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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3 | 칼럼·시평 [시]
내 가슴에 하얀 반달
박남준 본지 편집위원(2004-01-29 11:47:57)

46. 산다는 것

마당 한편을 일궈 씨 뿌렸습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일어 구름을 몰고 비 뿌리며 마른 땅 적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해가 뜨기를 기다려 가만히 햇빛을 향해 내밀어 올린 새순, 이윽고 잎이 돋아 무성한 그늘을 만들며 하늘로 하늘로 줄기를 키웠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가지 가지 꽃 피겠지요 꽃 지겠지요 세월은 흘러 그 꽃들 튼튼한 열매로 익어 갈 것이고요 껍질만 앙상한 쭉정이들도 더러 나오겠지요

산다는 것이 살아온 날의 더운 땀 흘리며 저마다의 깊이대로만 열매 맺어가는 것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쓸쓸했습니다

47. 내 가슴에 하얀 박달
공산 명월인가요
노을 뒤편 저 하늘로
달 하나 떠오릅니다
이 밤, 그대 이마위에도 둥근 달
떠오르겠지요
저 빈산, 내 손끝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높은 나뭇가지 끝
떠오르는 당신 훤한 얼굴
공산 명월인가요

달 하나 떠있습니다
내 가슴 빈자리에 떠오르는 달 하나
그리움의 정한으로도
한낮의 빛살로도 감춰지지 않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 하얀 반달,
슬픈 낮달 하나
빈 가슴에 떠있습니다

48. 그대라 이르는 화두
선암사 저녁 예불 운판을 치다 날짐승들아 그만 고단한 날개를 접어라 목어를 친다 냇물의 고기들아 범종을 친다 산중의 모든 짐승들아 이밤이 편안하거라 법고를 친다 떠도는 나를 앉히고서 이는 번뇌로부터 마음을 끊고저 가슴은 북이 되어 울리네 두드려도 울어도 이 세상 그대라 이르는 찾을 길 없고 풀길 없는 화두 하나 마음은 머리풀어 구름처럼 헤매이네

49. 시인의 나무
바람부는대로 흐르는대로
가지가지 강물소리 키우며
모진 목숨 몸 뒤틀며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을
붉은 소나무, 소나무 한그루
가슴에 키우고 싶습니다
아버지,
다가서면 당신 품안같은

50. 진달래
그대 이 봄 다 지도록
오지 않는 이
기다리다 못내 기다리다
그대 오실 길 끝에 서서
눈시울 붉게 물들이며
뚝뚝 떨군 눈물 꽃
그 수줍음 붉던 사랑

51. 나무의 노래
들리지 않아요
무덤가에 상사목
나무에 기대서면
떠나간 그대 부르는 소리
부는 바람이 아니어요

52. 꽃. 새. 나무.
한때 나는 들꽃이었어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겨운
며느리 밥풀꽃 할미꽃
숨죽이며 숨죽이며 붉은 눈물 떨구었지
한때 나는 떠도는 새였어
들어봐요 울음처럼 서러운
안타까운 그 그리움 전하고 싶었지
이제 나는 눈 내리는 들녘 갈잎의 나무
머지 않아 뿌리내린 나의 슬픔도
대지에 누워 거둬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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