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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동양사상의 재인식
강건기· 전북대교수(2004-01-27 16:45:27)

나는 얼마전 한국사상을 주제로 하는 한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세사람의 믹국인 학자의 발표가 있었는데, 그중 두사람은 우리말로 발표를 할 뿐만 아니라 질문까지도 훌륭한 우리말로 받앗다. 한 사람은 아리조나 대학의 마이클 켈톤 교수로 <퇴계>를 연구하는 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로스엔젤리스에 잇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로버트 버스웰교수로 <지눌> 사상을 연구하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들을 보면서 모처럼 흐뭇한 기분에 잠겼고 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선인들이 쌓아놓은 사상적인 업적에 대한 고마움과 자부심이었다. 그 사람들이 한국의 철학 사상에 대하여 그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그간 서구의 지성들이 동양사상에 기울여 온 깊은 관심의 결과라 생각된다.
그들이 동양에서 찾고 잇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서양은 과학과 물질문명의 발달을 선도해 왔다. 그러한 결과로 사상 유례없는 과학과 물질의 발달을 이룩하였다. 우리의 생활은 많이 편의로워졌고 어느정도의 물질적 풍요도 누리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지금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잇다. 우리의 산하가 오염되어 가고 자연이 황폐화 되어 가고 있으며 인류는 핵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의 자연의 관계가 파괴 되었으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 또한 멀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또 이러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이 스스로를 잃어버린 인간상실의 원천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의 지성들은 동양의 사상에서 새로운 삶의 지혜를 찬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바탕에는 모든 것을 둘로 보는 서구의 사상적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과 신이 둘이요, 인간과 자연이 또한 계층적이며 인간과 인긴이 개체아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이원적인 사고의 전통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물직ㄹ적인 문명을 발달시킬 수는 이었지만 공존과 평화의 질서는 여지 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 조짐을 우리는 심각해지고 있는 환경의 문제, 파괴되어가고 있는 가정, 핵전쟁의 불안으로부터 실감할 수 있다.
세계는 지금 새로운 삶의 길을 목마르게 찾고 있다. 그 새로운 삶의 길은 단절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즉, "하나"인 세계관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동양은 일찍부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가 둘이 아닌 사상의 전통을 쌓아왔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조화로운 회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유가의 전통이며 인간과 자연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보는 것이 도가의 기본이다. 또 부라흐만과 아트만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이른바 범아일여의 사상이 브라흐만교의 기본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로 깊은 관계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연기에 입각한 불교사상의 근간이다. 「천지가 나와 더불어 한뿌리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몸」이라는 말은 이러한 동양사상의 바탕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러한 사상적 전통에서 형성된 인간과이 다름아닌 사람이 그대로 하늘이며, 여여한 부처의 씨알이라는 동양적 인간관이다. 나는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이러한 동양적 인간이해를 동양적 휴머니즘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동양적 인간이해는 인간만이 제일이라는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바탕에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본래 두이 아니라는 "하나"인 사상적 바탕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바탕을 일컬어 참나, 큰나라 하였고 참생명 자리라 하였다, 그러한 나, 그러한 생명의 구현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이러한 참 휴머니즘이 서양의 휴머니즘에 앞서 1500년, 2000년 전에 이미 꽃피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이러한 휴머니즘의 새로운 인식과 실천이야말로 오늘의 세계,인류가 지향해야 할 삶의 길임을 우리는 알아야겠다. 이제 비좁은 서구적 휴머니즘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실을 눈앞에 생생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중세의 신본주의로부터 인간의 자각과 해방을 부르짖고 일어난 서구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하늘 같은 성품을 망각하였고 감각, 지각하는 개체아를 인간이라 이해 하였다. 그러한 인간 이해를 토대로 하여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발달할 수 있었고 과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적 인간 이해는 피상적이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각, 지각하는 존재일 뿐만아니라 더 깊은 "하늘 같은""부처같은"바탕을 갖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각, 지각하는 차원의 인간 이해를 기본으로 발달한 서구의 문명은 감각, 지각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 결과는 표층의 나와 심층의 나의 분리요, 멀어짐이었다. 소외와 자기상실의 근원적인 병의 뿌리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표층의 감각, 지각하는 차원의 나는 항상 나와 남, 나와 세계를 둘로 보는 개체아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갈등은 어쩌면 이런 인간 이해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편협된 인간 이해를 기본으로 한 서구의 휴머니즘이 마치 유일하고 제일가는 일본주의인 양 교육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나는 서글프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는 바로 서구중심 식민지 교육의 한 본보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구의 지성들은 지금 물질문명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그 한계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이원적 사고의 병폐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양의 사상적 전통에서 현대의 문제를 풀어갈 슬기를 찾고 있다. 동양의 사상에서 그들은 나와 이웃, 나와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귀중한 "하나"의 전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눌과 퇴계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상적 흐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선인들이 쌓아올린 사상적 금자탑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으며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의 학교에서 우리의 전통과 사상을 가르치는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 왔던가? 우리의 대학에서 우리의 철학, 우리의 음악, 우리의 예술은 어떠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대만의 세계적인 석학 죤 우는 "앞으로 세계는 동·서가 하나되는 새로운 종합을 이루게 될 것이며 그 종합은 서구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세계로 확산 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러한 종합의 세계를 "하나인 세계"라 이름해 보고 또 그러한 세계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나는 하나인 세계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결코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일찍이 우리의 선인들은 오늘날 인류가 절실히 요청하는 나와 남, 나와 우주를 둘로 보지 않는 하나인 사상의 토대를 굳건히 해 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사상적 전통을 바르게 알고 오늘의 세계에 구현하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정진하는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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