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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칼럼·시평 [시]
哭(곡) 시인 고정희
김용택 시인(2004-01-29 14:30:22)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끌어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지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밷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1983년이든가 4년이든가 나는 첫시집을 내려 서울에 갔었는데 그날 마침 마포에서 민족문학 작가회의 사무실 현관식이 있어 촌놈인 나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많은 시인 소설가들 중에서 처음 고정희와 알게 되었다. 아니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대뜸 “야 고정희 니가 고정희냐” “야 촌놈 니가 김용택이냐”하며 서로 껴안았다. 주위에서 이시영, 송기원, 죽은 채광석이랑 모두들 “야 니기들 결혼해라” 라고 모두들 진짜 서두르고 다그치는 바람에 그러면 그러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당장 가자고 서두르며 김사인이랑 이시영이랑 저녁내 이집 저집 다니며 술이 취했고 어쩌다 고정희를 찾으니 그것이 어디로 가버렸다고 고함을 지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 적이 없어 그저 지면으로나 서로 확인하고 있었는데, 작년이었다. 전화가 왔는데 대뜸 “야 용택아 나다. 고정희여 나 너그집에 놀러 가도 되냐” “누구랑 오냐” “조옥라라고 서강대 선생인데 참 좋은 사람과 같이 갈게 기달려라잉”하고는 전화를 끊겼다. 나느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어느날 집에 퇴근하여 우리집 문앞을 보니 웬 여자 둘이 서 있었다. 누가 또 왔는가 하고 부지런히 가 봤더니 고정희였다. “용택아 잘 지냈냐” “오냐 잘 지냈다” 하며 우린 손을 잡고 악수를 굳게 하고 온갖 짖궂은 장난과 우스개 소리들을 하며 강길을 걸었었다. 곧 필리핀에 가서 1년동안 있어야 하는데 지리산과 섬진강을 가슴에 담고 외국에 가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같이 온 조옥라 선생과 둘이 새벽같이 일어나 징검다리에 서 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우리 어머님이 “야아 용택아 저 연잔 꼭 남자같다잉”하면서 웃고 우리 민세가 ‘삼촌’이라고 해서 또 웃으며 우린 참 재미있게 놀고 그는 지리산으로 갔다.
그리고 지난 9일 그녀가 지리산에서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광주에서 장지인 해남으로 가는 길엔 비가 오락가락 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해남읍을 지나 한 10분쯤을 달려 산이 빙 둘러싸인 넓은 들 가운데 야뜨막한 야산에 우린 그를 다독다독 묻었다.
팔리지 않아 해골처럼 널려있는 마늘을 보며 그의 뼈를 생각하고 있는데 황지우가 옆에 있다가 “형 꼭 마늘이 해골 같네인” 하길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을 지나 멀리 산자락에 시인 김남주 마을을 바라보며, 한 들판이 두명의 시인을 낳았다고 이야기하며 소낙비 오는 천막속에서 우린 술을 마셨다. 술들이 취하자 모두 객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강형철이라는 놈이 고정희 집앞 무논에 들어가 맨발로 뛰어서 돈 3만원을 따먹고 마을을 휘 둘러 본 후 우린 빗속에 차를 탔다. 한 젊은 시인을 묻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회를 보다 김준태가 마이크를 잡고 고정희를 생각하는 몇마디 말을 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문병란 선생님이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서럽게 불고 남주형이 ‘찾아 갈 곳은 못되더라 내고향’의 노래를 3절까지 불고 박선옥이가 노래 불고 도종환이가 서럽게 노래를 불렀다. 객지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그를 묻어버리고 뿔뿔히 흩어졌다. 며칠 간 나는 강길을 걸으며 고정희를 추억하고 그의 너무 이른 죽음을 생각하며 지냈다. 누웠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도 그를 생각하며 뚝- 모든 현재 진행형의 모습이 끊기곤 했다.
아마 모둔 그렇게들 며칠을 보내고 모두들 또 일상속으로 자기의 일로 인해 고정희는 사람들 마음에서 숨어 버리리라.
위의 ‘사십대’라는 시는 병원 영안실에서 누군가 내게 준 그의 마지막 시다. 그가 지리산으로 가기 전에 누구에겐가 준 것이다. 윤정모, 이시영, 홍희윤, 송기원이랑 이경자랑 유시춘이랑 앉아 있는데 누군가 한 장 불쑥 주고 가서 펴보니 그의 시였다. 시를 돌려가며 읽고 우린 너무도 당혹했다. 그의 삶의 궤적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 그가 이 땅에 뿌린 모든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 우리들은 그의 마지막 시를 읽으며 더욱 비통함과 슬픔에 빠져 들었다. 너무나 할 일이 많고 너무나 원통한 일들이 많은 이 땅에서 그가 불렀던 노래들이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했다.
정말이지 한 시대를 불꽃같이 살다 간 그. 그가 남기고 간 모든 생각들이 우리 가슴에서 살아나길 우린 꿈꾼다. 그리하여 그가 불렀던 ‘저 무덤위에 푸른 잔디’처럼 그가 부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몫이다. 좋은 시인의 죽음,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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