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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 | 칼럼·시평 [문화비평]
예술의 깊이, 예술가의 가난 - 그 두 번째 이야기
곽병창 도립국악원 상임연출(2003-07-03 11:12:17)

지원을 늘리면 그만큼 예술이 발전한다고 믿던 그 시절의 안타까운 구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지면을 넘겼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여러 방식으로 늘어난 지원에도 불구하고 예술 발전의 기운이 획기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관한 한, 관립예술단의 영역과 민간문예분야의 영역을 갈라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의상 이분법적으로 갈라서 이야기하자면, 지난 십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관립예술단이 맡은 영역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민간의 문예활동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거나 왜곡되어 있어서, 그 불균형한 인상이 전체를 다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더 길고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거칠게나마 결론부터 지어 말씀 드리자면, 저는 이른바 공적 자금이라는 게 제대로 쓰여야 하는 영역이 바로 문화예술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열악한 예술 생산 현장이라고 여전히 믿습니다. 물론 막연히 생산하는 데에만 쓰일 게 아니라, 생산물을 유통시켜서 그 향기나는 과실을 온국민이 두루 공유하게 하고, 그래서 사람 사는 일이 덜 팍팍해지는 데 기여하는 그런 방식이어야 하겠지요. 자본주의의 예술 생산과 유통 방식에 별 불편 없이 잘 적응해 사는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언급이 말할 나위없이 불편하거나 불필요해 보일 터이지만, 오늘날,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숱한 실업자 예술가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이 문제가 눈 한 번 흘기고 지나갈 일만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어도 민간 분야에서는, 그 귀중한 공적 자금이, 해마다 돈 줄 곳에 기획서를 내고 발품을 팔아 힘 있는 몇 사람을 만나는 단계에서 결정되고 집행되면 그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 일의 거의 모든 분야가 그 화려한 청사진의 단계에만 주목하여 예산을 나누어주고, 그 이후를 잘 평가하거나 문책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일 테지만요.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나라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원을 늘려가고 있는 작금의 이쪽 형편을 둘러보면 드러납니다. 지원의 규모는 늘어나고 있는데 그 지원을 받아 예술생산의 현장에서 일할 민간의 예술창작 인력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른바 수요의 과잉 현상이 일어나서 몇 안 되는 예술 기획자들이 여기저기 지원사업에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구색을 맞추고는 여러겹으로 지원금을 독식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들리는 이야기로 저 남도의 어떤 탁월한 기획자는 올 한해 전국을 통털어, 지역 연고와 관계없이 8개 지자체의 지원 사업을 독식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찌, 그 지역뿐이었겠습니까, 기획자만의 일이었겠습니까? 이건 우리 지역을 포함해서 올 한해 관의 지원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국적인 진풍경입니다.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그 지원 사업들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을까요? 길게 따져 묻지 않아도 되겠지요. 백번 양보해서, 공공적 성과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것이 여러 행사에 겹치기로 동원된 그 개인들의 예술적 역량을 연마하고 높여가는 데에 기여했을까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갑자기 문화의 시대를 외쳐가며 급조되기 시작한 지원금들이, 그 낌새를 먼저 알아챈 발빠른 몇몇 기획자와 사이비 예술가들의 손 안에서 분탕질쳐지는 동안, 정작 만들어진 공연의 편수나 공연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이전보다 줄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거기에다가 그렇게 된 이 현실에 대해 아무도 평가, 반성하거나 질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곁들여 들춰 볼까요? 혹시 모두가 모종의 인연으로 그 일들에 얽혀 있기 때문에 함구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나름대로 반성들 하고 있을 걸로 보고), 그보다도 우리 안에 오랜 시간 동안 또아리를 틀어 온 지원금 지상주의의 망령스런 흔적 탓이라면 문제는 심각한 것 아닌가요?

이 방법이 문화예술을 진흥시킬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을 겁니다. 다만, 비록 한 때나마 예술을 위해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던 그이들을, 솜씨 빠른 쟁이로 전락시켜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더 지원금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현실이 두려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안없는 투정이랄까봐 한 마디만 더하겠습니다. 관(민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원과 보호, 엄정한 관리와 평가에 의해 운영되는 문화예술단체가 늘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가급적이면 많이, 정확하게 그 역량과 진솔함을 검증할 수 있는 모임, 연구소, 예술단, 기획단 등을 체계적으로 육성, 관리하고, 이른바 공적 자금이 투입된 모든 예술행위들에 대해 중간 및 사후평가제도를 엄정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언제는 돈 새는 곳을 몰라서 못 막았던가요?

지원은 늘었다는데, 밥벌이가 안 되는 배우, 시인, 화가, 연주가들은 여전히 많고, 한 때나마 예술을 즐기던 시민들은 저들의 곁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러다가, 예술도, 예술가도 다 가난해지고, 몇몇 브로커들만 살찌는 기이한 세상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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