 주었고 노골적 친일가요라고 할 수 있는 〈복지만리〉는 아직도 우리방송에서 "흘러간 명곡"으로 지금은 「전통가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TV를 통해 매주 방송되고 있다.
3)해방이후의 대중가요(1946~1970)
해방정국은 비록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민족문화건설에 커다란 업적은 남긴 기간이었다. 최근 해금된 김순남(산유화, 자장가 작곡-겨레의 노래공연에 장필순이 부름)과 이건우 등이 뛰어난 활동을 보였으나 미군의 진주와 6·25민족전쟁은 「맘보」와 「차차차」등 외국의 퇴폐음악에 다시 물들고 만다.
그리고 1957년에 이르면 「오아시스」「지구」「서라벌」등 레코드사들의 출연과 함께 LP레코드가 생산되면서 서구적인 노래, 재래식 뽕짝, 신민요풍 등 국적불명의 노래가 "판"을 치는 대중가요 문화의 난맥상을 불러일으키고, 4·19혁명의 감격이 민주당정권의 혼란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지하에 묻혀있던 일본음악의 해적판이 범람하고, 한편에서 GI문화의 뒤를 이어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이 무차별하게 밀려온다.
그리고 60년代의 트위스트 열풍은 젊은층에 열병처럼 퍼져나가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타 김〉이 공전의 히트를 거두고, 그나마 〈초우〉〈빛과 그림자〉의 패티김은 그 뛰어난 가창력으로 지금껏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4·19이후 살며시 고개를 든 일본 노래의 범람은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왜색가요"의 선풍이라는 새로운 물결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트로트의 여왕"이미자를 탄생시킨 가요계에 <동백아가씨>에 대한 대중들의 엄청난 향수는 곧 <미워도 다시한번>으로 이어지고 <가슴아프게>의 남진을 이미지와 함께 트로트계의 상두마차에 올려놓게 된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나훈아, 현철, 주현미, 태진아, 최근의 문희옥 등등.
우리 대중은 이"뽕짝"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는가?
그리고 60년대 중반 또 한편에서는 방송국들의 경쟁과 함께 70년대를 팝송의 시대로 둔갑시키게 된다.
4)197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의 노래운동을 부활케 했고, 대중음악계에도 세칭 "통기타 부대"가 출현하게 된다.
김민기, 한 대수, 송창식, 윤형주, 서유석, 양병집, 양희은 등. 이들이 말하는 꿈과 낭만과 은근한 사회비판, 저항의 몸짓들은 그동안의 상투적 사랑타령에 지겨워하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이른바 전후세대의 "청년문화"를 창출하게 된다. 물론 이 시대에도 미국문화의 영향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고고"가 팝문화의 절정을 이루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문화적 점령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고 그 이후 뽕짝도 아니고 포크도 아닌 "트로트 고고"-최헌<오동잎>, 김훈<나를 두고 아리랑>, …조용필<돌아와요 부산항에>-
"트로트디스코"-혜은이<제3한강교>그리고, 최근의 댄스뮤직-박남정, 김완선 등등.
우리의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우리의 대중가요가 다 이처럼 퇴폐적이거나 외국문화의 무조건적 모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선구자><압록강행진곡> 등 항일투쟁의 노래도 있었으며, 해방직후 <가거라 삼팔선아><귀국선>등 분단에 대한 울분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노래도 있었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 부패에 대한 무저항적 현실도피를 내용으로 하는 분단이후 최초의 금지 곡인 박재홍의 <물레방아도는 내력>도 있었다.
또한 70년대 대학가에서부터 시작된 <아침이슬><강변에서><사노라면><금관의 예수> 등은 일반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노래였다.
그리고 80년 5월을 겪고 난 후 "노래운동"이란 용어와 함께 재야운동권에선 수많은 투쟁가교와 서정적 운동가요, 그리고 민요운동등이 태동하기에 이른다.
<님을 위한 행진곡><오월의 노래><타는 목마름으로><이 산하에><그날이 오면> 등등 운동가요와 함께 "민요운동"이 본격화되어 전래민요의 발굴과 새로운 민요의 창작, 보급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위현장에서의 노래는 초기의 낭만적 경향에서 최근엔 힘차고 밝은 분위기, 단조보다 장조를 선호하고 선율보다는 리듬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루하게 인용된 우리의 대중가요史를 정리하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겨레의 노래」는 지금껏 집권자들이 만들어준 관제가요나 눈물과 한숨의 유행가를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의식화된 민중의 정서로서 남북의 민중이 하나의 형제로 같이 부를 수 있는 「겨레의 노래」를 주창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개화기이후 불리어온 기존의 노래 중에서 「겨레의 노래」라 할만한 것들을 선정해야 할 것이고, 특히 해방공간에서 불리어졌던 노래, 중국연변 우리민족의 살아있는노래들을 "분단극복 의지와, 진솔한 삶의 노래, 그리고 구호가 아닌 노랫말과 가락"이라는 지침위에서 선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따로따로 나누어졌던 우리의 노래들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노래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았다는 데 그 의의를 십분 인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기획 하에서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리지 않고 "나와 너, 여와 야? 운동권과 제도권" 세대간, 계층간 등 모든 이분법을 뛰어 넘으려 한다" 김민기(총감독)의 의지와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겨레의 노래」전주공연은 5천여명(2회)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기본 골격 위에 이 고장의 문화패들이 함께 하는 무대였다.
전북 연합 풍물패의 길놀이로 시작된 뒤, 실림비나리(김지하 글), 전래민요 「아침」, 그리고 「자장가」「달밤」「이등병의 편지」「이세상에」「이태원이야기」가 이어졌고 성악가 이영구씨의 「반갑구나」와 「우리의 소원」뒤에 이 고장 노래패 "백두한라"의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그날이 오면」그리고 유장영의 「에라 가자, 가자 어서가」와 마당풍물패 "탈머리"의 「해방비나리」, 그리고 우리에게 낮익은 서육석의 「내고향」「홀로아리랑」, 이 고장 출신 성악가 임옥경의 「고려산천 내사랑」, KBS전주소년합창단의 「고리」「이작은 물방울 모이고 모여」, 그리고 「이세상 어딘가에」와 마지막으로 김민기의 「아침이슬」순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고장 풍물패 「탈머리」와 유장영의 출연은 지방문화패와의 한마당이었는데 큰 의의가 있었으며 「고려산천, 내사랑」을 부른 임옥경의 노래는 이 공연의 전반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서 한방송인으로서, 그리고 "겨레의 노래"사업단의 의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비평이라는 이름하게, 먼저 지엽적(공연에 있어서 기술적인면)문제로 첫째, 오후공연에 1층 floor에 사람들 입장을 통제한 것은 일체감 조성이란 측면에서 주최측의 큰 실수였다.(밤공연땐 이 실수를 알아 보완했지만)
둘째, 배경 slide의 단조로움과 훌륭한 조명시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이다. PIN이나 Back조명은 무난했으나 무분별한 Dryice사용은 오히려 전체적으로 답답함을 불러 일으켰다.
셋째, 보다 열린 분위기가 되지 못하고, 꽉 짜여진 분위기에 과다한 연출이 많이 눈에 띄었다.
넷째, 적절한 노래의 배합으로 지루한 감은 덜 했지만 막간 이용이 미흡했으며 무엇보다도 같이 부를 수 있는 빠른 템포의 노래가 많이 삽입되지 않은 것은 공연의 의도와 어긋난 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주위의 評)
지루하겠지만 독자들이 조금만 더 참아준다면, 그리고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하려는 한 방송인의 입장을 고려해 준다면
첫째, 기왕 「민족의 하나됨을 표방」할만큼 기성가수들을 좀더 많이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했어야 했다. 그것은 곧 대중성 확보를 위해- 김수철, 이선희등 그중 의식 있는 가수들과의 만남은 이공연을 한층 대중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이시점의 모든 「문화운동」은 대중성 확보를 최대과제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KBS나 MBC의 방송심의에서 겨레의 노래가운데 <이세상에>한곡만이 통과했다면, 본인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지명도가 낮은 "최전영"보다는 대중에게 지명도가 좀더 높은 가수를 통해 이 노래를 더 알리는 노력 말이다.
둘째, 제도권으로의 진입니다. 소위 "뽕짝"이라는 트로트가요가 왜 아직도 우리노래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정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런 노래에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며, 그 책임은 물론 당대 음악인과 방송매체로 돌려져야 한다. 대중이 없는 우리의 노래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주로 비제도권에서 맴돌았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보여준 작업은 훌륭했다고 본다. 그들의 노래중 「솔아, 솔아 푸른솔아」나 「사계」등은 기존방송매체에서도(비록 라디오지만)큰 인기를 모은 것은 그만큼 그들이 자기들의 노래를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예로서 제도권 집입의 포기가 아닌 제도권에 기를 쓰고 들어가 그 토대위에 예술행위 자체를 민족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민족음악 연구회(회장 노동은)의 음악적 목표도 훌륭하게 생각된다.
그래서 TV에 나오는 인기가수들이 한탄과 허무와 미친 듯 광란하는 노래가 아닌 "겨레의 노래"를 부르게 해야하고, 시내 술집에서도 쑥스러움 없이 뽕짝 아닌 우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여 더 많은 "겨레의 노래"가 살아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겨레의 노래」에 선보인 곡들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곡에서 보이는 이념이나 목적의식면에서 약한 듯 하다.
필자는 그것이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잇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노래가 「운동」의좋은 도구이긴 하지만 운동의 성취를 위해 노래를 수단화시킬 때 사람들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예술성을 바탕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겪는 삶의 진실을 나타낼 때, 그리고 전반적인 삶의 향상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떠난 조선의 정서가 담긴 통일의 노래일 때 그것이 많은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우리의 노래가 될 것으로 믿는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문적 「민족음악연구회」등 많은 진보적인 민족음악 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제2의 「겨레의노래」공연엔 이런 움직임들이 보다더 집산 되고 살아있는 전통음악(민요, 국악)등이 함께 어울린 겨레의 한마당 공연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1990년, 이제 겨레의 노래, 우리의 노래는 제자리를 찾을 것인가? 진정, 우리의 자리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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