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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 | 칼럼·시평 [서평]
정치적 공존을 외치다
<아주 특별한 저녁밥상> 윤순례 지음
서철원 작가(2014-02-05 15:03:14)

문학을 대상으로 바라볼 때, 서술자인 인간의 사유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문학 속에 대상화된 인간, 즉 서술자 모두가 문학작품 속에 투영되었을 때 풀어야하는 생의 과제처럼 복잡하다. 그러나 인간은 문학 표현의 주체가 되고, 또 문학에서 삶의 지혜와 순리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문학과 인간의 상관은 동반적 운명을 함께한다. 인간의 문제가 곧 문학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문학 속에다 사유와 인식의 나무를 심게 되고, 이를 통해 생의 ‘밥상’을 열어간다. 인간의 먹거리가 갖는 필연적 개연성, 즉 사회·정치적 사유의 환기로써 밥상은 작용한다.

문학의 관심이 곧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제반 고민을 풀어야 하는 일이 저마다 삶의 먹거리와 관계되어야 한다. 또한 문학에서의 서술자로서 인간은, 정치적 문제에 병치하여 밥상을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든 정치적 활동을 전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공존의 이유이기도 하다.

3막으로 구성된 <아주 특별한 저녁밥상>은 ‘아내’, ‘남편’, ‘곱추처녀’, 이 세 사람의 삶을 1인칭 화법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각각의 상대역을 맡은 ‘허관’, 602동 ‘남자’, 카센터 정비사 ‘종하’가 등장한다.

1막은 ‘아내’의 이야기다. ‘아내’는 시어머니와 허위로 가졌던 아이를 602동 남자로 인해 거짓으로 잃게 되면서 집을 떠나게 된다. 행선지는 용두도의 한적한 절간. 몇 해 전 절에서 만난 적이 있는 목수 ‘허관’을 찾아서다. ‘허관’은 아내에게 정신적 기둥 같은 존재다. 자신을 떠받혀 줄 수 있는, 그러나 그마저 찾을 길이 없다.

2막은 ‘남편’ 이야기다. ‘아내’가 떠나고 없는 넓은 아파트에 남편은 페르시안 고양이 ‘총총’과 함께 남아 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으나, 신경 쇠약과 생식 능력의 부재만큼은 그에게 치명적인 결함이다. ‘아내’가 낳은 것처럼 꾸며 몰래 아이를 입양하려는 어머니의 계획 앞에서도 무기력했던 ‘남편’은, 그 모든 상황에 지친 아내가 우연히 집을 잘못 알고 찾아든 602동 ‘남자’를 빌미로 거짓 유산을 꾸며낼 때도 방관하기만 한다. 

3막은 ‘곱추처녀’ 이야기다. 곱추처녀는 ‘성북동 안방마님’ 댁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페르시안 고양이 ‘총총’을 보살피는 것이 그녀의 주요 일거리다.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스무 해를 산 ‘곱추처녀’는 타고난 신체적 결함 따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담담하게 살아간다.

윤순례의 소설 전략은 세 가지 유형의 가상세계를 조합으로써 하나의 서사 체계를 이룬다. 이 전략은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사유(서술자적 관점에서 볼 때,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진실과 위악, 조장과 화해의 제스처까지 모두 포함하는)를 확장하는 의미로 풀이된다. 각기 다른 세 가지 가상공간은 서로 단절된 문을 열고 하나의 공간으로 재배치되는 정치적 인간생태의 극명함을 밀도감 있게 끌어간다.

이 같이 윤순례는 인간 저마다의 삶에 끼어든 정치적 병리를 실존적 허구로써 극명하게 드러내는데, 이는 모순적이지 않다. 결국 인간은 정치 상황에서 놓여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정치적인 인간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딜레마 자체가 이미 정치적 제스처란 말이기도 하다.

잔잔하면서도 냉정한 소설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윤순례 특유의 느림은, 꾸미지 않은 일관된 문장으로 삶을 병치함으로써 솔직하다. 가볍지 않은 서술자로서 역설과 직설, 혹은 낯선 일상 앞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소설의 힘은 인간과 인간간 정치적 대치관계에서 묻어오는 희망부재의 전망을 담담하게 묘파한다. 다음 인용문에서 그것은 확인된다.

 

바닷물이 빠질 때 썰물에 편승하지 못한 갯것들은 물이 차오를 때까지 햇살 아래 몸뚱어리를 무방비 상태로 내놓고 견디고 있었다. (본문 18)

 

이 한 문장에서 윤순례 문학의 정치적 세계관을 읽기에 충분하다. 정치적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주변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드러내고 견뎌야 한다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저녁밥상>에는 인간 삶의 궁극이 정치적으로 치닫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존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정치적 시선은 객관적이며 싸늘하다. 등짐 진 자들의 허랑한 허리춤에서도 이미 작가의 의도가 정치적으로 허무한 결론에 도달해 있음을 암시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정치상황이 암울하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윤순례의 소설은 ‘우화적인 설정, 느림의 문체적 형식과 극명함’이라는 요소, 그리고 ‘정치적 기린의 시선’으로 일관되게 흐른다. 어쩌면 생의 딜레마로서, ‘우화와 정치적 설정’이 윤순례의 소설에서는 ‘공감의 토대’를 구축하면서 보편적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욕망, 권력, 배타적 생래현상을 매력적으로 발산한다.

거기다 서술자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사회정치에 대한 방관자적 응시와 함께 인간관계의 문제의식을 지닌 참여자로서 목소리를 지닌다. 또한 소설 속 서술자는 일정한 규정과 형식, 모순 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모순, 혹은 배타적인 품성을 유지한 채 독특한 파장을 그리며 다가온다.

 

수많은 열대어들이 노니는 어항은 내 인생 어느 시점에서 필연적으로 깨어지게끔 예정되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본문 28)

 

여성운동의 퇴행적 진보성향 앞에, 윤순례 문학의 이데올로기는 현대 여성이 직시하고 있는 삶의 권태와 무기력, 가부장권 내에서의 저항과는 무관하게 여성성의 추구를 내면 깊이 감춘다. 수족관에 가둬둔 열대어라는 소재의 생명 혹은 정치성과 작가적 상상력의 의도가 적절히 결합되어 있는 작가주의의 맹렬함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살고 있는 사회 환경과 작품의 추이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로 집중되는 절차적 속성을 지닌다.

이 같은 존재적 속성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음(defamiliarization)과 닮아 있다. 정치적 목적을 피탈한 피지배 계급의 낮은 목소리, 이로써 윤순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구한 운명적 요소’들은 오히려 정치적 관심을 증폭시킨다. 특히나 <아주 특별한 저녁밥상>은 건조한 생활양식에서 오는 습관화된 일상의 정밀한 재현이 아니라 모순과 역행, 가출과 집착이라는 낯선 환경을 통해, 정치적 격변을 권한다.

결과적으로 문학이 정치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는 것은 문학만이 가지는 본질적 가치, 즉 인간과 사회의 상호연관성 때문이다. 언뜻 보면 문학가들은 정치나 사회 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치를 떠난 인간은 생각할 수 없고, 인간을 무대로 삼는 소통 그 자체가 정치인 것이다.

역사와 아이러니가 병치하는 시대에 정치란, 민중의 목소리로써, 시민의 발언으로써 제몫이 살아 있어야 한다. 언제쯤 궁핍과 울분이 사라진 특별한 밥상이 차려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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