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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마음에 담아 두고픈 건강한 도읍, 전주
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2003-07-03 10:30:36)

밝아오는 이천년의 새아침을 맞으며 희망 있는 미래를 열어보겠다던 다짐이 1년도 안되었는데 벌써 퇴색해 가는 것일까. 전주를 확 바꾸자는 거창한 외침 앞에서 철학과 내용(contents)이라도 조금 고쳐 보자는 소박한 나의 뜻에 과연 행동이 뒤따랐는지 생각하면서 지난 일을 되돌아본다. 98년 4월 전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과 함께 하면서 3년 동안 향토를 위하여 의미 있게 한 일을 자신에게 이야기하라면 할 말이 없음을 느낀다. 미완의 기획들, 서울 일에 쫓겨 채 정리되지 못한 조언들,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았던 수많은 일들이 있다.

나이가 들고 외로울 때면 누구나 고향 생각을 한다. 역사와 문화의 고향 전주는 2001년 한국 방문의 해와 2002년 6월 전주 월드컵 대회에 대한 희망이 넘치는 도시이다. 해방 후 50년 동안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전북은 한국의 푸른 정원이요, 청정한 전원도시이고, 역사의 강물이 조용히 흐르는 정중동(靜中動)의 동맥이다. 힘이 넘치는 심장 박동에 따라 온몸에 피를 힘차게 돌게 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를 기대하고 싶다.

옛 전주를 유현(幽玄)하게 간직하는 것은 첫째 긍지와 자부심을 지키며 전북의 심장부로 자랑스럽게 가꾸는 것이다. 옛 전주의 요체는 고도(古都)로서 정통성 있는 역사, 문화 환경에 있다. 한 두 가지 예를 든다면 완산주(完山州)와 견훤왕, 조선 팔도 관찰사 시대의 관련 유적, 천주교 성지, 동학 관련 유적, 근대 백년 문화 성장지 등등 헤아릴 수 없으며, 계획된 보존 및 문화상품화 전략이 필요하다. 실제적인 사업으로 조선시대 옛 도시의 정비와 보존을 들 수 있다. 경기전, 오목대, 풍남문, 전동성당, 교동, 풍남동, 완산동, 서학동, 전주천, 남문시장의 중장기 정비·보존 계획은 전주 역사·문화 미래 전략의 핵심이다.

두 번째는 유적별, 지역별, 부문별 개개의 전략이 총체적 종합 계획 아래서 깨끗한 녹원의 도시, 세계적인 생태 문화 환경 도시 만들기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포근한 미소와 함께 자부심 강한 시민이 만들어 가는 전주는 쓰레기 분리 수거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위생적인 열린 주방에 최고의 서비스가 숨쉬는 음식 문화에 긍지를 가질 것이다. 또 예술적이고 시적 영감이 머무르도록 문화 시민이 만드는 청결한 화장실이 있는 도시, 수돗물의 리사이클링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도시, 쓸 데 없는 가로등이 저절로 소등되는 에너지 절약의 도시로 경영되어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 최고의 초·중·고·대학이 어우러져 과학·예술·학술·문학의 창의력 있는 문화 인력이 배출되는 21세기의 낙원도시가 되어야 한다. 애족 애민의 마음을 가지고 수도승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애국 고시원이 운영되는 곳, 3000억 정도의 문화기금 등 사회 간접 자본이 마련되어 모악산 중바위 기린봉의 소나무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는 문화 생태의 도시이기를 기대한다.

이와 같은 튼튼한 사회 문화적 기반 아래서 전주가 전북 사람의 중심적인 문화 쉼터로 뿌리 내려야 한다. 현대 산업의 꽃인 축제의 도시로서 전주 문화 축제와 세계 소리 축제가 내실화 되고, 영상도시로서 영화·영상·IT 산업 단지가 조성되고 영화 박물관과 역사 민속 문화 촬영 공원이 계획되어 21세기 영상 산업의 메카가 되어야 한다. 종합 영상 산업의 획기적 발전은 부수된 문예, 음악, 무용, 미술, 패션, 공연 등 생활문화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릴 것이다.

세 번째는 옛 것과 현대를 아우른 도시로서 한국인과 동아시아인이 가장 살고 싶은 전북으로 가꾸는 것이다. 지리산, 덕유산, 마이산의 산림과 서해의 넓은 대해, 젓줄로 흐르는 금강과 만경강, 드넓은 호남평야와 금만경평야 그리고 기름진 밭을 두루 갖추고 있는 농경문화가 잘 갖추어진 전북 만한 지역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세 가지 전제조건의 기초 위에 과학적이고 치밀하면서도 세련된 서비스와 경영의 흐름이 이어져야 한다. 전주인의 자연스러움, 여유, 친절함, 은은함과 선한 눈빛, 순박한 말투, 소웃음처럼 멍청한 듯한 순박함은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다. 전주를 찾는 고향, 타향 사람들에게 전북도민, 전주시민이 보여주는 생활 속의 친절함과 시종여일(始終如一)한 마음은 위대한 감동이 될 수 있다. 자연의 일부로 이루어진 전주의 역사, 문화의 참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전주인의 감성은 문화적 항산(恒産)이다. 세련됨과 어수룩함을 동시에 지닌 전주 사람의 상냥한 기품은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삶을 즐겁게 해주는 사계절의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나 가끔 전주를 가보면 도시 계획의 미아처럼 흉측하고 망측한 도시의 흐름과 2000평 복합 건물 앞에 붙여 200평 상가 건물이 가리고 있는 괴물 건축과 만나게 된다. 서신동, 팔복동 옛 마을에 큰길을 뚫어 만든 사거리와 도시의 나대지에는 흉측한 축대 위에 게딱지같은 집, 폐건축 자재, 산업쓰레기, 아스팔트 드럼통이 우울하게 웅크리고 있다. 풍남문과 전동성당을 잇는 스카이라인은 1950년대 이후 임시 가건물이 지금까지 시야를 어지럽힌다. 서남 전주의 관문인 국립전주박물관 주변은 최소 3만평, 적어도 10만평 정도의 문화시설지구로서 공원화 되어야 함에도 주유소와 쓰레기 터, 골프연습장으로 10년 간 방치되고 있다.

한옥의 숲 속에 문화쉼터로 건재하였던 전주의 깔끔한 휴식처와 으뜸 음식의 창조처였던 은행여관, 경기여관 등은 세월 속에 없어져 버렸고 중앙동의 골동, 서화 상가와 전통 찻집으로서 서화 전시장이었던 예술 살롱, 다방들도 시들어 가고 있다. 너무 깨끗하여 찬사를 던졌던 거리, 사설 판소리 공연장인 조용한 음식점 등도 현대사회에 묻히어 그 명맥마저 잃어가고 있다.

지금 전주에는 향토의 미래 색(color)과 아름다운 도시의 선(line)과 시민의 격려 어린 따뜻함(warmness)과 성취 욕구(need of achievements)의 기초가 녹아있는가 자문하여야 할 시간이다.

21세기에는 거추장스럽게 여기던 지난날의 문화 유산이 기술 문명과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성장 제약 요소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한국 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줄 위대한 재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것을 깨닫고 예산을 세워 지키려고 계획을 세웠을 때 위대한 재산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흉물이 되어 기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문화 투자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신념으로 전북의 경제, 사회 발전의 실마리를 문화의 부흥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을 이끌어 가는 공무원 조직의 정신적인 혁신이 이루어져야 하며 계획에 대한 철학과 전문성, 철저한 구상과 확실하게 검증된 방법을 확보하여야 한다. 깨어있는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예산 절약의 위민 정신이 경영혁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전주시민들도 참여하지 않고 불평과 비난만 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조언과 격려, 칭찬의 말과 박수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문화 전문가들과 공직자들이 치열한 자기 노력과 전문가적인 창조력을 다하여 투명한 행정과 슬기로운 대안 모색으로 국민의 호응에 답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성숙한 전북 발전을 위한 대안 있는 국민의 비판과 현실성 있고 책임감 있는 발전계획이 단기 4334년에는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실천되기를 기대한다.



이종철 |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했다. 덴마크 민족학 박물관 초청 학예관과 일본 동경대학 문화인류학 연구실 객원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한양대, 홍익대에서 인류학, 박물관학, 한국민속학, 문화변동론 등을 가르쳤다. 1995년 국립전주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문턱 낮은 박물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이다.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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