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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칼럼·시평 [문화칼럼]
물은 같이 마시자
진동규․시인(2004-01-29 13:29:19)

우리 거리에도 이제 물 파는 차가 자주 눈에 띈다. 1톤 트럭에 상호까지 새겨서 물장사임을 광고하면서 다니는 모습이다. 하긴 육십여명 되는 우리 사무실 직원들 중에도 몇 분은 수돗물을 먹지 않는다. 좁은목 약수를 이용하시는 분이 대다수지만 또 두 분은 송광사 야영장 물을 사용하시고 극성이신 또 한 분께서는 모악산 수왕사 물을 잡수고 계신다. 거룩하게 물 잡수시는데 감히 내가 비아냥거리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가벼이 말할 사안이 아니다. 기실 어떤 것보다도 최 우선해야할 문제이다. 언젠가 나도 식수를 어떻게 해결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어물쩡 넘기면서 당황했었다. 내 당황함이란 다름 아니었다. 죄도 없이 잘못도 없이 내 가족들에게 무책임한 가장이 되어버린 듯 해서였다. 못할 말을 하냥 무안해 하는 그의 표정에서 나는 또 어쩌면 그렇게도 무지하느냐고 하는 힐난의 빛도 섞여 있음을 놓칠 수가 없었다. 본시 내가 촌놈이었으니 촌티나는 것이야 어쩔 것인가 마는 화풀이 한 번 해댈 데 없이 짜증스런 일이었다. 미나마따 괴질병의 소문이라도 들었으면, 그리고 세계에서 암 환자가 가장 많은 게 우리나라고, 그리고 그 원인은 다른 게 아닌 농약이니 공해니 하는 그런 탓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섭생의 문제에 겁이 더럭 나기도 할 것이다. 환경오염이라는게 그렇다. 언제부터인지도, 또 무엇 때문인지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할아버지가 죽어갔고 아버지가 죽고 또 자식이 죽어가는 현실의 문제이다. 실로 끔직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태아에서부터 기형으로 태어난 막둥이 딸을 어머니가 돌보다 가시자 출가한 언니가 데려다가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진은 아닌게 아니라 철렁했다. 가진 자들의 푸념이라고 일축해버리던 무디기만 한 가슴들을 철렁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리라. 이왕 무딘 가슴 이야기 나온김에 짚고 넘어갈 것은 짚어보자. 내 자신 무딘 쪽이었으니까 생각나는대로 한번 챙겨보자. 농약 섞인 수돗물 한 대접 마셨대서 금방 내 팔뚝에 반점이 생기지는 않는다. 금방 창자가 뒤틀리고 머리가 빠지고 죽기라도 하는 건 아니리라. 나같은 촌놈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라 실감으로 오지 않았던게 사실이었지만, 실은 그래서 더 무섭고 공포스런 것임을 왜 몰랐던가. 느닷없이 다리 하나를 뚝 떼어간다거나 팔뚝 하나쯤 슬쩍 해가는 교통사고의 차원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자연의 분노, 즉 신의 분노는 돌이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절대적이며 그 결과 또한 처참하리란 것이다. 하루하루 일상의 노여움을 축적시키다가는 무서운 증오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그 증오는 잔인해서 기억력을 싹 뺏어버리고는 헛소리를 지껄이게 한다거나, 눈알을 지옥의 각도로 잡아 돌려 아수라만 보게 한다거나 그래서 영원히 도깨비 울음만 지르다가 죽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처절한 형벌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신의 분노는 우리들 개인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기록 되었으되 그 자손 만대에 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우리는 수돗물을 마시고 있다. 그 냄새나는 구정물을 들이키면서 물 사먹는 사람들이 부럽다. 슬며시 그 사람들은 나와 동류가 아니다는 생각이 든다. 이질감이 이는걸 어쩌랴. 상대적 여유없음이나 열등감 뭐 이런 차원이 아니다. 행여 저들이 선민의식 비슷한 걸 가지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불편한 관계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분들을 결코 두둔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재작년 금강물 악취소동으로 골목마다 아주머니들이 쑤근쑤근 할 때 실은 일찍 깨우치신 분들이 높으신 문도 만나고, 만나서 따질건 따지고, 목청 크게 소리도 하고 그래서 앞자락 감당 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정작 나서야 할 분들이 문제권에서 쏙 빠져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래 금강물 마신 규수 며느리 삼기 두렵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가? 높은 분들께 한마디만 물어보자. 금강물 악취사건 뒤로 오늘까지도 3급수, 4급수, 인제 못마실 지경이라고 동네가 시끄러운데 이래도 쉬쉬하고 덮어버릴 수 있는가? 조용히 시켰으면 무언가 보이는 게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용담땜만 막으면 우리 개땅이 황금땅 된다고, 그 기가 막힌 땜만 막으면 무공해 첨단 산업 들어오지 말래도 들어온다고, 이십년 삼십년 이땅에 공장 한 개 못세운 것이 전화위복이라고, 동네 떠난 젊은이들 다 돌아올 것이라고 우리같이 무딘 사람들 느긋이 허리띠 풀어놓게 하더니 그래 그 말씀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아픈데를 감출려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정작 제 아픔이고 제 가족의 아픔 같았으면 앞 뒤 가리지 않았다. 앞 뒤 가릴 것 없이 선생님께 쫓아가 드러내 보이고 우선 살리고 볼 일 아닌가? 소변검사, 피 검사 가리지 말고 알아볼 것 다 알아보고, 사진이랑 찍어보고 그리고 치료해야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문화저널 아무리 무디지만 쉬쉬하는데 급급하면 그 사람 우리편 아닌 것 인제는 알겠다. 눈치 다 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분들 사택에는 어김없이 새벽으로 석간수 날라다 주고 가는 사람 뒷모습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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