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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칼럼·시평 [서평]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1991)
옥영란 푸른숲 출판사 근무(2004-01-29 12:07:37)

살아가는 자의 뒷모듭은 누구나 쓸쓸하다 세상의 빛과 어둠, 혹은 빗발 속을 걸어가는 어깨는 쓸쓸함으로 야위어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가 또는 그녀가 내게 와서 하나의 의미로 섰을 때 신산한 世情(세정)을 뒤로 한 채 가늘게 떨고 있는 어깨, 누구에겐들 그 어깨가 작고 안스러워 보이지 않으랴.
그 작은 어깨를 감싸안고 온전한 사랑을 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일까.

해직교사 안도현.
시인이라는 이름처럼 늘상 그를 따라다녀 이제는 썩 잘어울리는 옷이 되어버린 안도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가 세상에 눈뜨기 시작한 나이에서부터 교사의 직위를 박탈당한 지금까지의 고통과 눈물을 모아 펴낸 연시집<그대에 가고 싶다>에는 열 몇 아니면 스물의 언저리에서 우리 가슴에 불을 지폈던 그, 혹은 그녀가 오돗이 들어앉아 있다.
‘그대 손등위에 처음으로/ 떨리는 내 손을 포개어 얹은 날’의 기억, 몇 번이고 찢으며 다시 썼던 ‘마지막 편지’ 그 슬프고 아름다웠던 기억, 기억들.
진실로 사랑이 아름답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또한 사랑을 노래하지 않은 시인도 없었다. 하지만 팍팍한 세월의 거친 바람속에서 힘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戀詩는 그리 많지 않다. 두근거리는 사랑의 시작에서 갈등과 방황의 시절을 지나, 둘의 만남 속에 이웃도 들어오고 역사니 조국이니 하는 것들이 자리잡고 들어와 더 큰사랑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그린 이 사랑의 시편들은 따뜻하고 건강한 서정으로 거친 세월의 무게를 한껏 가셔준다.
언뜻 눈에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나 이 詩集은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이, 가슴에 다가드는 다른 하나를 만나서 마음 졸이고 애태우는 모습, 마침내 사랑을 얻은 후의 들뜬 모습, 그 사랑에 흠집이나 상처를 입은 모습, 둘의 사랑을 그려가는 배경에 역사외 민족이 들어앉는 과정들, 이 모든 것이 모여 ‘나’와 ‘그대’를 더욱 끈끈하고 탄탄하게 엮어주는 것이다.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빈 들판을 떠돌다 밤이면 눕는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긴 날을 혼자 서서 울던
풀잎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집도 절도 없이 가난한
어둠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바람도 풀잎도 어둠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대가 있음으로 해서만이 ‘나’ 또한 의미를 가진다. 그대를 만난 뒤로 세상은 무한히 깨어서 다가오는 우주이다. 그대가 있기에 모든 것은 아름답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하나 없이 넉넉해진다. 하지만 이 시집이 빛나는 것은 시인이 그저 우리의 귓가에다 부드러운 노랫가락을 속살거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그림움 하나로 무장무장/가슴이 타는 사람이 아니냐’라며 뜨거운 격정을 슬며시 비춰 보이던 시인의 인식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으로, 다시 여기에서 ‘갈라진 조국과 사상을 하나의 깃대로 세우려/ 우리는 바람을 흔드는 깃발이 되어간다’로 급격히 전환한다.
시인은 사랑의 본성대로 ‘그대’를 자신의 가슴에만 유폐시키지 않고 시간과 공간까지 확대시켜 끌어안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된다. 물론, 한국일보에서 서준섭이 지적한대로 ‘통일의 전사’나 ‘조국’이 나오면서 관념으로 떨어질 우려가 없지는 않지만 ‘우려’란 단지 미래형에 지나지 않으므로 시인이 <이사>라든가 <집>에서 획득한 현실감각 쪽에 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대’라는 말이 덮어두었던 추억의 자락을 들추고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한에는 이 戀詩들 역시 살아 숨쉬는 힘을 가질수 있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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