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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 | 칼럼·시평 [문화시평]
고향에 흩뿌리는 생기발랄한 생명의 기운
김병종 30년-생명을 그리다 展
최형순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2014-02-05 10:20:17)

김병종, 그가 얼마나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그의 그림과 글이 얼마만한 영향력을 끼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과 그의 문장력과 그의 예술표현력에, 그림의 상업적 성공과 유명세까지 어떤 점에 있어서도 토를 달기 어렵다. 전북에서 나서 자라고 이제 회향(回鄕)전을 갖는 김병종의 전시를 통해, 그러므로 성취의 이익을 더 가져갈 쪽은 아무래도 작가보다 전북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전북전()에 나온 작품들이 그저 모두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바보 예수>에 잘 생긴 예수는 없다. 성스러운 예수를 위한 꾸밈도 찾기 어렵다. 중동에서 태어난 예수가 이탈리아 미남으로 기억되는 것이 오류일 수밖에 없듯이, 그 생김과 모습을 따지는 것은 덧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저렇지 않아, 여전히 이런 투정은 계속되고 있다.

수묵으로 그린 예수. 흐린 먹 선으로 그린 코, 검은 먹빛 한 필로 둥글게 그린 벌린 입, 그 속에 선명한 이, 머리를 옥죄는 가시 면류관과 그 아래 한 점 붉은 눈물. 그 표현엔 어떤 제약도 없다. 백인인지 아닌지, 닮았는지 않았는지, 사실인지 아닌지 묻는 것을 부끄럽게 한다. 잘 쓴 글씨가 무엇을 닮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글씨를 우리는 그 필획 자체가 풍기는 아름다움으로 본다. 글씨의 아름다움을 원천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의 필획도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하나의 필획으로 모든 기운을 담아내려한 수묵의 선. 이 그림은 그러므로 예수의 얼굴생김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필선으로 볼 일이다. 가득한 눈물이 아니라 여백 속에 붉게 찍힌 단 하나의 점으로도 오히려 다 채운 것보다 더하게 복받치는 눈물을 자아낸다. 먹의 농담 속에 선명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신음하는 극한의 고통은 또 어떤가. 그리하여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절규하는 예수는, 그 어떤 그림도 표현하지 못한 깊은 인간적 고뇌를 더없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도발적인 주제 <바보 예수>를 통해서 너무나도 인간적인, 더더욱 사실적인, 진실에 가까운 예수를 아무도 그리지 않은 수묵과 우리의 심성으로 여하히 보였다면, <생명의 노래>는 ‘신이 아닌 인간’만이 아니라 그 인간에게 핍박받는 모든 생명으로 눈길을 돌린 결과다. 호접몽(胡蝶夢)으로 잘 알려진 장자풍, 또한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 물과 물고기와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수무어무인무(水舞魚舞人舞)>와 같은 주제는 이중섭이 게와 물고기와 사람으로 구성한 동화 같은 화면을 떠올리게 한다.

연하게 아름다운 색채와 형태로 빚어내는 생명예찬은 작가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발견한 작은 생명들에 대한 표현들이다. 김병종전 개막식의 이어령 특강은 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바다 속 어떤 물고기도 발견할 수 없는 바다의 모습은, 죽음의 고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게 된다는 비유. 날치가 참치에 쫓겨 죽을 고비에서 마지막으로 바다를 뛰어오를 때 비로소 보게 되는 바다풍경. 김병종이 노래하는 생명은 그와 같이 우리로 하여금 결코 볼 수 없던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노래> 시리즈의 더 많은 작품 경향은 황토빛 닥판에 갈필이 드러나는 검은 먹선이 가득 차있는 거대한 화면들이다. 숲 속의 많은 생명들, 날아오르는 작은 새, 올빼미, 부리를 몸속으로 묻은 새, 그리고 송홧가루 분분한 봄 빛 속에 어우러진 나비는 때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말을 제외하면 대체로 숲 속의 작은 생명들이다. 그 생명을 감싸고 있는 초목과 자연이 보여주는 숲 속 생명의 노래는 일관성과 완성도로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찾아가 그린 <길 위에서> 연작과 같이, 이제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과 또 다른 양상이다. 전체적으로 화선지의 수묵에서부터 황토빛 닥판 위에 거친 검은 필선으로, 이제 다시 화려한 원색과 캔버스에 이르게 된다. 처음과는 확연히 다른 변화로써 하나의 작가양식으로 정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복제의 무한반복만이 작가의 양식을 결정하는 모든 것은 아니다. 20세기 미술의 역사와 같은 피카소의 현란한 변화 속에서도, 그의 양식을 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듯이 말이다.

얼굴 이미지보다 선과 색 하나하나의 표현성을 강조한 김병종 스타일은 최근의 작품에서도 얼마든지 드러나고 있다. 캔버스에 거친 물감으로 갈필처럼 처리한 흔적들, 두터운 질감, 화려한 원색과 커다랗게 가운데에 하나의 형태로 강조한 새싹이나 꽃잎, 그것은 길 위에서 만난 세계의 이국적인 사람들과 삶을 그의 스타일로 여전히 표현해내고 있다. 양식의 완성이 작가의 예술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라 할 때 자유롭고 풍성한 변화, 오히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가양식이 정녕 예술다운 것이리라.

작가가 어릴 때부터 일찍이 읽고 짓고 그리고 만들며 형성한 풍성한 자산은 스펀지처럼 모티브를 흡수해 수많은 사상과 예술적 표현을 선사해주고 있다. 그 생기발랄한 생명을 바라보는 기쁨이 이곳 예향에 더욱 진한 향기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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