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1.1 | 칼럼·시평 [문화시평]
역시 진실이어야 한다
이철수 판화전 <이렇게 좋은날>
김병기 전북대 교수·중문학·서예평론가(2003-07-03 11:08:50)

진(晉)나라 사람 도연명(陶淵明)에게 물었다. "먹을 건 없는데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도연명이 대답했다.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문을 두드려서 걸식을 하고, 그러다가 내게 여유가 생기면 기장밥도 찌고 닭도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고…." 도연명보다 약 670년 후의 송나라 사람 황정견(黃庭堅)에게 물었다. "배가 고프면 어찌 하겠느냐?"고. 황정견이 대답했다. "배가 고프면 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걸식에도 도(道)는 있어야 한다. 도만 있다면 걸식을 못할 이유가 없는 게지"라고. 이상의 이야기 중 전자(前者)는 송나라 사람 소동파(蘇東坡)의 눈에 비친 도연명의 모습이고, 후자인 황정견의 이야기는 근대의 인물인 양계초(梁啓超)가 비교한 도연명과 황정견의 차이점이다. 도연명의 생각에는 전혀 가림이 없다. 맨살이 묻어 나올 만큼 솔직·담백하다. 그러나, 황정견의 생각에는 구름이 끼어 있다. 자신의 모습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문학사가들은 어느 시인보다도 특별히 도연명을 추앙하여 '불격(不隔)의 시인', 혹은 '생활과 사상·감정이 완전하게 융합 일치를 이룬 진실의 시인'이라고 평한다. 도연명은 진실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분별 지어서 무엇하랴! 이미 할 말을 잊었은데(欲辨已忘言)." 구름만 걷히고 나면 청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철수의 판화는 진실이어서 좋았다. '작품한다'는 티를 내지 않아서 좋았고 호들갑을 떨지 않아서 좋았다. 그림은 삶의 흔적일 뿐, "성과라고 해도 옳지 않고 노작(勞作)은 더욱 아니다"고 하는 그의 착하고 겸손한 고백이 좋았다. 세상에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작품을 했다고 말하는 그런 작품들도 많이 나돌아다닌다. 그런데, 그런 작품일수록 뼈를 깎는 아픔이 있기는커녕, 안일과 방종과 오만만 가득 찬 경우가 허다하고, 그렇게 말하는 작가일수록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신불약(大信不約), 대시불제(大時不齊)! 진짜 큰 약속일수록 약속함이 없고, 진정 큰 시간일수록 일정하지 않듯이 진실을 담는 작가는 오히려 수줍고 편안하다. 어디 봄이 가면서 내년에 다시 오겠노라고 호들갑 떨며 약속하던가? 그러나 때가 되면 일정하게 정해진 날이 아님에도 어느덧 봄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와 있다. 그래서 진실한 작가는 자연처럼 말이 없고, 사기꾼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어김없이 호들갑을 떤다.

작가 이철수는 비록 '노작'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여느 작가의 여느 노작보다도 힘들게 자신을 지키고 가꾸려고 하는, 자신을 향한 정화(淨化)의 노력이 샘솟듯이 드러나 보여서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말하였다. "조잡하고 거친 제 마음을 통해서도 평지 돌출의 관조와 달관이 드러나는 게 나쁠 것은 없지요만 잠시 스치는 생각이 깊어 보인대서 제가 깊어 질리 없고, 드러낸 말이 아름답다 해서 제 삶이 온통 아름다워 질 리도 만무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도연명 같았다. 도연명이 그랬듯이 이철수는 배가 고프면 아무런 구실이나 명분 없이도 걸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개척한 현재의 일터인 3천평 땅을 가꾸어서 먹고 남으면 어설픈 자선사업 흉내내지 않고 그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불러서 조금은 여유 있게 암탉 한 마리는 잡을 사람으로 여겨졌다.

전시장에 함께 간 아내는 이러한 이철수의 생각을 보고 읽어 가면서 무척 좋아했다. 아내는 이철수의 작품을 이철수의 작품으로 알고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 너 작품을 보고 나서부터는 작품에 빠져서 그림을 보는 시간이 자꾸 길어졌다. 아내는 말했다. "마음이 온통 맑아지는 것 같다"고도 하였고 "보다 더 많은 것을 보다 깊은 사랑을 가지고 보아야겠다"고도 하였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그림 한 점을 사자고 했다. 벽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았다. 아내는 작품 값도 싼 편이라고 하였다. 나는 말했다. "이 사람아, 이건 판화이기 때문에 같은 작품을 몇 장씩 찍어 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유일성이 있는 다른 작품보다 값이 비교적 싼 편이지." 나의 설명이 끝나자, 아내는 금새 천진스런 부러움으로 꽉 찬 표정을 지으면서 "그럼 이 판화의 원판은 그야 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네. 아! 좋겠다"고 하였다. 방금 전에 있었던 "맑아지는 정신" 운운 하던 이야기는 어느 새 뒷전으로 물러났다. 사람은 또 이렇게 사는가 보다. 그러한 아내의 모습 또한 진실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나도 아내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농사 짓기 싫어질 것 같은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심지어는 지극히 나다운 생각으로 이철수 선생까지를 걱정해 보기도 하였다. 혹시 농사일을 그만두면 어쩌나 하는 한심하고 부질없는 걱정을 말이다. 문득 당나라 때 배적(裴迪)이라는 시인이 산으로 은거하러 들어가는 친구에게 준 시가 떠올랐다.

"그대 은거하러 간다니/ 깊은 산이든 옅은 산이든/ 산의 아름다움만을 흠뻑 느끼도록 하게./ 武陵 사람이 잠시 桃園에서 놀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 그런 일일랑 배우지 말게나.(歸山深淺去, 須盡丘壑美. 莫學武陵人, 暫遊桃園裏)"

작품은 못 사고 이철수 작품집 『이렇게 좋은 날』과 엽서 몇 장을 사들고서 나와 아내와 딸아이는 전시장을 나섰다. 겨울 바람이 옷깃을 스쳤으나 하나도 춥지 않았고 노을이 붉은 하늘은 어제보다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